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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이게, 다예요? 이게, 다예요.
김혜리 2014-10-30

*<보이후드>의 ‘스포일러후드’입니다.

ⓒsecret cinema 페이스북.

3D, 4DX만 ‘몰입형 영화’(immersive cinema)가 아니다. 영화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장소를 팝업 시네마로 바꾸고 한발 나아가 퍼포먼스 체험까지 더하는 게릴라 상영이 2000년대 후반부터 해외에서 인기다. 심지어 <쇼생크 탈출>을 교도소로 꾸민 폐교에서 재소자용 옷을 입고 관람하기도 한다. 영화제가 한창인 부산 거리를 걷다가 상상했다. 가령 <국제시장>을 국제시장에서, <머니볼>을 사직구장에서,<메트로폴리스>를 옛 제분공장에서, <르 아브르>를 중앙부두에서 상영하면 어떨까? 사진은 2007년 런던 브리지 아래서 진행된 <파라노이드 파크>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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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는 2002년부터 2013년까지 해마다 늦여름 즈음 텍사스주에 사는 소년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와 가족들을 방문한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동시에 모든 일이 일어난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아빠(에단 호크)와 헤어진 엄마 올리비아(패트리샤 아퀘트)가 학업을 재개해 새로운 경력을 쌓고 두 차례 재혼을 하는 동안, 누나 사만다(로렐라이 링클레이터)와 메이슨은 무사히 성장해 둥지를 떠난다. 선량한 새아버지로서 아이들의 인생에 들어왔던 남자들은 결국 회한을 남긴 채 사라져가고, 생물학적 아버지는 주말이면 찾아와 자식들의 인생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애쓰는 동시에 초년의 기대와는 다른 모양새일망정 본인의 인생도 추슬러간다.

모든 영화는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과 유사한 양상으로 존재한다. 1/48초 길이 이미지와 장면이 찍는 점들 사이의 여백을 관람주체의 서사 본능과 상상력이 메워간다. 그러나 <보이후드>가 유년기의 12년을 그린 방식은 한층 구체적으로 기억의 작동법과 유사하다. 무엇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언제나 변화의 중간점을 잘라내 보여준다. 기념사진을 남길 만한 이벤트, 이력서에 적을 만한 성취, 이혼과 재혼의 의식은 비켜간다. 어린 시절을 돌아볼 때 나의 뇌리에 인화된 사건도 진학이나 부모의 이직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일이 벌어져 왁자지껄한 날의 나는 변두리에서 쭈뼛대는 엑스트라로 기억된다. 아마 주제가 명백히 주어진 날일수록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얹혀가는 경향이 우리에게 내재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머리로 떠올리지 않은 의미들은 그렇게, 쉽게 흩어져간다. 정작 현상되어 남은 추억은 어이없으리만큼 임의적이다. 넘어져서 스타킹에 구멍을 낼까봐 눈을 떼지 못했던 보도블록의 무늬, 피아노 선생님이 싫어 일주일 중 화요일이 제일 비참하다고 친구에게 털어놓았던 하굣길, (꿈인지 생시인지 여태 혼란스럽지만) 아파트 옥상에 누군가가 널어놓은 죽은 동물들의 가죽. <보이후드>는 차례로 찍혔고 플래시백 한번 없이 직진하지만, 영화의 내적 운동은 회상의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나는 <보이후드>의 두 번째 해(토막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이 영화에는 보통의 컷 외에 두드러진 상위 개념의 ‘마디’가 전혀 없다)에 세 식구가 샌안토니오에서 휴스턴으로 이사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링클레이터는 이사 과정 중 떠나는 집의 벽 그림과 문틀에 새겨진 키 재기 눈금 같은 ‘흔적’을 지우는 장면을 선택한다. (남매의 각방과 수영장까지 있다는) 근사한 새집에 들어선 신나는 순간보다 “안녕, 집아. 안녕, 엄마가 못 가지고 가게 한 보물상자야”라고 헌 집에 작별을 고하는 장면이 <보이후드>에서는 중요한 모멘트인 것이다.

