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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조심(操心)
글·사진 김혜리 2015-02-26

네덜란드 헤이그의 라우만 박물관에는 유럽 최대 자동차 수입업자이자 자동차 애호가인 라우만가가 2대에 걸쳐 수집한 역사적인 자동차 230여대가 있다. <007 골드핑거>에서 Q가 제임스 본드에게 선사한 오리지널 애스턴 마틴 DB5도 컬렉션의 일부. 차체에 은닉된 비밀병기도 병기지만, 고고하면서도 은은하게 한 단계 숨죽인 광채가 잘난 비밀첩보원과 딱 어울린다. DB5는 <카지노 로얄>(2006)과 <스카이폴>(2012)에도 출연했다. 라우만 박물관에서 깨달은 두 가지. 첫째, 자동차는 사진에 잘 담기 엄청나게 까다로운 피사체다. 둘째, 모든 자동차는 궁극적으로는 타임머신이다.

01/03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노동자 산드라(마리옹 코티야르)의 휴직 사유는 우울증이다. 복직을 앞둔 그녀는 회사가 일인당 1천유로의 보너스와 산드라의 복직 중 하나를 투표로 선택하라고 동료들에게 통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독 다르덴 형제는 왜 하필 육체의 질병이 아닌 우울증을 골랐을까? 부당하게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 노동자의 분투만으로도 충분히 힘 있는 이야기에 괜한 감상성을 보탤 위험까지 무릅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겉으로 드러난 서사의 효용성 면에서 보면 우울증이라는 휴직 사유는, 경계에 걸친 사례(borderline case)를 만든다. 마음의 병은 가시적이지 않기에 과소평가되기 쉬우며 심지어 태도 문제로 오도될 여지도 있다. 산드라가 일을 쉬게 된 원인이 신체의 중병이거나 상해였다면 문제는 법이 정한 복지의 영역으로 넘어갔을 테고 복직 후 업무수행에 끼칠 영향도 상대적으로 자명했을 터다. 다시 말해 회복 이후에는 후유증이 없거나, 계량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병인 우울증은 고용주에게 빌미를 준다. 사쪽은 정신이 연약해진 산드라의 능률이 떨어지리라고 애매하게 암시하면서 동료 노동자들의 판단에 갈등을 얹는다. 그녀가 다하지 못한 몫은 나머지의 부담이 될 텐데 더구나 어차피 한명을 감원할 계획이 있으니 이왕이면 일인분에 모자라는 산드라가 나가는 편이 전체를 위해 합리적이라는 풍문도 슬쩍 흘린다. 그런데 회사의 논리에 스스로도 말려 흔들리는 산드라를 독려하는 남편 마누(파브리지오 론지오네)의 한마디가, 우울증이라는 특정한 핸디캡이 이 영화에서 갖는 의미를 홀연히 일깨운다. “다시 일을 시작하면 눈물도 멈출 거야.” 반대로 일을 빼앗기면 눈물은 그녀의 생활을 삼켜버릴 것이다. 남편의 이 대사는 우울증을 노동력으로서 해고되어 마땅한지 평가받아야 할 고립된 결함이 아니라, 실직하면 악화되고 복직하여 정상적 일상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완화될 일시적인 핸디캡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다르덴 형제는 우울 장애를 다루는 대부분의 영화들과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우울증을 산드라의 캐릭터가 아니라 현재 처한 조건으로 취급한다. 그녀의 연약한 심리상태는, 완벽하지 않은 우리 모두가 끌고 다니는 다양한 문제 중 하나다. 우울증의 원인 설명을 극중에서 아예 배제한 연출은 센티멘털리즘의 침입을 막기 위한 조처인 동시에 원인이 무엇이었건 간에 영화 속 시간인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영화에서 산드라가 겪는 상황에 대한 판단과 무관하다는 입장 표명이다. 요컨대 우울증이 변수로 게재된 특수한 상황이 산드라의 동료 노동자들과 관객에게 묻고 있는 것은 “우울증이 있으니 이윤율을 떨어뜨리는 열등한 인력”이라는 고용주의 효용 중심 관점과 “일할 기회를 돌려줘야 건강한 인력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사람 중심 관점 사이의 선택이다. 한정된 자원 위에 구축된 현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가치를 우위에 두고 운영되는 사회를 원하는가? 당신에게 유의미한 진짜 ‘효율’은 무엇인가?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개인으로서 매일 내려야 하는 결단은 어떤 종류인가? 요컨대 <내일을 위한 시간>의 우울증이라는 모티브는, 딜레마를 또렷이 드러내고 결정적인 질문을 정교하게 던지기 위해 다르덴 형제가 설계한 실험의 조건 통제로 보인다.

