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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풍경
정성일(영화평론가) 사진 최성열 2013-12-19

정성일, 이주 노동자들에게 꿈을 묻고 다니던 장률에게 꿈을 묻다

장률의 <풍경>을 두번 보았다. 장률이 <풍경>을 두번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올해 전주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 세편 중 하나로 고바야시 마사히로, 에드윈과 함께 ‘이방인’이라는 주제 아래 <풍경>을 찍었다. 이 영화는 42분이다. 그런 다음 다시 <풍경>이란 제목으로 이 영화를 96분으로 만들었다. 장률은 두 영화 사이에 일부 장면이 겹치긴 하지만 단순히 늘리는 대신 완전히 다시 편집을 했다. 그래서 앞의 영화를 보았다 할지라도 뒤의 영화를 볼 때 마치 다른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만나게 될 것이다. <풍경>은 장률의 5 1/2번째, 그리고 여섯번째 영화이다. 하여튼 두 영화는 기묘한 방식으로 공존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환기시키고 싶다. 그리고 동시에 <풍경>은 장률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이다. 당신이 장률 영화를 알고 있다면 이 말 앞에서 잠시 멈칫할지 모른다. 과도할 정도로 황폐한 풍경 앞에 서서 거의 멈춘 것처럼 등장인물들이 그저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면서 단지 필요한 말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영화들. 그건 첫 번째 영화 <당시>에서부터 지난번 영화 <두만강>까지 항상 그렇게 세상과 사람이 다루어졌다. 그런데 문득 카오스에 가까운 질서로 넘쳐나는 세상의 리듬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누가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영화를 보았다. 나는 두편의 영화에 대해서 전혀 다른 두편의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자리는 비평에 적절하지 않은 장소이다. 그러므로 재빨리 인상을 쓴 다음 장률을 만나러 갈 생각이다. 장률은 언제나처럼 소수의 스탭을 끌고 구로동에서 안산역 부근에 이르는 동네를 찾아다니면서 이주 노동자들을 만났다. 당신이 떠올리기 간편한 이미지들은 이 영화에 없다. 장률은 그들의 고단한 삶에 관심이 없다. 그 대신 만날 때마다 단 한 가지 질문을 한다. 14명의 이주 노동자들. 14번의 질문. 14번의 대답. 당신은 한국에 와서 무슨 꿈을 꾸었습니까? 당신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률은 여기서 내면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따분하게 프로이트의 꿈에 관한 이론을 늘어놓지는 않을 생각이다. 누군가는 꿈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꿈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소망을 늘어놓고, 누군가는 그러면서 고백을 하고, 누군가는 아무 대답 없이 그냥 그 자리를 피한다. 그걸 장률은 종종 사진관에 와서 증명사진을 찍는 것처럼 바라본다. 나는 그가 이따금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때로 인물이 카메라 바깥으로 빠져나갔는데도 그냥 거기에 멈춰 서 있기도 한다.

장률은 그들의 내면에서 꿈꾸고 있는 풍경을 찍을 수 있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그 대신 그것마저 없으면 거의 윤곽이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이 사람들의 생명이 어디서 숨 쉬고 있는지를 엿보고 싶어 한다. 종종 이 시도는 위험해진다. 대답은 때로 지나치게 순진하고 때로 지나치게 교활하다. 혹은 너무 멀리 있거나 가끔 지나치게 상투적이다. 그래도 장률은 지치지 않고 다시 만난다. 그때 장률은 말의 문자를 마치 풍경을 감상하듯이 들어보고 있다는 것을 문득 알게 되었다. 서울에 온 이방인들 틈에서 그저 우두커니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에게 장률이 연변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장률, 그리고 장루(張律). 이 영화에는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만나는 관찰의 기록이 없다. 여기에 있는 것은 인상의 기록이다. 삶의 리듬에 관한 인상. 그때 장률은 그들의 꿈을 빌려 자신이 여기서 바라보는 신기루와도 같은 풍경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나는 이 풍경화와도 같은 영화가 장률 자신의 초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이 사람에게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이 인터뷰는 여기서 시작한다.

정성일_이렇게 시작하겠습니다. <두만강>을 찍고 나서 의외로 공백의 시간이 길었습니다. 물론 영화에서 공백이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정신적 공백이랄까. 할 이야기는 다 해버렸다는 소진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고향을 드디어 찍었다는 데서 오는 느낌? 그런 다음 <풍경>을 보았을 때 여기서 다시 한번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두만강>은 어떤 영화였습니까?

