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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식] 눈 딱 감고 못된 짓을 해야 했나
장영엽 사진 백종헌 2013-09-13

<러시안 소설> <배우는 배우다> 연달아 개봉하는 신연식 감독

“또 예술과 구원에 대한 영화네.” 지난해 <러시안 소설>을 미리 본 부산국제영화제 관계자들은 신연식 감독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로맨스 장르의 외피를 두른 상업영화 <페어러브>를 제외하면, 신연식 감독의 작품(<피아노 레슨> <좋은 배우>)은 대개 예술 장르의 테두리 안에 위치한 사람들을 조명하며 삶과 예술에 대한 성찰을 풀어놓곤 했다. <러시안 소설> 역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으나 27년 뒤 위대한 작가가 되어버린 한 소설가의 삶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는 영화다. “안 그런 시나리오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여태까지 나온 영화들이 본의 아니게 영화 때려칠 생각을 하고 만든 작품이라 그런가보다. (웃음)”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서 예상치 못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신연식 감독의 저력인 것 같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 신 감독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완성한 <러시안 소설>은 그에게 올 10월 개봉하는 차기작 <배우는 배우다>를 연출할 힘까지 실어준 작품이다. 예술과 구원에 관한 영화가 창작자를 끌어올린 셈이다.

-<러시안 소설>과 <배우는 배우다>가 연달아 개봉예정이다.

=지금 세편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다. 차기작 <조류인간>도 곧 촬영에 들어갈 거라서.

-<러시안 소설>의 주인공 신효가 쓴 소설 중 하나가 <조류인간>이다. 서로 관련이 있는 영화인가.

=연결되는 지점은 있다. <러시안 소설> 속 <조류인간>에 등장했던 김정석 작가가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완전히 독립적인 작품이 될 거다. <러시안 소설>보다는 훨씬 상업적인 작품이 될거고. 이번 영화 보면 알겠지만, 상업성은 정말 개의치 않고 찍었다. (웃음)

프랑스영화처럼 사는 게 뭐야?

-영화 속 러시안 소설에 대한 대사처럼 “길고, 복잡하고, 등장인물도 많은” 영화다. (웃음) 어떻게 구상하게 된 작품인가.

=굉장히 옛날부터 생각해왔던 이야기다. 한번도 공개한 적은 없지만, 오래전 <프랑스영화처럼>이라는 단편을 썼다. 광화문에 사는 남자와 혜화동에 사는 여자가 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를 만만하게 보고 자꾸 새벽에 부르는 거다. 남자의 여동생은 오빠더러 휘둘리지 말라고 하며 “그럼 정말 오빠는 프랑스영화처럼 사는 거야”라고 말한다. 프랑스영화처럼 산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남자는 동생이 어떤 관념을 가지고 그 말을 했을까 궁금한 거지. <러시안 소설>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가림이가 성환에게 “오빠는 러시안 소설 같아요”라고 말하고 성환은 그 말의 의미를 궁금해한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같은 기준점을 가지고 같은 언어로 얘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굉장히 다른 관념을 가지고 살고 있다. <러시안 소설>은 그에 관한 영화다.

-처음에는 ‘중년 멜로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으로 <러시안 소설>을 준비했다고 들었다(첫 번째 작품은 <페어러브>다). 결과적으로는 의도와는 다른 작품이 된 것 같다.

=원래는 중년의 무명작가가 몇년 정도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의식을 되찾았는데, 병상에서 일어나고 보니 유명 작가가 되어 있어 예전에 알던 여자들도 그를 다르게 대한다는 식의 멜로영화를 생각했다.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문득 당시 연기를 가르치고 있던 학생들을 배우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젊은 배우들을 캐스팅하면서 <러시안 소설>도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어버렸다.

-젊은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 이유가 있나.

=<페어러브>를 끝내고 힘든 시기를 보냈다. 빚도 얻고, 상업영화 감독 계약을 몇 편 했다가 도중에 잘리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내가 한국 영화산업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다. 사실 <러시안 소설>은 이 작품을 끝으로 영화를 그만둘 생각으로 만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상업영화에서는 못 해본 실험을 해보고 싶더라. 외부 환경에 영향받지 않는 나만의 시스템을 만들어볼 생각을 한 거다. 그 시스템의 기반에는 배우를 키워보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좋은 신인도 발굴해내고, 기존 배우들의 다른 면도 끄집어내보자는 생각으로 <러시안 소설>에 등장하는 배우들에 맞춰 소재를 바꿨다.

