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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무협의 액션과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

<협녀, 칼의 기억> 박흥식 감독

11년 전 <인어공주>(2004) 때부터 박흥식 감독은 무협액션물 <협녀, 칼의 기억>의 기초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0), <인어공주>, <사랑해, 말순씨>(2005) 등 주로 드라마에 주력하던 그가 액션의 세계를 탐닉한다고 할 때 기대 한편으로 그의 낯선 선택에 의구심도 들었다. 무협에 심취하지 않았던 그가, 무협이라는 ‘칼’을 들고 마치 자신의 이전 필모그래피를 잘라내려는 느낌이었던 것. 그렇다면 그에게 지금 ‘무협’이라는 도구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협녀, 칼의 기억>은 고려 무인시대, 한 남자의 배신으로 18년의 세월을 보내고, 그를 향한 복수의 칼을 든 두 여자에 대한 운명적 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풍진삼협으로 함께 의를 나눈 풍천(배수빈), 덕기(이병헌), 설랑(전도연)의 관계가 왕이 되고자 하는 덕기의 배신으로 와해되고, 덕기가 유백으로 이름을 바꾸고 출세를 꿈꾸는 동안 그의 연인이었던 설랑은 월소로 이름을 바꾸고 죽은 풍천의 딸 홍이(김고은)를 거두어, 긴 세월 복수의 칼을 준비한다. 봉인된 시간이 해제되는 순간, 공백기 동안 말하지 못했던 세 남녀의 비극적 관계도 고개를 든다. 박흥식 감독은 그리스 비극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속죄’의 감정을 무협액션영화 속 극대화된 칼의 동작과 함께 촘촘하게 엮어낸다. 차기작 <해어화> 촬영으로 새벽까지 현장에 있다가 <협녀, 칼의 기억> 첫 시사를 위해 달려온 박흥식 감독을 만났다.

-시대극이나 액션물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주력하던 드라마의 세계에서 떠나 무협액션물을 연출한 동기는 무엇인가.

=무협액션이 나와 그렇게 안 어울리나? (웃음) 오십줄에 접어들다보니 영화적인 성장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성장을 하려면 다른 장르에 과감하게 들어가봐야겠다, 늘 관심을 두던 일상적인 드라마 대신 다른 장르를 연구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무협멜로라는 장르 안에서 처절하지만 지독한 사랑 이야기를 구상했다. 협녀가 되고 싶었던 한 여자, 곧 협녀가 될 여자를 그려보자고 했다.

-무협액션이 가진 전형적 장치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과 또 그걸 피해가야 한다는 두 가지 전제 사이에서 고민이 컸을 것 같다.

=대숲, 갈대밭, 나이 많은 여자, 나이 적은 여자. 은둔해서 사는 스승, 복수. 이런 요소들은 무협영화에서 일종의 상징적 아이콘이다. 익숙한 장치다. 그런 것들을 다 빼고 나면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1994)처럼 서사 전개와는 조금 멀어진 색다른 아트무협영화가 나온다. 난 서사 구조 중심의 영화를 만드는 게 주력이다 보니 무협영화의 익숙한 장치는 십분 활용하고 가자고 결정했다. 첫 장면에서 홍이가 해바라기를 훌쩍 뛰어넘어 날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이런 장면이 없다면 무협영화라고 했을까? 중력을 무시하고 해보자, 지금부터 나와 관객이 무협영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표시를 시작부터 하고 들어갔다.

-레퍼런스가 다양하게 존재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한국적인 <와호장룡>(2000)이나 <영웅>(2002)이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영웅>이나 <와호장룡>도 봤고, 호금전의 <협녀>(1969)도 봤다. 홍콩, 중국, 일본의 무협영화 몇 백편을 다 봤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공기는 이런 거구나를 본 거였다. 생각보다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건 없더라. 그래서 본 작품들보다 내가 더 재미있게 만들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웃음) 나는 무협에 심취해 있는 사람은 아니다. 리안 감독이 <와호장룡>을 만들며 인물에 대한 접근을 고민하듯이, 영화가 가지고 가야 할 핵심을 잘 잡는다면 액션을 하든 카 체이싱을 하든 수단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자신 있는 건 인용이나 오마주는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비슷한 느낌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찍어둔 장면 중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으면 다 뺐다. 무협영화의 특징은 활용하되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은 만들지 말자는 원칙을 세웠다.