장률_거의 오늘 처음 얘기하는 거예요. 영화를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어려워서가 아니고, 3년의 공백이란 게, 거기에 노력하기 싫다는 마음이 꽤 있었어요. 나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옆에서 사람들 만나면 (영화를) 하냐, 안 하냐, 뭐 찍냐 물어보지 않습니까. 제일 중요한 건 맥이 좀 풀렸어요. <두만강>은 제일 먼저 찍고 싶은 영화였어요. 준비도 그렇게 했는데 이상하게 제일 늦게 찍었어요. 내 고향까지 다가가는 시간이 너무 길었어요. 그런데 제일 처음 찍고 싶은 영화를 찍었으니까 좀 몸이 풀어진다, 그럴 수도 있었겠죠. 그래서 <두만강>은 하신 말씀이 맞는 것 같고. <풍경>이 내 지금 다시 시작한다… (잠시 생각) 그런데도 아직 포기하는 과정 중에 있지 않겠는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웃음)

서로의 감정이 흐르는 딱 그만큼의 거리

정성일_<풍경>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놀란 건 다큐멘터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장률은 절대로 다큐멘터리를 찍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의내린다면 장률에게 다큐멘터리는 무엇입니까?

장률_원래 다큐를 찍을 생각은 없었지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좋은 다큐를 볼 때 ‘나는 뭐야?’ 하는 생각을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뭔가를 만들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진짜로 나가서 부딪치고 진짜의 것을 만난다는 생각. 실제 다큐를 찍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데 말입니다. 하지만 행동하는 사람이 더 아름답게 보이잖습니까. 전주영화제에서 날 찾아왔을 때도 다큐인가, 극영화인가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 연세대에서 일년 반 동안 일주일에 두번만 강의를 하면서 서울에서 못 보던 이방인들의 풍경을 보기 시작했어요. 나와 사는 방식이 다른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자꾸 눈길이 갔어요. 처음엔 한 40분 정도 영화에 담으면 큰 실수는 하지 않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극영화 생각나는 것도 없고(웃음), 전주에 다큐를 찍어도 괜찮겠느냐고 해서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내 감정의 리듬이 길어졌어요. 장편이 돼버렸는데 (잠시 생각) 지금에 와서는 다큐가 무엇인가 묻자면, 모르겠습니다.

정성일_“좋은 다큐멘터리”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떠올리는 영화가 있습니까?

장률_실제 내가 다큐를 본 건 별로 없습니다. 봤다고 하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중국> (Chung Kuo, 1972). 그때 내가 살아온 그 시대를 밖의 사람이 어떻게 보는가. 극영화를 볼 때에는 항상 밖의 사람이 들어와서 찍으면 엉망이에요. 외국 감독이 들어와서 찍으면 분노할 정도로. 다큐는 더하지 않겠는가. 그 시대를 이 사람은 어떻게 얘길 했는가, 의심스럽게 생각하면서 봤어요. 들어갔는데 빠진 거죠. 재밌는 건 극영화는 그 생활을 잘 알아야 더 좋은 게 나온다 싶지만, 다큐는 큰 시대를 얘기할 적에는 정말 냉정하게 거리를 둔 사람이 마지막엔 진실한 영상을 우리에게 남겨두는 것 같아요. 그리고 중국 감독 왕빙이 찍은 <철서구>(鐵西區, 2003)를 볼 때, 국영 공장이 무너지고 와해되는 과정을 아주 길게 찍었는데 실제 (중국인인) 우리가 보던 풍경이죠. 그 와해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찍는 것. 두 영화를 보면서 나를 위로하고 반성도 했어요. 그 시대의 사회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 두 영화를 인상 깊게 봤어요.

정성일_<풍경>이란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무언가 이전 영화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먼저 받았습니다. 이 제목은 언제 결정한 것인지요?

장률_서울과 경기도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앞의 영화들은 아주 단순해요. 거긴 거기고 그거면 그거고. 영화 찍다가 아니면 다 찍은 다음에 나오고. 이번엔 좀 달랐어요. 처음부터 <풍경>이었어요. 이 영화는 그게 필요했어요. 왜냐하면 시간이 없었어요. (영화제 상영이 4월인데) 12월 중순에 날 찾아왔어요. 거기서 시작되었어요. 시나리오도 없고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2, 3일 동안 찍어보았어요. 그러면 리듬이 생기잖습니까? 해보니까 이건 단편으로 감당을 못하겠더라고요. 아예 망하든지 그 돈을 물어내든지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약속과 어긋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웃음) 솔직히 얘기했더니 전주에서 우호적으로 나오더라고요. 단편 버전을 먼저 주고 그다음을 허락했어요. 사실 전주에서 다 봐줬더라면 아예 단편을 없앨 마음이었어요. (웃음) 1월 한달 동안 일주일에 서너번, 모두 19회차를 찍었어요.

