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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오! 마돈나] 태양은 가득히

소피아 로렌 Sophia Loren

<아라베스크>

<주말의 명화>를 기억하는 세대로서 소피아 로렌을 처음 본 것은 TV를 통해서였다. 무슨 대단한 작품이 아니라, <돌고래 위의 소년>(1957)이라는 할리우드 대중영화였다. 웨스턴의 총잡이로 유명한 앨런 래드와 공연한 것인데, 로렌은 그리스의 해녀로 나온다. 그리스의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이 그림처럼 제시된 도입부에 이어, 입으나마나 한 옷을 입은 로렌이 젖은 몸매를 거의 드러낸 채 배 위로 올라오는 장면부터 TV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물에서 등장하는 비너스의 이미지는 회화와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소재인데, 나에겐 다른 어떤 비너스보다 로렌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건 포르노그래피를 처음 보는 소년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와 같은 흥분일 터다. ‘관능적’이라는 언어의 시각적 현시는 그 때 처음 경험한 것 같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발견

그런데 이런 성적 흥분은 나만 경험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디 앨런이 <우디 앨런의 애니씽 엘스>(2003)에서 말하길, 마술을 통해 소피아 로렌과 마릴린 먼로와 함께 ‘스리섬’을 했는데, 한 장면에 두 배우가 동시에 등장한 것은 그게 최초였다고 허세를 떤다. 또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2002)에는 성적 탐닉이 심했던 정신병 경력자가 나오는데,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소피아 로렌에게서 음탕한 편지를 받았다고 으스댄다. 말하자면 남자들의 성적 환상 속 주인공으로, 소피아 로렌은 마릴린 먼로와 더불어 최고의 자리에 초대받는 것이다.

실제로 로렌은 성적 매력을 과시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출세작인 비토리오 데 시카의 <나폴리의 황금>(1954)을 통해서다. 로렌은 피자집 아내로 나오는데, 당시 20살이 채 되지 않았지만 남편 몰래 다른 남자들과 대낮에 사랑을 즐기는 바람둥이 여성 역을 능숙하게 해낸다. 큰 가슴을 반쯤 드러낸 블라우스와 꽉 끼는 치마를 입은 로렌이 나폴리 거리를 활보할 때, 모든 남자들이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는데, 그건 전세계 관객의 시선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은 도발적인 육체의 로렌은 보카치오의 여성들처럼 자유분방해 보였다.

1950년 불과 16살 때, 미스 이탈리아의 결선에 오르며, 로렌은 당시 최고급의 제작자였고 훗날 남편이 되는 카를로 폰티의 눈에 띄어 배우로 데뷔한다. 22살 차이가 나는 폰티와는 그때부터 사실상 연인 관계였는데, 어린 로렌은 남편의 지시에 따라 닥치는 대로 영화에 출연했다. 당시의 이름은 소피아 라자로였다. 자칫 육체적인 매력만 착취당할 수도 있던 배우였지만(이탈리아에는 지금도 그런 여신 같은 몸매를 가진 배우가 넘친다), 다행히 데 시카를 만나 영화 경력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즈음 소피아 라자로는 소피아 로렌이 된다.

<나폴리의 황금>은 데 시카가 네오리얼리즘에서 소위 ‘이탈리아식 코미디’(사회비판을 기초로 한 코미디)로 연출 방향을 바꿀 때 발표된 작품이다. 데 시카는 나폴리 출신인 로렌에게서 지중해 여성의 적극성, 즉흥성, 생활력, 유머, 활기 등을 봤고, 그런 캐릭터를 로렌의 페르소나로 각인시켰다. 로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평생의 감독으로 주저 없이 비토리오 데 시카를 꼽는다. <나폴리의 황금>은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그때부터 로렌은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로렌은 겨우 22살 때인 1956년 할리우드로 간다.

할리우드의 전략은 로렌을 미국의 스타들과 콤비로 캐스팅하는 것이었다. 앨런 래드와 공연한 <돌고래 위의 소년>은 로렌의 미국 데뷔작이다. 연이어 캐리 그랜트와 <자존심과 열정>(1957), 앤서니 퍼킨스와 <느릅나무 아래 욕망>(1958), 다시 캐리 그랜트와 <하우스보트>(1958), 그리고 클라크 게이블과 <나폴리에서 시작된 일>(1960) 등 스타 캐스팅의 작품들이 쏟아져나왔다. 돌아보면 그때는 대중적 인기는 누렸지만, 배우로서는 데뷔 때처럼 관능을 착취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할리우드 시절이 ‘배우 로렌’에겐 오히려 위기였고, 게다가 캐리 그랜트와의 염문이 남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로렌은 다시 활동 거점을 이탈리아로 옮겼다. 1960년대 로렌은 할리우드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경력을 이어간다.

나폴리의 가난한 어린 시절

로렌은 미혼모의 큰딸이다. 친부는 딸을 두명이나 두고도, 로렌의 모친과는 결혼하지 않았다. 전쟁이 나자 극심한 가난에 내몰린 친모는 로마 생활을 청산한 뒤, 두딸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사는 나폴리로 피난을 간다. 여기서 모친은 피아노를 가르치며 딸들을 겨우 키운다. 전후 미군들이 군항이 있는 나폴리에 몰려왔을 때, 할머니는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미군들을 주로 상대하는 카페를 열었다. 갓 10살을 넘긴 로렌은 서빙을 하고, 모친은 피아노를 치고, 여동생은 노래를 불렀다. 두딸이 얼마나 예쁜지, 이곳은 미군들 사이에서 금방 소문이 났다. 가족들은 오랜만에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그때 모친은 큰딸 로렌의 남다른 미모에 주목했다. 사실 로렌의 모친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1932년 그레타 가르보를 닮은 여성 콘테스트에서 1등에 뽑혔다. 부상으로 주어진 미국 여행을 임신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뱃속의 아이가 바로 로렌이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로렌은 다시 데 시카와 팀을 이뤄, <두 여인>(1961)에 출연한다. 다분히 자전적인 이 영화는 딸을 키우는 홀어머니(로렌)가 전쟁통에 어린 딸을 지키기 위해 온갖 희생을 다하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로렌은 자신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가 살아냈던 과거를 연기한 것이다. 이 작품으로 로렌은 배우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린다.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아카데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특히 아카데미에서 로렌은 외국어영화의 배우로서는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 때부터 데 시카가 연출하고, 로렌과 마스트로이안니가 콤비로 출연하는 코미디들이 연이어 발표되는데, 이들은 모두 흥행과 비평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1963), <이탈리아식 결혼>(1964) 등이 대표작인데, 이때가 로렌의 연기 경력의 정점이었다. 로렌과 마스트로이안니 콤비는 1977년 에토레 스콜라 감독의 <어느 특별한 날>에서 말 그대로 ‘특별한 연기’를 펼친다. 기존의 인상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이를테면 안토니오니의 사색적인 영화에 로렌이 출연한 것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이 작품은 두 배우 모두에게 후반기 경력의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항상 자신을 ‘이탈리아의 여성’이기보다는 ‘나폴리의 여성’으로 불리길 원했던 로렌은 그 나폴리의 태양과 바다처럼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매력으로 영원히 스크린의 여신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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