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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욱] 슈트 벗고 야상 입고
윤혜지 사진 오계옥 2013-10-31

주상욱

주상욱은 항상 어딘가에 있었다. 부연하자면, 스무편쯤 되는 드라마와 일곱편의 영화에 주상욱이 있었다. 그는 잘생긴 얼굴을 가진 데다 훤칠하게 키가 크고, 대사를 뱉을 때의 발성과 호흡도 안정적인 ‘괜찮은 연기자’였다. 그런데 그렇게 괜찮은 그가 왜 이제야 눈에 띄기 시작했을까. 주상욱이라는 배우를 이야기하기에 어떤 키워드가 가장 알맞을지 잘 모르겠다. 아니, 어느 때가 적기일지 모르겠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어느 작품에선가 늘 누군가가 되어있었고, 데뷔 때와 똑같은 얼굴로 무슨 일이든 하고 있었음에도 주상욱은 14년 동안 별다른 구설도, 유명세도 없이 조용하고 꾸준하게 ‘배우 생활’을 지속해왔다. “연기 연습? 없다. 안 쉬고 계속 일하다보니 연기 연습이라기보다 할 일, 맡은 일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것도 연습이라면 연습일 수 있겠다. 그래서 작품이 끝나면 캐릭터를 바로 비우는 게 나에겐 더 중요했다.” 배우 생활. 그에게 연기란 곧 일이고 생활이었다.

드라마 <신세대 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를 통해 데뷔했을 때만 해도 그는 특별히 연기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던 것 같다. 단 한번도 연기에 관해 생각도, 고민도 해본 적 없는 이십대 초반의 청년은 자신이 ‘발연기’를 한다는 걸 처음 깨닫고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냉장고 문을 여는 간단한 장면을 촬영하는데도 “냉장고 문을 이렇게 열었던가, 저렇게 열었던가, 집에서 냉장고 문을 열긴 해봤나” 싶을 정도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연기를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연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은 더욱 커졌다. 욕심껏 노력해 몇편의 청소년드라마를 더 찍었지만 다 된 캐스팅이 촬영 직전에 엎어지기까지 하는 등 주상욱에게 연기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난제였다. 다행히도 방황 대신 군입대를 선택한 주상욱에게 군대에서 보낸 2년은 연기에 대한 꿈을 벼리며 절치부심하는 시간이 돼주었다.

뻔뻔할 만큼 넉살이 좋은 편도 아닌데 주상욱에겐 기이한 여유가 느껴진다. 연이어 들어온 ‘화이트칼라 캐스팅’에 특유의 여유만만한 태도가 더해져 그의 말마따나 ‘실장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대개의 드라마에서 ‘실장님’은 현대판 신데렐라의 왕자님 같은 존재다. 본격적인 브라운관 데뷔는 미니시리즈 <에어시티>의 무뚝뚝한 경찰관 안강현 역이었지만 실장님 이미지의 출발은 드라마 <아빠 셋 엄마 하나>의 반듯한 건설회사 직원 정찬영이었다. 훌륭한 매너에 자신감 넘치고 다재다능하기까지 한 정찬영은 주상욱에게 맞춤옷을 입은 듯 어울렸다. 이후 주상욱은 무려 111부작 일일연속극 <춘자네 경사났네>에서 까칠한 부잣집 아들 이주혁을 연기하며 이미지 굳히기에 들어갔다.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 <자이언트> <가시나무새> <신들의 만찬>, 심지어 우정출연한 영화 <용서는 없다>에서마저 단정한 슈트를 입은 전문직 엘리트 남성을 연기했다. 대중은 그의 멋진 모습을 사랑했지만, 주상욱은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에 오히려 갑갑증을 느낀 것 같다.