정성일_그런데 장편 <풍경>은 전주 버전을 늘려놓은 게 아니라 구성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두 영화 사이 편집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장률_장편 버전의 원칙은 내 리듬대로 가는 거였고, (잠시 생각) 좀 이상하지만 단편은 솔직히 말해서 원칙이 없었어요. (전주 버전의 마지막 장면이 장편 버전의 첫 장면인데) 실제 내 마음속에서 첫 번째 장면은 장편 버전이에요. 단편이어도 그건 명확했어요. 그렇게 해보지 않은 건 아녜요. 아우구스티노가 떠난 다음 그의 시선으로 그 공간에서 남은 또 다른 이방인을 보려고 했는데 그러려면 시간의 길이가 필요해요. 유일한 방법은 이걸 마지막에 갖다놓으면 내 뜻과는 멀리 있지만 논리적이 되었어요. 장편이 리듬을 따른다면 단편은 계산적인 영화가 된 거지요.

정성일_장편 <풍경>의 첫 장면, 아우구스티노가 떠나면서 인터뷰하는 장면에게, 마치 그를 증명사진 찍듯이 세워놓고 말 그대로 ‘촬영’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종종 사진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장률_실제로 그 사람들 생활이 그렇게 비칩니다. 사람들 사이의 모든 거리는 계산이에요. 나는 실제 거리를 찾았어요. 그런 거리 속에서 나와 저 사람의 감정이 흐를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거리. 거기서 더 들어가면 용기인데 나에게 그런 건 없었어요.

관찰이 아니라, 인상의 기록

정성일_만나는 사람마다 이 영화는 딱 한 가지를 묻습니다. 이것이 <풍경>의 가장 특별한 점이자 들어가는 입구가 될 것 같은데요. 꿈 얘기를 듣는다는 건 무엇입니까?

장률_실제 우리 생활 중에서 마음속의 얘기를 듣긴 어려워요. 꿈 얘기를 듣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가끔 연인들끼리는 꿈 얘기를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불편해요. 정말 깊숙이 들어가야 하니까. 거기에 흥미를 가진 거예요. 그렇게 전혀 다른 것도 소통 못하는데 제일 깊게 가서는 돼요. 물론 처음엔 다른 질문도 했고요. 인터뷰하는 사람들에게 동의를 받는 게 중요했어요. 그 사람도 동의하고, 사장도 동의하고, 그런데 다른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다 거절하는데 이상하게 한국에 와서 제일 인상 깊었던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처음에는 당황하고 몇초 생각한 다음 다 웃어요. 거기서 긴장감이 풀어지고 거의 진실하게 말해요. 이들은 다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깊숙한 꿈을 듣자고 하니까 갑작스럽게 연인의 감정이 생긴달까. (웃음) 나도 이런 소통 방식을 찾았다는 것에 찍어가면서 행복감을 느꼈어요.

정성일_서울에는 아주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기준을 갖고 인터뷰이를 선별했나요?

장률_난 다큐의 정신이 아직 모자란 사람이에요. (웃음)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데 엉뚱하게 뛰어들게 됐으니까. 딱 한 가지 방법. 다양한 장소. 철공장, 농장, 도살장, 다양한 데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 풍경에 대조하면 어떻겠냐는. 모호하게 짜서 무작정 간 거죠.

정성일_영화에 나온 열네명이 인터뷰한 사람 전부인가요, 버린 사람은 없나요?

장률_전부예요. (잠시 생각) 원래는 열다섯명인데 한 사람이 누구냐면, 방글라데시에서 온, 꿈에서 와이프 왔다고 말한. 그전에 옆에서 같이 밥 먹는 사람도 인터뷰를 짧게 했는데 쓰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한 꿈 얘기와 비슷했어요. 중복되고. 그래도 그 사람 얼굴, 생활, 그건 나왔길래 내 마음이 조금 편하고(웃음) 사람이 풍경으로 나왔으니까요.

정성일_<풍경>은 사건을 좇아가는 것도 아니고, 계절도 한 계절에 집중됐고, 사람들 사이에 특별한 네트워킹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배열은 전적으로 연출의 권리인 영화입니다. 어떤 원칙으로 순서를 정했는지요?