01/04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한 때가 중학교 사회 수업 시간이었는지 프랑스 혁명기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읽는 동안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뭐든 사회계약론에 대한 설명의 도입부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내일을 위한 시간>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내가 원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야”라고 강조한다. 심지어 사장도 아시아 업체와의 경쟁 탓에 인건비를 줄이지 않으면 회사가 위태로워 별수 없다고 해명한다. 그 말들은 거짓이 아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이 그리는 오늘의 유럽 사회에서 악덕 사주 대 노조의 대결 구도는 옛이야기가 됐고, 산드라의 동료 중 누구도 “이 양자택일의 프레임은 부당하니 싸우자!”고 나서지 않으며 내 이익이 동료의 이익과 배치되는 현실에 이미 적응해 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음을 모두가 말하는 시대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해친다는 말이 아니라 타인의 삶이 어찌되든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로 변했다. 다시 사회 교과서로 돌아가면 우리는 노동(교과서가 쓴 단어는 ‘직업’이었던 것 같지만)이 경제적 부양 수단일 뿐 아니라, 다른 사회 구성원과의 소통, 공동체에 대한 공헌, 자아실현 등의 기능을 갖는다고 배웠다. 산드라와 동료들의 일터에서는 앞에 나열한 노동의 모든 의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 영화의 결말과 별개로 <내일을 위한 시간>이 돌아보게 하는 우리의 세상은 막다른 골목이다. 살자고 들면 나쁘게 사는 수밖에 없고 아니면 생존이 어렵다니 얼마나 암담한가. 그야말로 ‘죽거나 나쁘거나’다. 다르덴 형제는 이 비좁고 굴욕적인 삶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의 여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고전적 의미의 연대이기는 불가능하다. 계급적 승리이건 정당한 경제적 대가이건 연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바를 약속할 수 없는 세계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산드라가 손에 쥔 한줌의 자유를 갖고 선택한 것은 얼핏 연대처럼 보이지만, 자긍심의 천명이다. 그녀는 동료 노동자의 처지에 감연히 ‘개의’한다. 내 탓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그럼으로써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을 거스른다. 우리는 겨우 이만큼을, 아니 아직도 그만큼은 선택할 수 있다고 다르덴 형제는 말한다. 우리의 삶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의지할 구석과 도움의 가능성을 뜻하는 따뜻한 보루였던 시절은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냉담하고 소극적으로 들릴지언정 이렇게는 여전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연결돼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후자가 낳을 결과가 전자의 그것보다 보잘것없으리라고 미리 낙담할 필요는 없다.

01/06

그런가 하면 <패딩턴>은 얼마나 대책 없이 낙천적인 영화인가? 지진으로 집을 잃고 페루로부터 런던으로 밀항한 불법입국곰 패딩턴(벤 위쇼)은 생면부지 브라운 가족의 식구로 받아들여지고, 소년 시절 2차대전의 포화 속에 영국으로 이주한 헝가리계 아저씨와 좋은 친구가 된다. 외국어 재능이 뛰어난 브라운가의 맏딸은 곰의 언어도 이내 습득한다. 영국독립당(UKIP)이 지난해 주장한 이민 제한 정책 반대편에서 이 틴에이저 곰은 리버럴하고 관용적 국가로 이상화된 영국의 셀프 이미지를 천진난만하게 스크린에 던진 셈이다. 한데 막상 프로듀서 데이비드 헤이만은 이상주의가 아니라 경험주의를 <패딩턴>이 근거한 철학으로 꼽는다. 여덟편의 <해리 포터> 영화와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그래비티>를 기획하고 만든 그는 네 아이의 어머니인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이뤘고 남매들 가운데에는 입양아도 있다고 한다. 영국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헤이만은 “가족은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라는 신념이 자신에겐 매일의 현실이고 <패딩턴>도 그래서 ‘내가 잘 아는 이야기’라고 믿어 주저 없이 만들었다고 말했다. 듣기 편한 인터뷰용 멘트라고 할지라도 트집잡고 싶지 않다.

<빅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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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계획한 도시

<빅 히어로>의 공동감독 돈 홀과 크리스 윌리엄스는 마블의 원작 만화에서 도쿄였던 배경을 샌프란시스코와 교배해 동서양 문화를 융합한 ‘환태평양 신도시’ 샌프란소쿄를 지었다. 그냥 막 섞은 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시로부터 8만3천개의 건물과 가로수, 가로등의 데이터를 받아 반영했다는 풍경에는 금문교와 일본어 네온사인, 빅토리아 양식의 주택과 기와지붕, 시부야를 연상시키는 마천루와 케이블카가 공존한다. 샌프란소쿄는 시각적으로 신통한 합성물 이상으로 보인다. 로봇과 반도체 기술의 발전을 주도해온 두 도시의 합체는, 공학자와 프로그래머들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빅 히어로>에 썩어울리는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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