그간 맡아온 역할을 떠올리면 과연 <응징자>의 준석은 주상욱에겐 낯선 인물이다. 같은 반 창식(양동근)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학교를 자퇴한 준석은 몇년 뒤 주차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고급 차에서 내리는 창식과 우연히 다시 만난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창식을 응징할 계획을 세우는 준석은 여전히 생존 피라미드 가장 밑바닥의 무릎 꿇린 인생이다. 평탄하진 않았어도 크게 괴로울 일도 없이 무난하게 살아 온 주상욱에겐 만만치 않은 역할일 것 같았으나 뜻밖에도 “전에 없던 자유로움”을 느끼며 그는 준석이란 인물의 ‘바닥’까지 무리없이 소화해낸다. “진짜 바닥을 경험해본 적 없다는 게 내 한계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결국 그 경험도 상대적인 것일 테니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첫 주연작으로 준석을 택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새로워서다. “정장 입은 채로 연기하는 평소 모습에서 자유로워지려고 애를 썼다. ‘주상욱에게 저런 면도 있었어?’라는 말만 들을 수 있어도 좋겠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멋있는 역할이 아니라 짜증을 유발하는 집요한 역할이다. 정말 사람 질리게 만든다. (웃음)” 준석을 연기하는 데엔 다른 어떤 준비도 필요치 않았다. “준비를 하다보면 예전의 ‘쪼’가 나올 것 같아” 말투와 행동을 어떻게 지금까지와 달리 보이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뿐이다.

주상욱을 흥미로운 사람으로 여기게 하는 건 그의 일상적인 화법이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쉼없이 수다를 늘어놓는다거나,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호쾌하게 속내를 풀어놓는 모습에서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첫 주연작이라서인지 영화가 어땠냐며 집요하게 캐묻다가도, 금세 한발 뒤로 빼고 스스로에게 지운 부담을 훌훌 털어버린다. “‘뭐 괜찮던데?’ 정도의 반응이면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해하다 끝나지만 않아도 괜찮지 않겠나.”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와 달리 의외의 빈틈도 많다. “요즘 많이들 본다는 <컨저링>이 진짜 무섭다고 하더라. 궁금해서 예고편을 보려고 했는데 차마 다 못 보고 접었다. 대낮에도 공포영화는 못 보겠다. 집에 혼자 있다보면 머릿속에서 자꾸 떠오르면서 별별 생각이 꼬리를 문다. 창문을 보면서 문득 생각한다. 가만, 내가 커튼을 걷어뒀었나? 걷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저 커튼은 왜 걷혀 있지? (웃음) 공포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온다면? 당연히 한다. 영화는 안 보면 되니까. 농담이고, 현장을 다 알고 있을 테니 괜찮을 것 같다.” 몇 차례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으로 주상욱이라는 사람이 실은 꽤 재밌고 소탈한 남자라는 것도 충분히 알렸다. 이미지 변신을 그토록 갈망했건만 새 이미지를 얻고 나니 고민은 더욱 커졌다. “다시 배우로서의 무게감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주상욱은 의외로 친근하다’는 이미지도 나쁘지만은 않지만 이게 잘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되돌릴 수 없다. 하도 여기저기 말을 많이 해놔서.”

다수의 출연작이 무색하게도 스스로 “나라는 사람에게 사실 큰 반전은 없을지 모른다”고 말을 흐린다. 하지만 앞으로 배우 주상욱은 자신이 가지 않았던 곳으로 쭉 걸어가려 하는 것 같다. 필모그래피에 <응징자>와 <조선미녀삼총사>라는 두편의 영화를 더했을 뿐이다. 주상욱이란 배우에게서 흥미 이상의 무언가를 더 발견할 수 있을까. 그 답은 그가 선택할 길을 통해 차차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상욱의 커리어는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다.

<굿닥터>

magic hour

“잘생기고 연기 잘하는”

드물게도 밉거나 싫은 캐릭터가 없는 따뜻한 의학 드라마, <굿닥터>에서 천재 외과의 김도한을 연기했을 때의 자신이 주상욱은 가장 괜찮았다고 한다. 굳이 최근작을 꼽은 건 “예전의 연기는 기억도 안난다”고 말하는 그에게 연기는 생활이고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냥 멋진 역할이 아니라 직업이 뚜렷한 캐릭터여서 <굿닥터>를 선택”했기에 그에게 중요한 건 “의사처럼 보이는 것.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대사만 안 틀리면 오케이될 정도로 정신없는 드라마 촬영장이 좋다”는 것도 주상욱 특유의 직업적 성실성 때문인 것 같다. 뜻밖에도 배우로서의 지향점은 “잘생기고 연기 잘하는 배우”란다. 소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만한 최선의 대답도 없다. 배우의 미덕은 외모를 가꾸며 연기에 힘쓰는 것이고, 직업인들의 최대 목표는 ‘일’을 잘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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