장률_처음은 정했어요, (한국을) 떠나는 것. 나머지는 바깥 풍경의 순서를 제일 먼저 생각했어요. 첫 번째 외에는 밖의 풍경. 노동하는 풍경, 아니면 노동하기 전의 빈 공간의 풍경. 아니면 그 안의 사람들 인터뷰 아니면 재현. 소리. 그게 어떻게 자연스럽게 흐름이 됐다, 리듬이 나온다, 그러면 그렇게 갔어요.

정성일_<풍경>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안개가 가득한 한강 강변 고속도로를 달리는 장면입니다. 뭐랄까, 장률의 마음의 풍경 같다고 할까요. 질문을 이렇게 해보죠. 베이징에서 눈을 감고 서울을 떠올리면 맨 먼저 떠오르는 거리는 어딥니까?

장률_(한참을 생각해보고) ….

정성일_전혀 안 떠오르세요?

장률_네. 이렇게 얘길 하다 보니 무의식이 나오는 것 같네요. 김포공항이 맨 먼저예요. (웃음) 이것도 공항이 바뀌면서 그런 것 같아요. 1995년 서울에 처음 왔을 땐 김포공항에 내렸거든요. 그 뒤에도 생각이 났어요. 그런데 인천공항으로 바뀌고, 섞이니까 김포는 거의 생각나지 않는데, 이전엔 김포공항이 생각났었죠.

정성일_<풍경>을 보기 전에는, 아마도 감독님에 대한 선입견인데, 이방인들, 이주 노동자를 찍었다고 하자 중국인들, 혹은 잘 아는 연변 동포 중심으로 찍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연변 동포는 어린 소녀 송홍련 한명이고 중국인도 쉬첸밍뿐입니다. 짧은 시간에 아시아 전역의 이주 노동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수많은 국적의 아시아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장률_지금 한국의 서울, 경기도를 가보면 각 나라 사람이 다 있어요. 막 섞여서. 항상 보면 궁금해요. 타이 사람이 나올까 하면 방글라데시 사람 오고. 그게 한 풍경이 돼버렸어요. 누구누구를 가를 수가 없어요. 그 속에서 그들끼리 감정의 연대가 있는 것 같아요. 한 풍경에 모인 사람들끼리는. 그중 가끔 한국 사람들이 지나가면 오히려 감정의 연대가 없어 보여요. 이들이 또 서울 다른 거리에 흩어지면 보이지 않고,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는 게 인상적이더라고요.

정성일_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를 관찰의 기록이라고 얘기합니다만 방법론에서 <풍경>에는 관찰의 기록이 없습니다. 이 영화는 인상의 기록, 종종 화면이 텅 비어 있기도 하고 카메라가 멈춰 있으면서 인물이 카메라 앞으로 떠난 이후에도 멈춰 서 빈 대상, 사람이 없는 화면에서 장소를 바라보기도 하고, 다큐에선 대부분 그런 방법을 잘 쓰지 않죠. 저에게 <풍경>이란 영화는 서울, 좀더 확장해서 한국에 대한 감독 장률의 인상의 기록이란 생각이 있어요. 이 영화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장률_뭐가 필요했을까요? (웃음) 그런 성격적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누구 한 사람 한 사람을 또렷하게 보고 그 사람을 분석하고 생각하고, 근시인 사람이 안경을 쓰고 똑똑히 보면 좀 피곤하고 단조롭고 짜증도 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경을 벗고 보면 훨씬 뭔가 통하는 것 같아요.

“이 아저씨는 말하는 풍경이다”

정성일_꿈 이야기를 듣는데 누군가는 어눌하지만 한국말로 하고 누군가는 영어로 얘길 합니다. 중국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친구만 자국어로 말합니다. 의외라고 생각한 것은 꿈이라는 내밀한 이야기를 남의 나라 언어로 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꿈과 언어는 서로 매우 밀접하지 않습니까?

장률_이 영화를 만드는 기본의 감정의 수요랄까. 여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소통하는지를 크게 생각했습니다. 인터뷰할 때에는 한국말 잘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못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둘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두개 다 했어요. 그런데 번역을 해보니 역시 한국말로 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그때 표정이 더 재미있어요. 자기 꿈을 다른 나라 말로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제일 기억나는 걸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 사람들에게 말하는 거잖습니까.

정성일_질문이 좀 이상하긴 한데(웃음) <풍경>에는 인서트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만 서울 풍경을 보면서 이상하게 베이징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이 영화는 그런 풍경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순간순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풍경>은 서로 이어진 <중경>과 <이리>를 거쳐 <두만강>에서 <경주>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영화라는 느낌이랄까요, 서울 안의 베이징이랄까….