기억은 주체를 경유한 삶의 진실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영화를 통해 그것에 끈질기게 접근하려고 한다. “지나치게 표를 내며 진정성을 추구한다”라는 평은 링클레이터 영화에 던져지는 비판 중 하나고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늘날 예술의 품평에서 ‘진정성’(authenticity)은 남용된 나머지 거의 가사(假死) 상태에 이른 단어처럼 들린다. 하지만 <보이후드>까지 본 나는 이 곤란한 단어를 인공호흡시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대체 원래 무슨 뜻이었나? 좀 골치 아프지만 책장을 뒤져보자. 철학자 하이데거는 진정성을, 대략 “자기가 처한 실존적 상황 및 거기 내재된 가능성을 실현시킬 자유를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사르트르도 비슷한데 거칠게 줄이면 “실존적 상황을 명징하고 참되게 인식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비롯되는 책임과 가능성을 가정하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가능성’, ‘자유’, ‘노력하는’ 등의 단어가 눈에 밟힌다. 그러니까 두 철학자에게 진정성은 미래지향적인 프로젝트이지, 고정된 하나의 상태가 아니다. 즉 “나는 진정하다(authentic)”는 선언은 거꾸로 진정하지 않다는 표식이다. 무한하고 고정불변한 삶과 인간의 본질을 가정함으로써 생동하는 실존을 배신하기 때문이다. 나의 관람 체험에 의하면 링클레이터 영화의 포인트는 진정성이라는 슬로건이 아니라 기나긴 수작업으로 거듭 시도하는 진정성 추구의 방법이다. 장기 기획인 ‘비포’ 시리즈와 <보이후드>는 매 순간이 우리가 삶의 끝과 의미를 “모른다는 사실을 철저히 알아가는” 과정이다. 물론 영화라는 특수한 ‘논증’을 통해서. 링클레이터 영화들로 이루어진 마을에서 진정성은 겸양과 멀리 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예술성은 오히려 겸양의 부산물로 보일 지경이다. 자칫하면 가족앨범이나 홈무비 편집본 같은 자아도취로 굴러떨어지기 쉬운 기획인 <보이후드>가 놀랄 만큼 보편적인 영화로 완성된 까닭도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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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일도 영화도 전문성이라곤 없지만, 내가 아는 범위에서 <보이후드>와 인생의 닮은 점 리스트를 계속 적어보기로 한다. 미국 공립 교육 시스템의 12년 과정과 엄마의 재혼 등 내러티브의 큰 굴곡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나, 링클레이터 감독은 매년 촬영분의 시나리오를 임박해서 썼다고 한다. 그해 배우들이 처한 개인적 상태와 공동체적 경험이 반영됐다. 그리하여 <보이후드>는 어제와 오늘 우리의 하루가 그렇듯 불확정적인 희미한 ‘조짐’들로 이뤄지게 되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첫 번째 양부는 밝고 친절하지만 식사 도중 게임하는 아이를 단속하며 잠깐 완고한 통제욕을 내비친다. 이 작은 에피소드는 2년 후 상당히 위협적인 폭력 장면으로 확산된다. 부부가 헤어진다는 결론은 세워두었다고 해도 남자의 결함이 얼마나 어떻게 곪아들어갈지까지 링클레이터는 알지 못했으리라. 장차 나올 시퀀스가 정해져 있는 보통 영화라면 앞선 가족식사 장면은 ‘복선’으로서 달리 찍혔을 것이다. 반면 2008년 시퀀스에서 오바마 후보 캠페인에 남매를 동원하는 아빠의 안간힘이나 <스타워즈> 속편 가능성에 관한 부자간의 대화는, 이후 역사적 결과를 모르는 채 찍었다는 사실을 관객이 인지하고 있기에 더 절묘한 감흥을 낳는다.

