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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감성’에 호소하다 <빨간머리 앤: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
이기준 2013-01-09

분홍꽃이 만개한 사과나무 길과 햇빛이 반짝이는 호수. 덜컹거리는 사륜마차에 앉아 커다란 눈망울로 이를 지켜보던 주근깨투성이의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소녀를 기억하는가. 아이들보다도 어른들이 더 기다렸을 빨간 머리 앤이 극장판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한국 관객을 찾는다. KBS에서 첫 방영된 지 30여년 만이다.

<빨간머리 앤: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이하 <빨간머리 앤>)은 캐나다의 아동 소설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원작을 바탕으로 다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 콤비가 만들어낸 50부작 TV애니메이션의 극장판이다. 이 영화는 작품에 특별한 애정을 지닌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TV시리즈 50화 중에서 첫 여섯화를 직접 재편집, 디지털 리마스터링하여 제작한 버전으로 일본에서는 2010년에 개봉했다.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살고 있는 독신남매 매튜와 마릴라는 농사일을 도와줄 튼튼한 남자아이를 입양하려 했지만 고아원의 착오로 정작 기차역에 도착한 것은 빼빼 마른 열한살의 빨간머리 소녀 앤 셜리다. 평생을 시골에서 조용하게 살아온 매튜와 마릴라에 비해 앤은 말이 많고 자주 공상에 빠져들며 사소한 일에도 감탄을 잘하는, 약간은 유난스러운 아이다. 영화는 앤을 고아원으로 되돌려보내려던 나이든 두 남매가 순수하고 여린 앤의 마음에 감동해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시점까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린게이블에서 살아가며 성장하는 앤의 눈부신 순간들과 다이애나와 길버트 같은 캐릭터들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시리즈 전편(全篇)이 안겨주는 극적인 감동과 잔잔한 여운을 맛보기에는 충분하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설립되기 전 악명 높은 당시의 TV 방영 스케줄 속에서도 장인적인 노력을 발휘한 다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뛰어난 연출력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라이온 킹>이나 <미녀와 야수>가 새로운 경향에 발맞추어 3D 컨버팅 버전으로 개봉된 것에 반해 <빨간머리 앤>은 처음부터 ‘아날로그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을 택해 화질 개선 외에는 별다른 변경을 가하지 않았다. 1979년 일본에서 첫 방영될 당시에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 현지 로케이션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배경미술로 TV시리즈 사상 유례없는 탁월한 영상미를 자랑했지만, 그때에 비해 영상기술이 많이 발전한 지금 관객의 눈높이에는 다소 투박하게 보인다. 때문에 이번 영화의 개봉은 이전 세대의 감성이 얼마만큼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내 현재의 관객과 감응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하나의 흥미로운 척도가 될 것이다. 요란한 시각효과와 3D 화면에 익숙한 요즘의 아이들에게 <빨간머리 앤>의 담백함이 얼마나 다가갈지 눈여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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