-장르의 특성상 기존 무협물과 다른 장면 연출에 주력했을 텐데,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가운데 물이 끓는 장면과 결투 장면을 엮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밖은 엄청난 액션이 전개되고 있는데, 정작 유백은 정자에 앉아 물이 끓는 과정을 지켜보고 차를 마시는 데 집중하고 있다. 마음속 동요와 액션이 정중동으로 모두 표현되는 장면이다. 당나라 시대의 차에 관한 책에서 ‘물이 익는다’라는 표현을 봤는데 그걸 액션과 접목해서 만들었다. 홍콩 무협영화와 차별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런 장면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적 무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이런 게 아닐까.

-배경이 되는 고려 무인시대는 TV사극 <무인시대>로 익숙하다. 무신정변(1170년)이 일어나 무인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숙청을 감행하던 폭정의 시기다.

=영화의 시작 ‘고려 무인시대. 차, 민란, 칼이 지배했던 시기’라는 자막이 나온다. 고려 중기를 상정했는데, 당시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이라는 ‘4인의 실력자’가 차례대로 집권하다가 무너지는 일이 있었다. 노비 출신인데 덕기라는 이름을 버리고 왕의 자리까지 탐하는 유백은 그중 천민 출신에서 권력의 최고 자리까지 오른 이의민을 모델로 삼은 캐릭터다. (이의민은 아버지가 소금 장수였고 어머니가 사찰의 노비로 천민 출신이었는데 무신정변으로 폐위된 의종을 직접 살해하고 권력의 최고 위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 시대에 반란은 많았지만 직접 왕이 되려는 꿈을 꿨던 사람은 고려 말의 이성계 말고는 없었으니, 이의민의 야심은 엄청났다고 볼 수 있다.-편집자)

-유백은 그렇게 야망에만 눈이 먼 ‘악인’이라고 하기엔 매 순간 자주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풍진삼협과 함께 민란을 주도했던 시절의 순수했던 ‘덕기’로 돌아올 가능성을 매 장면 내포한 인물이다.

=유백이 과연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해봤다. 곧 세상을 다 얻게 될 텐데, 과거의 여자 때문에 그 일을 그르칠까. 유백은 그런 면에서 입체적인 매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신분 상승한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르다. 율(이준호)한테 유백이 말하지 않나. 아픈 곳이 있다면 잘라버리라고. 가장 아픈 부분이 자신을 가장 나약하게 만든다고. 율한테 주는 가르침이지만 결국 그게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여자 무사가 활약할 수 있는 시대상이라는 점에서 고려시대를 활용한 목적도 다분히 엿보인다.

=그게 고려로 간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한국 역사에서 여성이 칼을 들 수 있는 시대가 언제였을까. 여성에게 칼을 들릴 수 있는 시대가 필요했다. 고려라면 가능했다. 여성이 정일품, 정이품 같은 고위직까지 오를 수는 없었지만 의복 담당, 차 담당 관직을 도맡았고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던 시기다. 여성이 ‘시집 간다’는 조선시대의 사고방식 대신 그땐 거꾸로 남성들이 ‘장가 가는’ 시대였다. 데릴사위인 거다. 시대적 풍요로움도 컸던 시기다. 영토가 거의 지금 남북한을 합한 크기 정도였고, 외세로부터 독립성도 강했다. 건축이나 복식도 가장 화려했던 시기다. 그런 특성을 활용하고 싶었다.

-<인어공주>의 물질하는 해녀 엄마, <사랑해, 말순씨>의 생활력 강한 엄마 등 작품을 통해 여성의 목소리에 항상 주목해왔는데 이번에는 여성에게 ‘칼’을 쥐어준 셈이다. <협녀, 칼의 기억>에서도 설랑은 덕기의 보살핌을 받는 여성이 아니라, 덕기에게 가르침을 주고, 그를 보살펴주며 인도하는 누이의 역할이다. 여성을 항상 이렇게 이야기의 중심에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늘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 여성을 통해서 보면 조금 더 전투적으로 세상을 그리게 된다.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들도 엄청나게 지독하다. 처음에는 아예 세 여자로 출발해보자고 했는데, 도저히 시나리오가 안 나오더라. 그래서 세속적인 욕망이 여성보다 강한 남성 역할을 배치시키고 협, 정의로움, 원칙, 그런 가치관을 여성을 통해 구현하려고 했다. 설랑을 움직이는 건 결국 속죄의 마음이다. 민란에 함께 가담해 가난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어쩌다 연인이었던 덕기의 배신으로 함께 형제를 죽이게 된 거다. 누군가는 과거의 일이니 잊고 그냥 살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말하지만, 사랑 이전에 의를 나눈 여자는 속죄해야 한다는 원칙을 자신에게 부여하게 된다.

