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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상상 속의 소리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어빙 벌린의 &lt;God Bless America>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친구와의 우정 그리고 배신. 돈과 성공에 대한 열망. 그리고 모든 것을 구원해줄 것 같은 한 아름다운 여성.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장면마다 조롱과 구역질을 동시에 유발하는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를 그토록 좋아하는 걸 보면 확실히 나는 구제불능의 남성주의자인 게 분명하다. 맨 처음 국내에서 개봉했던 1985년 명보극장 상영에서부터 VHS, DVD를 거쳐 연말이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있었던 상영에 이르기까지, 양질의 새 영화들을 제쳐두고 이 영화를 계속 챙겨보는 것은 확실히 건강한 영화감상은 아닐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변명의 여지가 있긴 하다. 1984년 개봉 이후 이 영화에는 수많은 판본들이 지금껏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디렉터스 컷’으로 알려진 지난 2012년 판본에 이어서 최근에는 손실됐던 나머지 5분여의 러닝타임마저 복원됐는데(상영시간 251분) 이쯤 되면 이제 이걸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완결됐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영화가 나온 지 3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럴 때도 되지 않았나.

맨 처음 국내에서 개봉됐을 때는 상영시간이 한 시간 반 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것은 세르지오 레오네도 모르고 세상을 떠난 세계 유일의 한국 수입사 편집본이라고 한다) 그토록 난도질한 판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섹스 신은 그대로 살아 있어서 명보극장에서 내 뒷줄에 앉아 있던 한 관객이 성내며 외치던 소리는 차이나타운 아편굴에 누워 있던 누들스를 소스라치게 했던 전화벨 환청처럼 지금도 내 귀청을 쩡쩡 울리고 있다. “이거 포르노야 뭐야!”

물론 여러 판본 때문에 이 영화를 여러 번 봤다는 것은 속 들여다보이는 변명이다. 줄거리마저 잘 파악되지 않았던 국내 개봉 때부터 최근의 251분 버전까지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언제나 매번 매료됐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확실히, 어쩌면 이 영화의 본질일 수도 있는, 정신적 퇴행의 한 현상일 것이다. 어쩌란 말이냐. 누가 뭐라 그래도 볼 때마다 좋은걸.

여기에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이 단단한 한몫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영화를 보고서 음악이 너무 좋아 당시 국내에 발매된 사운드트랙 LP를 사서 방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영화 장면을 떠올리던 기억이 아직도 내겐 생생하다. 물론 이 영화에서 모리코네의 음악은 영화만큼이나 과잉이었다. ‘너무’ 아름답고 지나치게 많이, 세게 쓰인다. 특히 누들스가 35년 만에 뉴욕의 시외버스터미널을 다시 찾았을 때 오케스트라 연주로 흐르는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는 솔직히 상투적이었다.

이 영화는 빈번히 ‘음향’과 ‘음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친구 ‘애꾸눈’은 모리코네가 작곡한 주제곡들을 극중에서 계속 팬플루트로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하고 있는데, 심지어 그 소리는 영화음악이 되어 화면을 가득 메운다. 노인이 된 누들스가 이장한 옛 친구들의 묘지를 찾아갔을 때 묘지 문이 열리자 실내에서 자동으로 재생되는 ‘애꾸눈’의 팬플루트 소리도 극중의 소리에 멈추지 않고 드라마 밖으로 나와 노스탤지어로 가득 찬 한편의 음악을 이룬다. 누들스와 데보라가 둘만을 위한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그곳의 실내악단이 연주하는 <아마폴라>는 대략 열명도 안 되는 현악주자들의 연주임에도 불구하고 유진 오르먼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마냥 비단결처럼 넘실거린다. 그러니까 이 영화 속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장면은 현실이 아닌 거리낌 없는 남성 판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의 음악은 상상과 회고 속에 존재하는 관념의 음악이다.