홍상수 감독이 줄곧 입증한 대로 <보이후드> 역시 인생을 채우고 있는 조금씩 다른 반복들, 변주된 패턴으로 가득하다. 엄마 올리비아는 비슷한 결점을 가진 남자를 만나 비슷한 관계의 함정에 빠지고, 그녀가 늦깎이 학생으로 심리학 강의를 듣는 광경은 세월이 흘러 그녀가 자리를 바꿔 강단에 서 있는 장면과 짝을 이룬다. 솔메이트라고 굳게 믿었던 고교 동창에게 처음 접근하는 파티에서 주로 떠드는 쪽은 메이슨인 반면, 그녀와 헤어진 후 대학기숙사 입실 첫날 만난 여자 앞에서 청년은 듣기에 집중한다. 이 대구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메이슨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상서로운 예감을 품게 된다. 또한 <보이후드>의 경로는 꺾은선그래프로 축약하기 어렵다. 메이슨과 가족들의 시간은 ‘발단-전개-절정-결말’로 구획되지 않는다. 좋기만 한 시기도 나쁘기만 한 시절도 집어낼 수 없다. 예컨대 첫 번째 양부는 술에 의존하면서 급격히 망가지지만 메이슨과 사만다는 재혼으로 얻은 의붓남매들과 따뜻한 무엇을 공유한다. 엄마가 두 번째 재혼한 퇴역군인 역시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신감을 잃자 권위적 가부장으로 추락해가지만, 그는 메이슨에게 카메라를 선물해 사진의 아름다움을 최초로 발견하게 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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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는 어떻게 <보이후드>로 확정되는 것일까? 엄연히 링클레이터의 영화는 엄마, 아빠, 그리고 메이슨의 누나 사만다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특히 패트리샤 아퀘트가 눈부시게 연기한 올리비아는, 관객이 처한 조건에 따라 메이슨보다 진한 여운을 남길 수도 있는 인물이다. 솔직히, 남매가 슬하를 떠나간 다음 이어질 그녀의 인생을 12년 동안 찍은 영화를 2026년에 보고 싶을 지경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오랜 단짝 편집자 산드라 아데어가 <보이후드>를 ‘소년기’(少年記)로 확정하는 방법은 매우 은근하다. 그들은 티내지 않고 관객을 메이슨의 자리에 데려간다. 이는 보이스 오버 내면 독백이나 시점 숏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우리는 이 조용한 소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메이슨이 1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선명히 알 수 없다(그 점, 소년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메이슨은 천진한 질문을 난사하던 시기를 지나 확 과묵해졌다가 견해와 표현력이 생긴 10대 후반에 다시 말수가 늘어난다. 영화 절반까지 메이슨은 대다수 아이들이 그렇듯 주로 관찰자의 위치에 선다. (더구나 어른들의 사회가 돌아가는 이치에 무지하니 불완전한 관찰자다.) 아이들은 대개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세상사를 어깨너머로 목격하고 문틈으로 듣는다. <보이후드>는 티내지 않고 메이슨이 인지하는 세계에 집중한다. 누나와 창가에 매달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부모의 언쟁, 파티에서 한 남자에게 머물던 엄마의 각별한 눈빛, 무시무시한 사건을 겪고도 금방 까먹고 머리칼이 땀에 절도록 비디오게임에 몰두한 오후. 아, 그러고 보니 각 시퀀스의 연도가 명시되지 않는 <보이후드>에서 유행한 음악과 더불어 탄소연대측정기 역할을 하는 요소는 아이들에게 절실한 지표가 되는 최신 기종의 게임기다. 산드라 아데어의 편집은 프레임 바깥의 무엇인가를 말없이 바라보는 메이슨의 얼굴 숏에서 자주 날숨을 흘려보낸다. 이와 같은 시선의 포지셔닝이 가장 선연히 드러나는 순간은, 차고 바닥에 쓰러진 엄마와 맞은편에서 고함치고 있는 양부를 아이들이 스치듯 목격하는 장면이다. 관객은 곧장 사태를 파악하지만 메이슨은 불길함을 직감할 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소년이 진실을 미처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엄청난 보호본능을 느낀다. 그러다 영화의 시계(視界)는 서서히 넓어진다. 관객이 아는 만큼 모르던 아이가 어느덧 부모 앞에서 몰라도 아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하기 시작할 때 시간의 부피가 가슴에 철렁 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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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단다.”(I just thought there would be more.) 대학 기숙사로 떠날 짐을 싸는 아들을 지켜보다 돌연 울음을 터뜨리는 패트리샤 아퀘트의 한마디는 이변이 없는 한 나에게 ‘올해의 대사’가 될 것 같다. 아빠는 좀더 일찍 깨닫는다. 메이슨의 고교 졸업 축하 파티에 참석한 에단 호크는 재혼에서 얻은 꼬마를 가리켜 “나는 다시 15년을 보내야 이 ‘텅 빔’(emptiness)을 얻겠지?”라고 예측한다. 우리는 고작 ‘텅 빔’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비록 아이는 없지만 나도 언젠가부터 모든 것이 영원한 이동일 뿐임을 짐작하게 됐다. 운전을 하며 가끔 생각한다. 어차피 달라질 게 없는데, 꼭 멈춰야 할까? “정녕 이게 다예요”라고 말하는 <보이후드>는 생김새와 딴판으로 무서운 영화다.