장률_(잠시 생각) 고의적인 건 아닌데 꼭 자기 성장 과정, 자기가 익숙한 공간, 자기도 모르게 그런 동질감 있는 장소에 다가가는 것 같아요. 그게 다큐 찍을 땐 더해지는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그 공간에 내 감정이 들어갈 수 있고, 변해요.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자리에도 습관적으로 구석에 앉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고, 중간에 앉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고, 거기서 그 사람만 맡는 어떤 냄새처럼 말이에요.

정성일_대림동의 평화 사진관 시퀀스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유일하게 사진관 아저씨가 송홍련이라는 연변 소녀를 인터뷰하는 역할을 대신하고 있어요. 그래서 둘 사이의 대화로 진행됩니다. <풍경>은 사람마다 인터뷰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른데 이 소녀에게 다가갈 때에 그렇게 다가가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장률_이 사진관은 원래 찍을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런데 그곳의 거리들, 풍경들, 간판, 사진관이 인상적이었어요. 요즘 한국 사람들은 사진관에 가지 않아요. 그런데 그쪽(연변)에서는 꽤 많이 가요. 증명사진도 있고, 가족사진도 있고. 아직 사진관은 가족과 연계되는 공간이에요. 그게 따뜻하게 보였어요. 그래서 사장과 얘기했죠. 카메라를 가만히 두고 하루만 찍을 수 있겠느냐. 대화하는 건 그 사장님이 평소에 그래요. 친절하고 외로운 사람 같아요. 오는 사람마다 다 인터뷰를 해요. 그런 다음 꼭 한번씩 마지막에 하나님 믿으십시오 하고. (웃음) 그게 좀 재밌었어요. 이건 말하는 풍경이다, 하고 찍었지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섭외를 한 건데 소녀는 우연히 만났어요. 들어와서 이야기할 때 나랑 같은 연변 사람이고 너무 재미있어서 나갈 때 쫓아나가서 ‘너 인상 깊은 꿈이 뭐냐’라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나가는 순간 다른 다큐가 되었겠지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설득한 거죠. 그냥 거기 넣어놓은 상태에서 아저씨와 대화하고 나는 거기서 멈춰야 했어요.

정성일_<풍경>은 카메라가 서면 움직이지 않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동선을 통제할 수 있는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는 카메라가 서게 되면 현장에서 예상치 않은 선물들이 때로 있지 않습니까. 그걸 다 포기하겠다는 결단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장률_제목과 관계됩니다. 풍경. 현실의 그 사람들, 그 공간의 풍경들, 그 사람들 꿈속의 풍경, 그걸 연계하고 거기에 초점을 뒀는데 풍경이라는 단어로 말할 때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다 사진처럼 생각해요. 어떤 풍경 생각 나, 하면 움직이는 게 생각나는 게 없어요. 다 사진이에요. 공간 안에 사람이 움직이지 공간이 움직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진이라 하면, 풍경이라 하면, 틀 안에 있는 건데 움직이지 않고 보면 이 사람들로부터 어떤 리듬이 나올까. 또 하나는 마지막 장면에 카메라가 흔들리지 않았습니까. 원칙을 세워놓았습니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지만 실제 내 마음과 그 사람들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니까요. 풍경이란 단어에서 풍(風)이 뭐예요, 바람은 움직이지 않습니까. 바람의 경로. 그래도 사진처럼 생각이 나고, 어느 날은 흔들리고, 약간 흔들리든지 폭풍처럼 경(景)이 움직일 때도 있는 거죠.

감정의 연대

정성일_<풍경>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와리우라 브후아이야의 얘기를 들은 뒤 영화는 갑자기 제주도로 가는 겁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사실 이런 다큐멘터리는 없죠. (웃음)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 꿈에서 어떤 소망을 이야기하는데 왜 와리우라의 꿈을 이뤄주고 싶었는지, 이 사람의 어떤 것에 이끌린 건가요. 두 번째 질문은, 남의 꿈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어떤 행동으로 다가오는 것인지요?

장률_와리우라의 얘길 카메라에 대고 들은 다음에 감동이 있었고 특히 한국말로 하는 게 재밌었어요. 그 친구는 제주도가 한국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라요. 그런 제주도가 그의 꿈에 나타났다, 너무 신기한 일이지 않습니까. 보통 꿈에 나타났다면 이전에 봤던 공간, 아니면 전혀 모르는 공간일 텐데 여긴 명확히 제주도라는 이름까지 나오고. 그 친구가 그 얘기만 하지 않았어도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제주도에 꼭 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 친구를 충동적으로 제주도에 데려가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제주도를 너무 아름답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갑자기 나도 그 풍경이 보고 싶어지는 거죠.