모리코네는 이 영화를 위해 뼈대를 이루는 네개의 작품을 작곡했다. 먼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주제곡>(다음부터는 <주제곡>이라고 부르겠다), <데보라의 테마>, <가난>(Poverty), <애꾸눈의 노래>(Cockeye’s Song)다. 앞의 두곡은 비슷한 성격으로 아련한 추억에 빠지게 만드는 아름다운 장조 음악인 반면에 뒤의 두곡은 우울함 혹은 긴장감이 감도는 단조의 음악이다. <데보라의 테마>는 제목 그대로 누들스의 첫사랑 데보라가 등장할 때면 흐르는 음악이다. 하지만 음악은 데보라를 묘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회상이다. 이제 노인이 된 누들스가 어린 시절 데보라의 사진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기는 장면에서 이 곡은 처음 등장한다. <주제곡>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 작품은 매우 치밀하게 쓰임으로써 이 영화의 분위기를 끌고 나간다. 누들스와 맥스를 비롯한 옛 친구들의 우정을 느끼게 하는 장면에서 당김음이 들어간 유쾌한 재즈풍의 음악 <친구>(Friends)가 흐르지만 사실 그 선율 역시 <주제곡>의 변주곡이다.

<주제곡>은 영화에서 독립적으로 쓰이지 않는다. 단조풍의 다른 곡 <가난> 혹은 <애꾸눈의 노래>와 연결되어 쓰인다. <주제곡>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이렇다. ‘사건’이 있은 지 35년이 흐른 후, 이제는 쇠락한 맨해튼의 유대인 마을에서 옛 친구 ‘뚱보 모’는 여전히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단 두 테이블에 외국인 노동자들만이 앉아 있는 식당 안을 거리에 위치한 카메라가 들여다보고 있을 때 쓸쓸한 피아노 선율로 <가난>이 연주된다. 하지만 카메라가 식당 안을 빠져나와 길 건너편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향하고 그 안에서 ‘뚱보 모’에게 전화를 거는 누들스의 모습이 잡히자 음악은 어느새 <주제곡>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단조의 <가난>에서 장조의 <주제곡>으로 바뀔 때, ‘지나간 모든 것은 다 아름답다’는 회상은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는 음악을 통해 고통을 고통 그 자체로 남기지 않는다. 아련한 과거의 일로 그리는 것이다. <가난>에서 <주제곡>으로 넘어가는 모음곡 형태는 영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다.

젊은 시절 누들스가 매일 밤 감옥에서 되새겼던 꼬마 도미니크의 죽음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 패거리들을 손봐주려는 총을 든 ‘벅스’와 마주치자 슬로모션으로 전환된 화면은 경종처럼 울리는 팬플루트 소리의 <애꾸눈의 노래>와 함께 급히 고조된다. 하지만 누들스의 품 안에서 도미니크가 숨을 거둘 때 음악은 다시 <주제곡>으로 전환된다. 이 고통들도 이미 아득히 지나간 옛이야기들인 것이다. 음악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회고의 소리다.

얼마 전 서울아트시네마가 오랫동안 둥지로 있던 낙원상가를 떠나며 이 영화를 다시 한번 상영했는데 그때 놀랐던 것은 새로운 장면이 아니라 그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노래였다. 영화가 시작되고서 아무런 소리없이 등장한 검은 바탕 위의 흰 자막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하는 노래는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였다. 이 곡의 작곡가 어빙 벌린(1888~1981)이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20세기 초에 자유의 여신상을 찾아온 러시아계 유대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제2의 미국 국가(國歌)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등장시키는 것은 그 나라에서 1920년대와 30년대를 살다가 삶의 태반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인생을 정말 기구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노래는 영화의 마지막에 한번 더 등장한다. 맥스의 저택을 나온 누들스가 어두운 길에 서 있을 때 전조등을 켠 자동차 한대가 멀리서 달려온다. 그 자동차와 함께 노랫소리도 점점 커진다. 그 자동차가 누들스 앞을 지나갈 때 차 위에는 금주법 시대의 남녀 한 무리가 술에 취해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 자동차는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 세대가 가버렸다. 이 영화에서 음악이란 상상 속의 소리임을 확인시켜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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