-전작 <좋은 배우>를 만들 때에도 “하루 찍고 5일 연습하는” 식으로 배우들의 연기 지도에 공을들였다고 들었다. 언제부터 연기 연출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

=개인적인 계기가 있었다. <좋은 배우>를 연출하기 한참 전, 그러니까 내가 20대일 때 알게 된 어떤 여배우가 새벽 2시에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쓴 시나리오의 캐릭터를 두고 “감독님, 이 캐릭터는 이런 모습이 아닐 것 같은데, 왜 이런 행동을 하죠?”라고 묻더라. 그래서 한두 시간 정도 통화를 했다. 자기 말도 100% 이해하지 못하는 게 사람인데, 어떻게 가상 인물의 감정을 알 수가 있지? 그녀의 말을 듣고 그런 의문이 들었던 것 같다. 그 의문을 해결하려는 과정의 일환으로 연기 수업을 시작했다. 지금도 누굴 가르치려고 연기 수업을 하는 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게 맞다.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러시안 소설>의 전반부에는 신효가 쓴 네편의 소설, <조류인간>과 <천년의 물약>, <통정>과 <귀기울여 들으면>이 등장한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며 어떤 순서로 이야기를 집필했는지 궁금하다.

=그냥 순서대로 쭉 썼다. 전반부와 후반부라는 큰 구조, 그리고 엔딩 신을 생각한 것 외엔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썼다. 쓰면서도 다음 대사가 무엇인지 나도 몰랐다. (인터뷰를 진행 중인) 이 카페에서 <러시안 소설>을 썼는데, 심지어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시나리오에 넣기도 했다.

-이 영화에선 앞부분에서 소개됐던 소설의 인물이나 대사가 다음 소설에 슬쩍 끼어들기도 하고, 소설의 내용과 주요 등장인물의 삶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영화의 구조 안에서 이야기가 물 흐르듯 흘러가는데, 별다른 계획 없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점이 놀랍다.

=‘물 흐르듯’이란 표현을 했는데, 영화가 그렇게 나오려면 나 역시 물 흐르듯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어떤 틀을 미리 짜놓고 작품을 쓰면, 기대 이상의 무언가가 나올 수 없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시나리오는 지도라고 생각한다. 이 지도에서 중요한 건 보물이 있는 위치이지, 그 보물을 찾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나는 배우, 스탭들과 보물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으로 <러시안 소설>을 만들었다.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지만, 그런 건 사실 고민조차 해본 적이 없는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형식을 반영한 듯 1인칭, 3인칭 등 다양한 시점으로 영화가 전개되는데.

=그건 의도했던 바다. 이 영화를 만들며 창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많이 했다. 창작자의 삶이란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관점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가 소설이고 어디부터가 소설이 아닌지, 또는 어디까지가 신효의 소설이며 어디까지가 김정석 작가나 경미의 작품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장치를 많이 넣었다.

김기덕의 상징, 신연식의 서사

-“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했는데,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신을 괴테가 여행을 떠나는 아들에게 쓴 욥기의 한 구절로 열고 맺었다(“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평소 참 좋아하는 말이다. 시나리오를 쓰며 신효가 존경하는 작가이자 성환의 아버지인 김기진 작가의 모델을 나는 괴테에 가깝다고 느꼈던 것 같다.

-김기진 작가는 <러시안 소설>에서 일종의 이상적인 인물이다. 혹시 감독님에게 괴테가 그런 존재인가.

=그렇지는 않다. 내겐 갈망하고 닮고자 하는 존재가 없다. 사실 나는 영화를 어디서 배운 적이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철저히 루저의 삶을 살아왔다. 연극영화과도 못 가고 영상원, 아카데미 시험에도 떨어졌고. 그 뒤에도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으나 뭘 해도 되는 일이 없었다. (웃음) 하지만 그래서 300만원으로 <좋은 배우>를 찍고, 안성기 선배를 캐스팅해서 <페어러브>도 만들고,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혼자 저질러왔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영화를 배우지 않았다는 건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일이다. 습작 100편과 목숨을 건 한편을 비교했을 때, 목숨을 건 한편이 내겐 훨씬 센 거 같거든. <배우는 배우다>를 연출하며 제작자인 김기덕 감독님과도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내 생각을 잘 이해해주시더라. 감독님도 ‘맨땅에 헤딩’하는 정신으로 영화를 만들어오셔서 그런지 이런 얘기를 할 때 좀 편하다.

-신효는 문학적 기반도 없으면서 자기 소설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이고, 성환은 지식인이나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롤모델이 있을 법도 한데.