정성일_그전에 제주도에 안 가보셨나요?

장률_아니, 가봤죠. 그런데 나는 회에 집중했지. (웃음) 다른 친구들 꿈 얘기하는 덴 갈 수가 없어요. 그들의 가족을 불러올 수도 없고, 내가 그 나라에 갈 수도 없고. 그런데 제주도가 좀 다른 건 그 사람 꿈에 들어간다기보다 이 사람의 꿈속 풍경과 진짜 제주도의 풍경이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분위기인가, 그래서 너무 가보고 싶어지는 거예요.

정성일_제주도에서 마지막 장면을 본 다음 제주도 사진으로 서울로 돌아오는데 그 사진이 걸린 집은 앞에서 말한 와리우라의 집이 아니라 네팔 여자 강가 바스넷의 방입니다. 제주도를 사이에 놓고 전혀 관계없는 두 사람을 텔레파시처럼 묶은 거죠. 꿈의 논리 같기도 하고, 비선형적인 진행이기도 하고, 무엇으로 이 연결이 성립된다고 생각했습니까?

장률_강가는 아파서 밖에 못 나가요. 거기는 요양원 같은 데입니다. 요즘 한국 사람들, 특히 세련된 서울 사람들은 집에다 풍경을 아주 튀게 붙여놓지 않아요. 그런데 이들은 풍경을 노출되는 곳에다 붙여놓아요. 특히 강가는 나가지 못하고 집에 있는데 풍경을 바라보면서, 우리와 인터뷰하는 데도 멍하니 앉아 있으면 눈이 그 풍경에 가 있어요. 이건 뭘까.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간에 대한 감정이 우리보다 훨씬 그립고 강렬하지 않겠습니까?

정성일_<풍경>에는 가끔 다큐를 버리고 극영화의 태도를 취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전철에 두 사내가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전철이 지나가니 두 사내가 없어졌습니다. 그 전철은 역에 서지 않았으니 탔을 리가 없습니다. 연출자가 명백히 기차가 지나갈 때 빠져나가라고 연기 지도를 한 것이겠지요. 다큐 안에 연출이 개입한 셈인데요. 여기엔 마치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듯한 느낌마저 있습니다.

장률_감정이 그랬어요. 외국인 노동자들을 전철에서 보지만 실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인데 다들 별 관심이 없어요. 보고 지나가는데 어느 때에 이 사람들이 없어졌는지 아무런 관심도 안 보이는 이런 감정. 그래서 심지어 그런 생각도 했어요. 이게 다큐인가? 다큐가 아니어도 좋다. 극영화인가? 극영화가 아니어도 좋다. 연출이 없는 다큐는 없죠. 그렇다면 열어놓고 해보자. 다 진짜로 찍긴 하는데 다 연출이에요. 최소한 그것보단 내가 정직하지 않았나, 노골적으로. (웃음)

정성일_거의 멈춰 서 있던 카메라가 방글라데시 남자 세크할 마문을 찍다 말고 갑자기 핸드헬드로 달려가서 어떤 사진을 봅니다. 별다른 설명도 없기 때문에 왜 거기에 방점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태연하게 원래의 자리로 카메라가 돌아옵니다. 뭐랄까, 여기에는 어떤 리듬의 절단 같은 것이 있습니다.

장률_이 안의 내 원칙이라 하면, 그것 역시 다큐와는 관계없는 나의 상상? 이 사람들의 공간에 가면 이전에 자기가 머물렀던 장소의 사진을 붙여놓을 때가 있어요. 그 사진은 (세크할이 예전에 일했던) 마석가구단지를 찍은 겁니다. (지금 자신의 공방을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공간은 홍대예요. 꿈속에서 (나쁜) 사장, (불친절했던) 한국 동료와 싸우고 그때 일했던 그쪽의 풍경이에요.

정성일_나쁜 기억을 가진 그 사진은 뭐하러 붙여놓은 겁니까?

장률_그러니까요. 분석하다보면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쁜 기억이 있고 자꾸 그때 나쁜 꿈을 꾸면서 (세크할 마문은 이 시절 꿈 이야기를 한다) 거기 사진을 붙여놓은 거예요. 이 공간에 들어오면 나는 그 사람이 사진부터 갈 것 같아요. 그 공간은 그 사람이 주인이에요. 그 사람이 그 사진을 거기 걸어놨다는 건 사진에 그 사람의 감정이 어느 정도 들어갔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영화 안에서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생겨날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설명을 안 하고 사진만 보여준 거지요. 그게 기본 리듬과 맞다고 생각한 거지요.

