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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나를 더럽힐 권리(2)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김현주(일러스트레이션) 2013-05-17

(899호 ‘디스토피아로부터’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편집자)

한때 지구인들은 험프리 보가트가 <카사블랑카>에서 담배를 피워물 때, 로렌 바콜이 <소유와 무소유>에서 멋들어지게 담배를 피울 때, 그 장면에 도취되고 매혹되었다. 담배를 물고 있는 제임스 딘은 열렬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흡연장면은 그저 추문에 불과하다. TV에서도 내쫓겨났고, 영화에서도 점차 추방되고 있다.

어쩌다 짧은 시간에 이런 반전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사랑이 그렇게 쉽게 변하니? 혹자는 문명사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입을 빌려, 이것이 “문명화 과정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겠다. 배설과 도축처럼 더러운 것, 죽음과 관련된 장면 등이 삶의 외곽으로 점차 배제되는 과정이 곧 ‘교양’이고, 건강과 청결을 훼손하는 흡연 역시 도태시킬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교활한 말장난이다. 삶의 직접적 현장에서 더러운 장면들을 배제한 대가로, 지구온난화와 조류독감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을 달고 살아야 하는 주제에 문명화 과정을 이야기할 근거가 어디 있겠나. 삶의 생태계는 오히려 더 피폐해지고 있다. 생태계가 망가진 끓는 냄비 속에서 왜 우리는 건강과 청결에 대한 강박을 달고 살게 되었을까? 무엇이 이 역설을 가능하게 만들었을까? 미셸 푸코가 이에 대한 단서 하나를 놓고 돌아가시긴 했다. 이른바 “생정치”. 국가권력이 통제나 치안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인구 관리를 비롯해 국민들의 건강과 생명을 관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권력의 이런 과잉친절은 인간적인 연민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 재생산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흡연에 대한 온갖 경고와 협박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80년대 신자유주의가 고착되면서부터다. 혹독한 경쟁주의가 삶의 에토스로 정착되기 시작했던 그때 말이다. 자고 일어나니, 우리네 인생은 ‘파이터클럽’의 경기장 속에 던져져 있었다.

신자유주의 경기장의 마지막 안내방송이란 이런 것이다. “당신의 패배는 온전히 당신의 책임입니다.” 이 살벌한 경쟁 체제에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담배를 피워대던 사람들은 이제 생존을 위해 ‘자기 관리’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자기 계발서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기복신앙에 가깝도록 건강담론이 넘쳐나며, 실패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자는 힐링의 노래들이 삐라처럼 선전되는 이 시대, 건강과 청결은 그렇게 자기 관리의 단호한 조건이 된 것이다. 당신은 무한경쟁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계발과 건강에 힘써야 한다. 패배는 오롯이 당신의 책임이다. 성형조차 자기 계발의 양식으로 도착된 동네에서 ‘비만자’와 ‘흡연자’는 어느덧 추방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너희들이 이 구역의 낙오자들이다!

내가 삐딱해서인가? 후대의 미래를 인질 삼은 채 생태계를 밥 먹듯 파괴하는 분들이 담배 하나에 벌벌 떠는 꼴이 영 마뜩잖고, 가난한 도시 슬럼가와 비참한 공장식 축산시설, 그리고 거기에서 연원하는 치명적인 전염병 따위엔 관심도 없으면서 자기 주변 청결에만 인상을 쓰는 저 중간계급의 SF적인 속물성이 사실 남우세스럽다. 그래, 열심히 자기 관리들 하시라, 난 담배 한대 피우며 생각이라는 걸 하며 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