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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김혜리 2015-12-17

※<괴물의 아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트 오브 더 씨>

론 하워드 감독의 전작 <러시: 더 라이벌> 정도는 아니지만 <하트 오브 더 씨>에서도 경쟁은 스토리의 중요한 동력이다. 선주 부친의 낙하산 인사로 포경선 에식스호의 선장이 된 조지 폴라드(벤자민 워커)와 탁월한 능력을 갖고도 캡틴 자리를 빼앗긴 1등 항해사 오웬 체이스(크리스 헴스워스)는 날카로운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조지와 오웬은 사적 분쟁으로 배를 산으로 몰고 갈 소인배들은 아니다. 선원들 앞에서 처음 충돌을 벌인 후 조지가 배를 돌려 오웬을 처벌하려들자, 항해사는 논쟁 대신 실리적 관점으로 설득한다. 파더 콤플렉스라는 공통점을 가졌기에 상대의 버튼이 어디서 눌리는지 알아본 것이다. 진짜 재앙은 갈등의 순간이 아니라 인정욕구과 성취욕에 사로잡힌 두 사내가 합의를 볼 때 찾아온다.

12/01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영화에는 고아나 유랑자의 삶에 대한 동경이 흐른다. 과거로부터 온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치아키, 인간의 도시에서 이삿짐을 나르며 생활하는 <늑대아이>의 늑대 청년과 엄마를 두고 숲으로 들어가는 아메, 곰 스승에게 의탁하는 <괴물의 아이>의 렌/큐타 등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에는 제도 밖에서 세상을 주유(周遊)하며 독학으로 스스로를 완성시키고, 가족과 친구를 직접 선택하여 한정된 시간만큼 그들 곁에 머무르는 남성 인물들이 등장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그들은, 하늘을 나는 새의 시점으로 세계를 멀찍이서 바라본다. 그들은 어떻게 길을 떠났을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치아키와 <늑대아이>의 늑대 청년이 집을 떠나는 장면을 관객은 보지 못하며 우여곡절이 대사로 상세히 설명되지도 않는다. <괴물의 아이>에 이르면 이혼 후 둘이 함께 살았던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은 아홉살 렌이 가출하는 상황이 플래시백을 통해 드디어 나온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회상장면을 보고 들은 다음에도 정확히 무엇 때문에 소년이 외갓집 어른들을 피해 도망쳤는지 불분명하다. 이를테면 렌의 친척들은 무방비한 아홉살 아이가 가출을 무릅쓸 만큼 나빠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단순히 시나리오의 결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호소다 마모루라는 작가는 ‘가출’을 구구이 설명할 필요를 잊을 만큼 당연한 삶의 절차로 인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유의지로 집을 떠난 호소다의 인물들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버린 입장이다. 본인의 보호자를 자임하고 온 세상을 교사로 삼아 성장한 주인공들에게는 원한이 없고 그들의 반대편에는 무찔러야 할 이렇다 할 악역도 없다. <괴물의 아이>에는 큐타와 대결을 벌이는 이치로 히코가 등장하긴 한다. 성장하며 자신의 혈통을 의심하는 그는 “버려졌다”는 의식으로 엇나간다. 그러나 큐타는 이치로 히코를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동일한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인 친구”로 간주하고 경험을 공유하는 동료로서 도울 의무를 느낀다.

12/02

<늑대아이> 개봉 무렵 실제로 아버지가 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가족을 떠나는 소년/청년으로부터 언젠가 아이를 떠나보낼 보호자쪽으로 동일시 대상을 조금씩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와 2013년 가진 대담에 따르면, 감독 부부는 긴 기다림 끝에 임신에 성공했기에 부모가 된다는 일에 포함되는 여러 측면을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정말 준비가 됐나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아이가 안전하게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고, 자라다 병에 걸릴 수도 다칠 수도 있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심지어 다른 아이를 해칠지도 모른다. 더구나 나처럼 수입이 불규칙한 직종의 부모는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고 언제까지 살아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이 모두를 숙고한 다음에도 우리 부부는 아이를 원했고, 그 열망이 어쩌면 준비의 큰 부분이라고 판단했다.” <늑대아이>와 <괴물의 아이>의 주요 관심사가 “부모란 무엇인가”, “부모가 아이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가능하고 가장 바람직할까”인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호소다 마모루의 이야기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천륜으로 다루지 않는다.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가 일방적으로 쏟아붓고 성장한 아이가 사랑을 갚는 식으로 회로가 폐쇄되지 않는다. 가출하는 아이들이 나오는 두 영화에서 보호자의 가장 중대한 과제는 ‘잘 떠나보내기’다. 부모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지만 아이의 성장 과정을 독점적으로 관리하는 식으로는 아무것도 물려줄 수 없다. 영향은 오직 유전이나 공동의 경험처럼 간접적이고 자연스러운 형태로만 가능하다. <늑대아이>의 아메는 아버지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지만 때가 오자 멸종해가는 늑대족의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유지되어야 하는 적정 거리를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거의 결벽하게 유지한다. 주인공은 최소한 필요한 시간만 부모/유사부모 곁에서 보내고 독립한다. 자연히 대다수 가족영화의 중심이 되는 부모 자식간의 갈등과 긴장이 ‘쿨하게’ 제거된다. 결과적으로 부모의 사랑과 영향은 조그만 기념품의 형태로 남는다. <괴물의 아이>의 쿠마테츠는 사물로, 머릿속의 목소리로 변하고 <늑대아이>의 아버지는 서랍장 위의 사진과 유리컵 안의 들꽃으로 남는다. 호소다 마모루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이 ‘산뜻한’ 관계는 비단 부모와 자식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괴물의 아이>에서 큐타를 좋아하는 소녀 카에데는 붉은 실 팔찌로 남고 그것조차 다른 인물에게 넘겨진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괴물의 아이>에 거듭 등장하는 시부야의 스크램블 횡단보도 풍경- 네 방향에서 보행자들이 빠른 속도로 교차하는- 도, 사람들 사이의 표표한 스침을 함축한 대유법으로 보인다. 호소다 마모루가 보기에, 한 인간은 최선의 경우 다른 인간에게 소중한 부적이 될 수 있다. 그 이상이 되기를 욕심내는 일은 부질없다.