정성일_이 장면에서 재밌는 건 인터뷰를 하다가 갑자기 코끼리가 나오는 신으로 연결됩니다. 너무 막연히 보여줘서 세크할 마문이라는 방글라데시 남자가 코끼리로 환생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이 남자에게서 코끼리의 인상을 본 것을 보여준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런 다음에 공방 유리에 있는 코끼리의 무늬를 보자 이 장면을 이해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풍경>은 종종 연상 작용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이전까지의 장률 영화가 산문적이라면 <풍경>을 시적 논리의 방법으로 붙여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장률_거기 가서 실제 사람만 찍자면 다큐는 사람만 집중하면 됩니다. 그 감정을 정확하게 빨리, 풍부하게 잡아내는 거잖습니까. 나의 목적은 그 사람 꿈속의 얘길 듣거나 그 사람이 사는 공간, 활동 공간, 스쳐 지나가는 공간의 풍경들이 이 사람과 무슨 관계일까 보는 거예요. 나는 공간의 지배를 많이 받는 것 같아요. 거기서 나에게 어떤 감정이 흐르고, 그 사람을 쫓아갈 때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사람 냄새가 더 나고, 어떨 때엔 더 진실 같아요. 사람이 떠나면 그 사람이 살고 행동했던 공간에 흔적이 남습니다. 공간에 어떤 사진을 걸어놓는가, 꼭 그 사람의 감정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 친구는 방글라데시 친구인데 방글라데시에선 코끼리가 거의 신이지 않습니까. 카메라도 유리 이쪽에서 (건너편의 세크할을) 찍었습니다. (고향을 떠나기) 15년 전의 그 사람이 옛날 (자기가 있던) 나라에선 코끼리를 마주치고 타고 그랬을 텐데, 이상하게 코끼리도 이 사람을 그리워했을 것 같아요. 그 공간에 모든 감정이 들었던 물건이라든지, 동물이든지, 무엇이든지 거꾸로 사람이 보는 게 아니라 이 친구를 그리워하는 거죠.

정성일_영화가 한참 진행되다 말고 중국인 쉬첸밍을 만나고 난 다음 갑자기 다시 한번 안개 낀 길을 하염없이 차를 타고 달려갑니다. 그때 이 영화의 제목 <풍경>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풍경의 불투명성에 대해서 <풍경>은 한국에 대한 장률의 마음속의 풍경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률_나는 지금 한국에서 일년 반 살았지만 (한참 생각) 뭐가 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첫 장면은 인천공항에서 들어오는 길이고, 두 번째 장면은 제주도입니다. 귀신 같은 게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건 거의 꿈속의 안개 같은 보일 듯 말 듯한 느낌. 이 영화에 계속 그 사람의 꿈이 있고, 나의 백일몽 같은 순간도 많았습니다.

하늘, 거기에 따뜻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정성일_중국인 쉬첸밍을 도축장에서 끔찍하게 보여준 다음 등장하는 우즈베키스탄의 셰르조드 아크바로브는 이주 노동자라기보다 예술가처럼 보였습니다. 이 사람은 명백하게 존경심을 안고 노동을 바라본다는 그런 느낌이 거기 있었습니다.

장률_처음엔 인터뷰 섭외가 되지 않았어요. 그 친구는 한국말을 못해요. 그래서 거기엔 가서 그냥 풍경을 찍자, 하고 갔어요. 그 공장은 소리가 인상 깊었어요. 조용해요. 기계 소리만 나고. 말리는 소리, 그런 소리들로 꽉 찼어요. 거기서 그 두 친구, 외국인 노동자가 일하는 데에 너무 집중해 있는 거예요. 그 모습이 예술가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그들이 만드는 천은 우리 일상에 꼭 쓰이는 물건이잖습니까. 거기에 아름다운 컬러와 문양을 내려고 모든 노력을 쏟는, 예술이 뭐 다른 것이겠습니까. 물어보니 한국말을 못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현장에서 (<하나안>을 연출한 우즈베키스탄 거주 동포 3세인) 박루슬란 감독에게 부탁해서 전화로 통역도 하고 한 거예요. 그때 꿈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웠어요. 마장동 도축장 장면을 정화할 그런 꿈이 필요했는데 여기서 많이 해소한 거지요.

정성일_두 번째 비닐하우스 장면에는 이상할 정도로 온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세상이 추운 겨울인데 생명을 갖고 견디는 작물들이 봄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뭐랄까,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어떤 응원의 마음을 본 것 같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감독님 영화에서 이런 순간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말하자면 장률 영화의 내면의 풍경의 변화랄까….

