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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진] 진짜 나의 발견

이영진

배우 이영진의 말을 빌리자면, <환상속의 그대>는 애도에 관한 영화다. 한 여자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그녀를 사랑했던 여러 사람들은 제각기 고통스럽다. 친구였던 기옥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이 고장난 자전거를 빌려주었기 때문에 친구가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기옥은 그 죄책감을 감당해낼 수 없다. 구겨진 상복처럼 방바닥에 널브러져 슬픔에 잠긴 기옥을, 이영진은 때로는 절절하고 때로는 코믹하게 연기해낸다.

영화배우의 이미지란 화려한 감옥과 같다. 영화배우는 자신을 아름답고 신비롭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모습 속에 갇혀버린다. 이미지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관객의 뇌리에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은 자국이 새겨진다. 우리는 인상적인 데뷔작을 통해 뚜렷한 각인을 남긴 뒤 거짓말처럼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여배우들을 몇명 알고 있다. 그들은 끝내 박제된 자신의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는 배우 이영진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14년차 배우인 그녀에게는 여전히 ‘중성적이고 신비로운 매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독특한 외모 덕분에 남들보다 빨리 주목받을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이미지는 한 가지 색깔로 고정되었다. 각광받던 신인은 다양한 매력을 선보일 새도 없이 우아한 조상(彫像)으로 굳어버렸다. 화려한 데뷔의 대가였다.

무덤덤한 신인상 수상

이영진은 고등학생이던 199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하상백 쇼를 통해 모델로 첫 무대에 섰다. 그녀는 먼저 런웨이에서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패션계는 173cm의 큰 키에 여리여리한 몸매, 중성적인 매력의 독특한 마스크를 지닌 이영진에게 아낌없는 찬사와 러브콜을 보냈다. 그녀는 이듬해인 1999년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주연으로 발탁됐다. 짧게 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먹먹한 눈빛으로 운동장을 달리던 서늘한 낯빛의 여고생 ‘시은’은 관객에게 퍽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신인배우로서는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지만 그녀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고 한다. “여고생 역할을 맡았던 연기자 모두가 신인상을 수상했다. 게다가 처음 영화할 때였으니까 상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주변에서 신인상은 평생에 한번 받는 상인데 운이 좋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하면서도 진짜 내가 상을 받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앞날을 예감했던 것일까. 이제 막 연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그녀에게 ‘시은’의 이미지는 족쇄와도 같았다. 덕분에 차기작 <아프리카>(2001)를 비롯하여 <요가학원>(2009)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엇비슷한 느낌의 배역들을 전전해야만 했다. “그동안의 내 배역들은 실체가 없다고 할까,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결코 만날 수 없는 종류의 인물뿐이었다. 사람인데 사람 같지 않은 캐릭터들이니 나로서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업 연기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마당에 마냥 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꾸준히 여러 작품에 조/단역으로 얼굴을 비쳤다. 의욕은 넘쳐났지만 똑같은 배역만 맡다보니 피로감이 쌓여갔다. 그렇게 십수년을 흘려보낸 그녀에게는 항상 변화의 계기가 절실했다.

