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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경] 그녀의 스무살
윤혜지 사진 최성열 2014-01-20

<수상한 그녀> 심은경

노인의 영혼을 품은 소녀? 실제의 심은경이 그랬다. 어릴 때 그대로의 무구한 모습도 여전한데 이따금씩은 갓 스물을 넘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성숙한 대답을 내놓았다. <헨젤과 그레텔>의 똘망똘망한 소녀가 언제 이렇게 커버렸을까. 아역배우의 이미지를 떨치기 위해 심은경은 과감한 성인배우의 역할에 도전하는 대신 3년간의 유학을 선택했다. 두편의 흥행작 <써니>와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의 출연으로 시나리오가 쏟아졌던 시기임에도 심은경은 미련 없이 유학길에 올랐다. “더 큰 배우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냉정하게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연기에 대한 갈망”과 “시나리오들의 유혹”을 떨치고 심은경은 무사히 유학을 마쳤다. 복귀작이 황동혁 감독의 <수상한 그녀>다. 심은경이 성인이 된 뒤 처음 찍는 작품이거니와 성인 역으로 처음 출연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나름의 의지가 작용했으리라 짐작하며 오랜만에 찾은 촬영현장은 어땠냐고 물었다. 올해로 배우 경력 10년차에 접어든 심은경의 성장과 변화, 야심에 대해서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심은경의 현장

스무살 나이로 연기한 모성 “당연한 소리지만 내 엄마를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매니지먼트와 스타일링을 전담해줬기 때문에 엄마와의 관계는 내게 무척 소중하다.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할 땐 실제로 엄마가 내게 해준 것들을 떠올렸다. <수상한 그녀>의 시나리오도 엄마의 적극적인 권유로 선택했다. 원래는 유학하면서 오랫동안 연기를 쉬었으니까 내가 이끌어가는 역할보다 좋은 작품에 조연으로 먼저 출연해 차근차근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잠시 한국에 들어와 제작사와 미팅을 했는데 좋은 분들이셔서 믿고 출연하기로 마음먹었다.”

겉모습은 20대 오두리, 속은 70대 오말순 “나문희 선생님의 습관을 참고했다. 선생님이 먼저 촬영하신 부분을 모니터링하면서 감독님과 많이 상의했다. 선생님이 ‘아이고~’ 하는 추임새를 대사에 자주 섞어 쓰신다. 선생님만의 사투리 말씨도 있다. 완벽한 전라도 사투리가 아닌, 서울 말씨와 살짝 섞인 사투리다. 감독님도 완벽한 사투리를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할머니 같은 말투를 의도한 거라고 하셨다. 처음엔 서울 말씨와 섞인 사투리를 쓰는 게 더 힘들었다. 내가 <써니>를 해서 그런지 너무 전라도 토박이처럼 말한다더라. (웃음) 동일인으로 보이기에 말투만 가지고는 부족할 것 같아 걸음걸이도 따라해보려 했다.”

풀어진 연기 “<광해>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다. 영화는 참 좋았는데 그 안의 내 연기는 스스로 만족이 안 됐다. 사월이의 감정을 다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았다. 유학 중에 미국에서 개봉했기에 두번 봤는데 그날 잠을 못 잤다. 잠이 안 와서 타임스스퀘어를 빙빙 돌았다. <써니>는 강형철 감독님의 생각이 뚜렷한 영화였다. 감독님의 철저한 디렉팅이 있었고, 원하시는 연출에 딱 맞게 연기했다. 촬영 들어가기 며칠 전에 언니들이랑 모여서 대본 연습도 하고 치밀하고 계산적으로 준비해서 찍었다. <수상한 그녀> 할 땐 황동혁 감독님이 내게 많은 부분을 맡겨주셨다.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아이디어나 액션도 많이 활용했다. 너무 풀어주시는 게 아닌가 불안하고 걱정도 됐다. 감독님에게 ‘저 잘했어요? 괜찮아요?’ 물어보면 ‘괜찮은데 뭘 자꾸 물어. 귀찮게 좀 하지 마’ 이러셨다. 그럼 난 또 ‘제가 귀찮냐고, 너무하신다’ 그랬고. (웃음) 배우를 믿고 맡겨주신 거다. 스스로 캐릭터를 살려볼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

심은경의 변화

아역의 설움 “연기를 처음 시작할 무렵엔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다. 촬영을 하는데 나 때문에 NG가 많이 나니까 촬영감독님이 어디서 저렇게 연기 못하는 애를 데려왔냐고 화를 내셨다. 아직도 제일 서러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스케줄 표에 내가 먼저 촬영한다고 적혀있는데 다른 분 촬영이 앞으로 가게 될 때도 종종 있었다. 그것도 다 몰아서 해주시더라. 아이들이야말로 가장 보살핌받아야 하지 않나. 얼른 끝내주고 아이들은 들어가서 쉬게 해줘야 하는데. 난 절대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항상 겸손하고 밑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돼야지 생각했다. 그래도 요즘 아역들은 대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다행이다.”