=특정 인물을 모델로 삼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만들고 나서 보니 이 두 캐릭터가 내 콤플렉스의 양면을 반영하는 인물이란 생각은 들더라. 감독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박찬욱 감독님처럼 세련되고 아카데믹한 분위기의 감독님도 있고, 김기덕 감독님처럼 종교를 대하듯 순수한 열정으로 영화를 만드는 분들도 있다. 나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쪽 관점에서 보면 망나니고, 저쪽에서 보면 가방끈이 어설픈 사람처럼 보이니까. 이러한 나의 모호한 정체성이 신효와 성환이라는 두 인물에 녹아든 것 같다.

-인정받지 못하는 신효의 젊은 날을 조명한 전반부와 식물인간이 된 그가 유명 작가가 되어 깨어난 후반부는, 촬영부터 이야기의 정서까지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영화 두편을 합쳐놓은 것 같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140분으로 길기도 한데, 두편으로 나눠 찍을 생각은 안 해봤나.

=그런 생각도 잠시 해봤다. 하지만 전반부가 없으면 후반부가 의미 없어지기 때문에 따로 만들 생각은 안 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도 전반부와 후반부에 임하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더라. 전반부는 기술적으로 굉장히 난해했던 부분이라 쓸 때 애를 좀 먹었는데, 후반부는 너무 방심한 상태로 쓴 것 같다. 사실 그게 가장 후회된다. 쓸 때도 촬영할 때도, 후반부에 임할 때 너무 느슨했다. 영화를 봐도 뒤로 갈수록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좀 들더라.

-(스포일러 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 입장에선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어 끝까지 몰입하게 되는 힘이 있더라. 결국 신효는 누가 자신의 소설을 고쳐썼는지는 알게 되나 그와 만나지 못한 채로 영화가 끝나게 되는데, 이처럼 명확하지 않은 느낌의 엔딩은 처음부터 구상했던 건가.

=사실 처음 생각한 엔딩은 더 셌다. 새벽에 신효가 낚시터로 찾아가면 나이든 그의 친구가 미라처럼 쪼글쪼글한 모습으로 낚싯대를 잡고 있다가 편지만 전해주는 장면이었는데, 그 엔딩이 더 셌을 거다. 이 장면은 <러시안 소설>을 만들며 내가 포기한 여러 가지 것들 중의 하나다. 내가 안성기 선배님이랑 비슷한 부분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는 걸 정말 싫어한다. 연배 있는 배우분에게 새벽 촬영에다 추하게 나오는 역할을 맡아달라고 도저히 부탁드리지를 못하겠더라. 이건 오프 더 레코드로 하는 얘기지만, 감독은 좀 이기적이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오프 더 레코드로 할 법한 이야기가 아닌데? (웃음)

=그런가. (웃음) 내가 이타적이고 착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어떤 순간에는 눈 딱 감고 못된 짓을 했었어야 하나 싶은 순간도 찾아오더라고. 그런데 난 그게 참 안되더라. 이번에 <배우는 배우다>로 첫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찍었잖나. 세게 밀고 나가야 하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그런 장면을 연출할 때 좀 마음이 괴로웠다.

-<배우는 배우다>는 처음으로 다른 감독의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연출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러시안 소설> 이후 이 영화를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영화 속 신효의 소설을 누군가가 고쳐쓴 것처럼, 감독님이 그런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나. 나도 딱 그 생각을 했다. 김기덕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세련된 상업영화를 만들어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엔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했다. 감독님은 상징 베이스의 영화를 만드는데, 나는 서사 베이스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 곧 개봉할 <배우는 배우다>는 누가 봐도 김기덕표 영화는 아닐 거다. 작품의 스타일이나 정서적인 면에 있어 관객들이 보시기엔 그야말로 ‘신연식의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 김기덕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내 스타일로 각색하며 공부가 많이 됐다. 누군가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나간다는 게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러시안 소설>에 대한 얘기를 너무 안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두 시간이 훌쩍 넘는 긴 인터뷰를 마치고도 신연식 감독은 불쑥 이런 말을 건넸다. <러시안 소설>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는 종종 그의 과거와 현재의 일상, 앞으로 몸담을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하지만 신연식 감독이 털어놓는 이야기는 <러시안 소설>의 어느 대목을 떠올리게 하는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건 그의 삶이 영화의 중요한 질료가 되었으며, 더불어 영화가 그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삶과 예술 작업이 별개가 아닌 창작자의 삶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던, ‘러시안 소설 같은’ 어느 초가을날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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