미스 캐스팅이라는 난관을 넘어

그러던 중 이영진은 강진아 감독의 <환상속의 그대>를 만났다. 그녀는 그때의 감격을 농담 섞어 “마늘과 쑥만 먹고 지내다가 처음으로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고 전했다. 이영진은 실제로 활달하고 엉뚱한 구석이 많은 자기를 닮은 기옥이 마음에 쏙 들었다. “운이 좋았다. 강진아 감독님이 내 전작들을 한편도 안 봐서 나에 대한 선입견이 없었다. 감독님 눈에는 조금 예쁘장한 여자애 정도로 보였다더라. 작고 귀여운 한예리가 이미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있어서 대비를 주려는 의도였다. 비슷한 느낌을 가진 친구 둘이서 끼리끼리 노는 게 아니라, 여러모로 다른 면이 많지만 절친한 사이를 표현하기 위한 설정이었다.” 물론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녀가 기존에 갖고 있던 이미지에 익숙한 스탭들은 ‘순수하면서도 엉뚱하고 푼수기가 있는’ 기옥을 이영진이 연기한다고 하자 감독을 극구 말렸다. 주연을 맡은 이희준, 한예리와 함께 셋이 서 있는 모습도 왠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여기저기에서 미스 캐스팅이라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강진아 감독은 캐스팅을 바꾸지 않았다. 강진아 감독 입장에서 이영진은 든든한 원군이었다. 왜냐하면 기옥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이영진뿐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친구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기옥을 대다수의 스탭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내부적으로도 기옥은 비호감 캐릭터로 여겨졌다. 감독님은 그것 때문에 많이 속상해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부터 기옥에게 더 마음이 갔다. 그런 면에서 감독님과 말이 잘 통했다. 다들 시나리오를 읽으면 한결같이 ‘기옥이가 이러면 안되는데’라는 반응이었다. 단순히 죽은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집적댄다고 생각하니까 꼴 보기 싫고 짜증났을 거다. 한데 나는 기옥이 자신의 면죄부를 얻기 위해서 혁근에게 접근하는 거라고 봤다. 혁근이 나를 좋아하게 되면, 내가 친구를 죽였다는 부채감을 모두 혁근에게 떠넘길 수 있는 거다.”

잘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영진은 감독의 신뢰에 좋은 연기로 보답했다. <환상속의 그대>에서 그녀는 이영진을 안다고 믿었던 관객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친다. 이영진이 연기하는 기옥은 충분히 납득이 가고, 공감할 만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기옥의 순수함과 푼수기는 웃기다 못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슬픔과 기쁨, 밝음과 어둠을 넘나들며 마음껏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은 생각까지 든다. “이런 캐릭터가 두번 다시 나에게 올 수 없을 거다 싶은 마음에 무척 열심히 했다. 이 영화를 망치면 인생을 조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웃음)”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환상속의 그대>가 무비꼴라쥬상을 탔을 때, 그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신인상을 받았을 때에도 추지 않았던 막춤까지 췄다. 비록 배우에게 주어진 상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제대로 된 연기를 해냈다는 만족감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도 기옥처럼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배역을 많이 맡고 싶다. 나는 연기를 전공한 적도, 연기를 배운 적도 없다. 그래서인지 과잉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버겁다. 나답게 표현하는 것이 더 수월하고 또 맞는 방법인 것 같다. 앞으로도 단순히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남고 싶지는 않다. 넘침없이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어떻게 보면 이영진이야말로 우리에게는 ‘환상 속의 그대’였다. 하지만 그녀는 인터뷰 내내 크게 소리내 웃고 자주 눈시울을 붉히는 감상적이고 격없는 사람이었다. 화려한 감옥에 갇혀 있는 십년 동안 그녀는 끈기있게 기다렸고, 계속해서 연기를 생각했다. 먼 길을 돌아온 그녀는 이제야 제 모습으로 원점에 섰다. 그녀에게 재발견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이영진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magic hour

이영진이 뽑은 <환상속의 그대>의 그 장면

<환상속의 그대>를 연기하며 이영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전율을 두번 느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비오는 날 기옥이 자기 집 앞에서 죽은 차경의 언니 주경과 싸우는 장면을 연기할 때다. 주경은 기옥에게 차경을 죽인 것은 바로 너라고 몰아세운다. “‘내가 너를 미워하는 게 잘못된 거니’라는 주경의 말을 듣고 내가 몸을 홱 돌렸는데 그때의 표정이 너무 마음에 든다. 심정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는 표정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연기하는 순간에도 ‘담겼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두 번째는 혁근의 집에서 혁근이 키스를 했을 때 밀쳐내는 장면에서다. ‘이대로 계속 키스를 할까 말까’ 하는 복잡한 심경이 잘 담긴 것 같다는 것이 이유였다. “억지로 만들어서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스며나오는” 연기를 하고 싶다는 그녀는, 무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기에 오롯한 감정이 실릴 때 배우로서 짜릿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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