3년간의 미국 유학 “유학하기 전엔 스스로를 잘 몰랐다. 다른 친구들이 사춘기를 겪고 방황하면서 클 때 난 그러지 못했다. 유학을 가서 혼자 놓이니 스스로에 대해 뼈저리게 깨닫게 됐다. 동양인으로서 무시도 당하고, 혼란도 많이 겪었다. 남들 공부할 때 난 연기하느라 영어 실력도 많이 뒤처졌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많은 일들이 날 약하게 만들었고, 상처들과 힘듦이 날 무참히 짓누른다고만 생각했다. 어쨌든 무사히 졸업을 하고 한국에 와 되돌아보니 한층 내가 성숙해졌다는 걸 알았다. 내가 그 시간들을 딛고 일어서려 하고 있더라. 후회되는 일들은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밑거름으로 둬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연애 “<써니> 때 한 인터뷰에선 아직 사랑에 관심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이성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제일 관심없는 것 중 하나다.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취미가 다양해서 심심할 틈이 없다. 그래도 촬영할 때 사랑의 감정을 연기하면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내가 어떻게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할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웃음)”

외모 “예전엔 배우가 연기 하나만 잘하면 되지, 생각했는데 나름 융통성이 생겼다. 이젠 외모에도 조금 신경을 쓴다.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가 와도 내가 준비가 안 돼 있다면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외모를 예쁘게 가꾼다기보단 대중 앞에 날 드러내기에 거리낌 없을 정도로만, ‘쟤가 꾸준히 배우로서 자기 관리를 하고 있구나’ 하는 선에서 신경 쓰고 있다.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이십대 여자배우 중 한명으로 각인됐으면 한다.”

심은경의 야심

성인배우로의 발돋움 “내 나이에 맞게 천천히 가보려 한다. 다만 내가 더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것만 관객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남들이 다 밟는 절차는 밟고 싶지 않다. 나만 갖고 있는 색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달라졌다는 걸 도드라지게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전 저의 길을 가겠습니다’라는 주의다.”

대학 “대학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단지 대학이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 많이 고민하고 있다. 어른들은 내 나이가 아니면 못하는 게 있는 거라면서 캠퍼스 경험도 만끽하고, 또래 친구도 많이 사귀라고 조언하신다. 대학을 안 간다면 그 4년 동안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많은 언어도 배우고 견문을 쌓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이 더 나에게 좋은 것인지 깊이 생각 중이다.”

차기작 “당장 정해진 작품은 아직 없다. 나에겐 지금이 무척 중요한 시기니까 조급해하지 않으려 한다. 관객으로서의 나는 마이너한 취향을 가졌지만 내 주관대로 작품을 선택하다보면 얼마 못 갈 거다. (웃음) 배우로서의 나는 이것도 저것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더 지나면 지금보다 더 많은 작품들이 내 뒤에 밀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땐 연기에 미쳐 살고 있을 것 같다.”

감독이라는 꿈 “열네살 때부터 시나리오를 썼다. 최근엔 좀 두려웠다.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섰다. 주변 어른들이 격려를 해주셨다. 만들어질지 아닐지는 나중에 생각하라고, 누구도 의식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일단 다 해보라고 말씀해주셨다. 조금 용기를 얻고 요즘엔 그 꿈에 활기를 불어넣어볼까 생각 중이다. 자신은 없지만 마침 시나리오로 각색해보고 싶은 책도 있다. 조만간은 아니겠지만 마음을 딱 굳히고 작업을 시작하면 언젠가 배우로서가 아닌, 감독으로서 관객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표지사진을 촬영하던 날, 심은경은 의상을 차려입고 헤어세팅까지 완벽하게 마친 뒤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기자가 심은경에게 바닥에 누워줄 것을 요구했다. 스튜디오가 제집 안방이라도 된 듯 심은경은 스스럼없이 그 자리에 털썩 누웠다. 매니저들은 조심성 없는 심은경의 행동에 당황해했고, 꾸밈을 도운 스탭들은 기껏 말아준 머리가 망가지면 어쩌나 웅성거리며 말려올라간 치맛단을 정리해주기 바빴다.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도 입었겠다 조금은 여우같이 굴어도 괜찮았을 텐데.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인터뷰 자리로 들어왔을 때도 자연스레 ‘쩍벌’ 자세로 앉는 걸 보면, 애초에 심은경에게 ‘예쁜 척’은 무리였던 것 같다. 반쯤 농담으로 너무 연기파의 길만 걷는 건 아니냐고 물었다. 스물한살 아가씨에게 기대할 만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쁘단 말은 다 부질없다. 어떤 모습으로 나오든 연기 잘한다는 말이 훨씬 좋게 들린다.” 이제 막 열어젖힌 심은경의 2막을 궁금해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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