이게 전부이므로, 잠깐 멈춰서 음미하지 않으면, 하이킹을 가서 사방을 둘러보지 않으면, 눈 깜박할 사이에 생은 도주해버린다. <보이후드>에서 올리비아가 가장 비극적인 인물로 보이는 까닭도, 극중 부자(父子)와 달리 그녀는 적어도 우리가 보는 동안 멈추어 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정복할 수 없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에단 호크)가 셀린느(줄리 델피)에게 들려준 W. H. 오든의 시구도 그렇게 말했다. 시집 선반에서 오든을 꺼내 제시가 인용한 <산책을 하던 어느 저녁>(As I Walked out One Evening)을 찾아보았다. 제시가 미처 읊지 않은 끝 연에 <비포 선라이즈>의 미명이, <비포 선셋>의 커튼 사이로 깊숙이 스며들던 늦은 오후 햇살이, <비포 미드나잇>과 <보이후드>의 ‘매직 아워’가 고여 있었다.

“아주 이슥한, 이슥한 저녁/ 사랑한 이들 간데없고/ 시계들 울리길 멈춘 후에도/ 깊은 강은 이어 흐른다.”

(<보이후드> 일기,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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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운처럼 살다 요절한 중국 작가 샤오홍(탕웨이)의 일대기 <황금시대>는 가난한 문인의 허기와 식탐을 반복해 그린다. 평생의 연인 샤오쥔이 그녀를 처음 만난 날 접한 것은, 굶주림 속에 써내려간 휘황한 문장과 아껴둔 굳은 밥덩이다. 이 커플은 돈이 떨어지면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마시고, 수입이 생기면 노동자 식당에서 음식을 하나 더 주문하며 제일 행복해한다. 일본 유학 중 샤오홍은 불 꺼진 방에 고독하게 누워 문득 생각한다. “이것이 내 황금시대일까? 배를 곯진 않으니까.” 먹는 데에 이유가 없듯, 작가의 숙명을 가진 사람에게는 글을 쓰는 이유가 따로 없다. 배가 고프면 책상에 앉아 “나는 배가 고프다”라고 써야만 한다. 다만, 잊을 수 없기에 쓰는 것이며, 그 행위만이 내가 텅 빈 위장 이상의 존재임을 확인시켜주기에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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