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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소설 원작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조악하고 불온하지만 논쟁적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성인들의 해리 포터’ , ‘엄마들의 포르노’라 불리며 선풍적인 인기를 끈 E. L. 제임스의 동명 에로티카 소설 3부작 중 1부를 소재로 했다. 구속과 훈육, 지배와 굴복,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의미하는 BDSM을 소재로 하고 있으나 일탈적 성적 관계를 경유해 고전적 사랑의 승리를 지향하는 스토리가 흥행에 한몫을 할 듯하다. 영화는 낭만성에 근거한 전통적 연애관과 금기를 뛰어넘는 성애를 뒤섞은 원작을 비교적 충실히 따른다.

영문학 전공의 여대생 아나(다코타 존슨)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직전이다. 친구를 대신해 나간 인터뷰에서 그녀는 젊은 백만장자 그레이(제이미 도넌)를 만나 그와 기묘한 관계에 빠져든다. 아나는 그의 지배와 훈육에 복종하면서도 내밀하게는 자신의 성적 자율성에 관해 협상하고 타협해가기 시작한다. 성적 금기를 전면에 드러냈지만 영화의 문법은 주체의 성장을 다루는 교양소설의 형식에 가깝다.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그레이 시리즈의 성공을 에로틱 판타지와 여성적 자기계발서의 결합으로 보았다. 하드코어 포르노에 가까우면서 대중에게 익숙한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쓰고 있다는 점은 원작 소설과 영화의 대중적 신드롬의 근거가 됐다. 이를 <제인 에어>의 여주인공이 체험하는 사드의 규방철학 버전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신인 여배우 다코타 존슨은 순수한 열망으로 가득한 여주인공 아나를 자연스럽게 체현해냈다. 아직은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신선한 얼굴과 신체가 앞으로 전개될 성적 모험에서 어떻게 단련될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전형적 인물과 스토리의 비사실성은 이 작품의 관심사가 아니며 성애의 예술적 재현 역시 중요치 않아 보인다. 대중영화가 다룰 수 있는 수위의 성적 관계와 그 세련된 조직이 관건이 될 것이다. 여성감독 샘 테일러 존슨의 결과는 다소 초라하다. 소설이 주는 불온한 상상력이 시각적 재현으로 오히려 빈약해진 인상이다. 음악은 과도하고 대사는 때로 웃음을 유발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매혹과 저항, 고통과 환희가 예견된 관계의 시작에서 성적으로 미숙한 여성은 어떻게 자신의 관능을 계발해나갈 것인가. 단계적으로 쾌락과 고통의 수위를 높여가는 시리즈의 도입에서 영화는 멈춘다. 아직은 불완전한 관능의 입구다. 여전히 그레이의 정체와 성적 모험의 행로는 미스터리인 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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