12/04

마이클 파스빈더는 매우 육체적인(physical) 연기를 하는 배우다. 많은 출연작에서 파스빈더는 아예 전쟁터에 나가 있거나 그의 육체 자체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단식투쟁과 섹스 중독을 다룬 <헝거>와 <셰임>은 물론, 단추를 꼭꼭 잠그고 항문기 고착적 청결 집착증을 드러내는 <데인저러스 메소드>의 칼 융도 나름의 방식으로 몸과 불화하고 있다. 마임 아닌 마임 연기를 펼친 <프랭크>야 말할 나위도 없다. 고전 연극에 많은 경험이 없는 ‘육체파’ 마이클 파스빈더와 셰익스피어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특히 희극은 상상하기 힘들고- 파스빈더에게도 유머 감각이 있지만 셰익스피어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다- 비극 가운데 그나마 가능해 보였던 작품이 <맥베스>였다. 그리고 상상은 현실이 됐다. <맥베스>는 4대 비극 가운데 가장 부피가 얇고 잔가지 플롯 없이 직진하는 이야기다. 연극의 경우, 숨구멍 없는 긴장과 우울에 짓눌려, 다른 셰익스피어 작품은 거뜬히 감당한 배우들이 맥베스는 견디지 못하고 연습 중 잠적한 일화들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중압감을 배우에게서 조금 덜어줄 수 있다. 게다가 <맥베스>는 영화 매체가 각색을 욕심 부릴 만한 액션과 스펙터클을 내장하고 있다. 저스틴 커젤 감독의 <맥베스>는 이 명백한 포인트에 착안했고 파스빈더 역시 영화 스타일에 부응하는 ‘고뇌하는 전사 맥베스’를 연기한다.

과연, 커젤 감독의 <맥베스>는 연극으로는 불가능한 노골적 살육과 스펙터클을 조명, 고속촬영, CG로 극대화했다. 덩컨 왕의 시해 신과 버넘 숲이 스스로 뿌리를 뽑아 이동하는 장관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나는 <맥베스>를 보는 동안 놀라거나 전율하진 못했다. 커젤이 연출한 웅장함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연극 아트디렉터 출신다운 안목이 반영된 분장과 의상은 매우 훌륭하고 미술도 흠잡을 데 없지만, 한 숏의 에너지가 다음 숏으로 이어지거나 후속 장면을 밀어가지 못해 영화가 뒤로 갈수록 발을 끈다. 예컨대 하나의 숏과 신의 시각적 아이디어가 소진되면 카메라나 배우의 움직임으로 출구를 열기보다 그냥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하는 인상이다. 다만 여러 대의 카메라를 써 지루함은 피했다. 그러다보니 매력적인 배우들을 가까이서 찍은 숏은 주로 감정을, 롱숏은 공간과 스펙터클을 조감하는 기능을 기계적으로 분담하는 모양새가 됐다. 저스틴 커젤 감독은 맥베스 부부의 자기파괴적 야망이, 아이 잃은 부모의 상실감과 전쟁의 불모성이 남긴 트라우마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으로 배우들에게 현대적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 모티브는 중반 이후 인물의 경험으로 발전의 궤적을 그리지 못해 고정 모티브에 그친다. 결국 캐릭터의 설득력에 있어 <맥베스>는 마이클 파스빈더와 마리옹 코티야르의 카리스마와 분위기에 의존한다. 그렇다 해도 두 배우 공히, 연기 경력에서 맥베스나 레이디 맥베스를 베스트 중 하나로 꼽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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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님 혹시?

화장을 하고 패션에 신경 쓰는 여자로 분하니 오히려 못 알아보겠다.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에서 주인공 에이미(에이미 슈머)가 근무하는 뉴욕의 잡지 편집장 다이애나를 연기한 틸다 스윈튼 이야기다. 평소 메이크업을 멀리하고 전위적이거나 편한 옷을 선호하는 이 배우가 공들인 스모키 눈화장에 가죽 스커트를 입고 10cm 킬힐을 신은 모습은, 특수분장을 거친 <설국열차>의 메이슨이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마담D보다 더 감쪽같은 둔갑으로 느껴진다. 물론 셀프 태닝 크림과 가발의 공이 크긴 하지만. 주드 애파토우 감독으로부터 다이애나의 메이크업과 의상 결정권을 넘겨받은 틸다 스윈튼은 <허핑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컨셉을 소개했다. “다이애나는 내가 매일 거리에서 마주치는 여자들처럼 생겼다. 누구든 대형 백화점 화장품 코너를 거치면 이런 모습이 된다.” 우리는 반투명한 정령 같은 외모를 도화지 삼아 그림 그리듯 즐기고 있는 배우를 구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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