장률_어제 도쿄에서 열린 중국 독립영화제에서 <당시>를 상영하고 관객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 영화는 실제 내 삶과 가장 가까운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갇혀 있다 보면 더 나가고 싶고 더 소통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나가는 건 아주 힘든 과정이에요. 물론 계속 의심하죠. 진짜인가, 거짓말인가. 하지만 <풍경>은 진짜 사는 사람들에게 내가 다가갔는데 그 따뜻함을 의심할 수 없었어요. 의심하면 내가 진짜 나쁜 놈이죠. 비닐하우스를 찍을 때 바람이 불고 비닐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다가 그 안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것도 과정인 것 같아요. 안개와 마찬가지로 보일 듯 말 듯한. 그래도 들어가야 하잖습니까. 그래서 들어가면 푸른색이지 않습니까. 농업이란 고향입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그걸 이주 노동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잘 들어보면 거기서 일하는 베트남 사람들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오직 거기서만 일을 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정성일_고물들이 쌓인 폐차장을 보여주고, 그러면 이 영화에 한번도 없었던 페이드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런 다음 갑자기 카메라가 거리를 뛰어다니다가 골목에서 멈춰 서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풍경>은 끝나버립니다. 누가 봐도 장률의 꿈이죠. 계속 꿈 얘길 듣다가 마지막에 장률 감독님의 꿈이라는 인상. 장률 감독님의 꿈이자 서울에 대한 인상, 여기서는 오갈 데 없는 나쁜 꿈이란 느낌이 있습니다.

장률_타향에서 사는 사람들은 고향에서 살 때보다 안정감이 훨씬 적어요. 그리고 훨씬 더 긴장해요. 여기 사는 사람들은 하나의 사건엔 긴장할 수 있어요. 하지만 타향 사람은 전체에 불안감이 있어요. 그 사람들 꿈속에도 아름다운 게 있는데 전체의 질감을 보면 어딘지 불안해요. 그걸 계속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 나도 마찬가지고, 다시 꿈을 꾼다면 고향에 있을 때 꿈과는 전혀 달라요. 어딘지 흔들려요. 고향에서 꾸는 꿈은 큰 분위기에선 흔들리지 않는데 그게 이방인으로서의 동질감인 것 같아요. 이건 어쩔 수가 없어요. 내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가. 그 안에 코끼리로도 끝날 수 있고, 아름답게도 끝날 수 있지만 아닌 것 같아요. 이상하게 뛰다 멈추지 않습니까. 그 숨소리. 불안감을 좋아할 사람은 없어요. 다 멈춰서 평온한 걸 원하는 게 사람인데 마지막인데도 숨가쁜 소리가 들리고 하늘을 보아요. 솔직히 말해서 이방인들과 우리가 이런 공간에서 살 적에 하늘, 그 선 아래 평등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대신 그 안에서 조금 거리를 조성하면 따뜻해질 수 있겠죠. 외국인 노동자들 보면 고개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일할 때도 고개를 숙이고, 사람이 불안하면 머리를 숙이게 돼요. 하늘과 점점 멀어지는 거죠. 내 영화 중에 하늘을 보여준 건 그래도 여기에 따뜻함이 좀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 거는 것입니다. 하늘 비춰주면서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가 약간 납니다. 어떤 가능성? 항상 고향 가고 싶잖습니까.

정성일_다음 영화 <경주>는 촬영을 다 마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요?

장률_<경주>는 <풍경>이 완전히 끝나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내 처지가 지금 방학에만 찍을 수 있어서 투자가 몹시 힘들었어요. 경주를 처음 간 건 1995년이었는데 그다음 <두만강> 끝나고 여름에 한번 더 경주에 갔어요. 거기서 찻집을 갔는데 그때 같이 간 두 사람이 모두 고인이 되었어요. 장례식에서 그 공간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어찌보면 <경주>는 그 찻집에 대한 다큐일 수도 있겠군요. (웃음)

정성일_마지막 질문입니다. <경주> 촬영을 다 마쳤으니 <풍경>은 <두만강>과 <경주> 사이에 낀 영화가 된 셈입니다. <풍경>은 두 영화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요?

장률_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두만강에서 경주까진 꽤 멀지 않습니까?

정성일_세상에서 제일 멀죠. 북한에서 남한까지 와야 하니까요.

장률_그 거리에 펼쳐지는 풍경? (웃음) 제가 영화의 한계를 느끼면서 한 3년을 영화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단절된 것을 다시 이으려면 다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풍경>은 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같은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성일_이번에는 많이 기다리지 않아서 좋습니다. <경주>를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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