-설랑은 맹인 검객으로 활약하는데 이런 설정은 무협영화에서 활용도가 상당히 높은 캐릭터다.

=내용상으로 볼 때 설랑은 스스로 죗값을 치르고자 자신이 가져가야 하는 형벌을 주고 맹인의 길을 가게 된 거다. 설랑과 50명의 병사가 싸우는 장면에는 설랑이 소리를 들으면서 싸우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사실 맹인 검객 설정은 무협물에서 다양하게 등장해왔다. <자토이치>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무협지 <사조영웅전>에도 남편을 죽인 사람을 찾아다니는 맹인 검객이 등장하는데 손톱이 어머어마하게 길어서 손톱을 넣어 뇌 안에 있는 걸 다 꺼내서 사람을 죽인다. 꼭 무협물만이 아니다. <여인의 향기>(1992)의 알 파치노도 눈이 보이지 않지만 엄청난 매력을 풍긴다. 신체적 약점으로 인해 에너지와 카리스마가 극대화된다. 그런 지점을 월소의 캐릭터에게도 부여하고 싶었다.

-협녀(俠女)가 뜻하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협녀(俠女)의 ‘협’은 ‘의협심이 있다’의 ‘俠’이다. 사람 인(人)을 끼고 있는 모양새의 글자로 약한 자, 불쌍한 자를 끼워서 보살피는 형태다. 비록 칼이 지배하던 시대라고 할지라도 옳은 것은 전부에게 다 옳다. 월소는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옳은 것을 따르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월소의 이런 가르침을 받은 협녀는 결국 홍이다. 협녀가 되는 홍이의 성장을 그리려고 했다. 월소는 홍이와 유백 사이를 잇는 일종의 고리 역할이다. 모든 청사진을 만든 설계자인 것이다. 18년 전의 과오와 참회, 속죄를 하기 위해서 그는 홍이를 일종의 ‘대리 복수자’로 만든다. 복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 시간은 월소에게는 그냥 멈춰버린 시간일 뿐. 봉인된 시간이 다시 풀리기까지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18년간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관계도를 121분의 러닝타임으로 완성했다. 여러 편집 버전이 있었을 것 같은데.

=시나리오에서 바뀐 게 거의 없었다. 인물들이 얽혀 있다 보니 신을 많이 덜어낼 수가 없더라. 영화의 중심인물인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에 집중하는 걸로 했다. 유백이 숙적인 존복(김태우)과 벌이는 권력의 암투과정은 전체 이야기가 돌아가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거 같더라. 유백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율의 에피소드도 좀 축소됐다. 야망을 가진 친구이고 유백의 신임으로 위로 올라가는 캐릭터인데, 이 이야기를 가져가다 보니 좀 우회하는 느낌이 들더라. 그렇게 덜어내고 멜로, 아주 처절한 멜로만 남는다. 무협의 속성 중 액션과 사랑은 나누는 게 아니라 불가분의 관계라 생각한다. 액션과 사랑을 함께 가져간다는 게 소구점이 될 것 같다.

-무협영화를 통한 시행, 관철, 착오의 과정을 거쳐왔는데 지금 <협녀, 칼의 기억>을 되돌아본다면 어떤 의미인가.

=지금까지 영화를 할 때 실핏줄을 다루면서 그게 얽히고설키면서 풀어나가는 작업을 해왔다면, 이번엔 대동맥, 대정맥을 다루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경험이긴 했는데, 워낙 흐름이 크다보니 터지면 수술이 잘 안 되더라. 그래서 터져도 외과적으로 봉합하지 못한 지점들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가령 홍이가 복수를 감행할 때 감정적 설득력을 조금 더 주었으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들도 아쉽지만 잘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지지난해에 겨울 촬영을 하고 본의 아니게 개봉이 미뤄지면서 마음고생이 컸겠다.

=원래 지난해 12월 개봉 목표였으니 한참 늦어진 거다. 벌써 다음 작품 <해어화>가 크랭크인해서 새벽까지 촬영하다가 왔다. 오래 후반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 한편으로는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하더라. 그래도 시간을 벌어서 몇몇 장면들을 덜어내고 이야기를 다듬을 수 있는 여유는 있었다. 지금은 담담하다. 초조할 나이는 지난 것 같다. 이제는 기다려보자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평가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기다려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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