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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캐스팅 전날 그렇게 많은 네잎클로버를 뽑았지 - <곡성> 장모 역의 허진
송경원 사진 오계옥 2016-06-01

2016 <곡성> 2014 <나를 잊지 말아요> 1993 <오사카의 푸른 밤> 1991 <미지의 흰새> 1990 <캬바레부인> 1989 <25불의 인간> 1988 <합궁> 1986 <허튼 소리> 1983 <장미와 도박사> 1982 <평양박치기> 1982 <요권괴권> 1980 <월녀의 한> 1980 <매일 죽는 남자> 1979 <마지막 찻잔> 1978 <망명의 늪> 1976 <여수 407호(속)> 1976 <여수 407호> 1976 <맨발의 억순이> 1974 <사랑이 있는 곳에> 외 다수

왕년의 스타라는 무게를 벗고 새롭게 반짝이는 중이다. 허진은 1971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하자마자 스타 반열에 올랐다. 관능적인 캐릭터로 70, 80년대 영화계를 주름잡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그녀는 얼마 전부터 복귀해 다시금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긴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스크린을 압도하는 그녀에겐 적지 않은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지만 “영화 잡지에 처음 나오는 거니 잘 찍어달라”며 수줍은 당부를 건네는 모습이 여전히 소녀 같았다.

-<곡성> 흥행 이후 주변의 반응이 달라진 걸 느끼나.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영화 잘 봤다’며 손을 잡아준다. 예전에는 얼굴을 알아도 그냥 힐끔 보고 지나갔는데 요즘엔 인사도 해주고 이 영화를 계기로 좋은 일이 있을 거라며 덕담도 많이 듣고 있다. 주변에서 함께 기뻐해주시니 괜히 가만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이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이 있을 거라 예상했나.

=워낙 어두운 이야기라 시나리오만 봤을 땐 이렇게 흥행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촬영에 들어가고 나선 생각이 바뀌었다. 이렇게 다들 고생하면서 찍는데 하늘이 무심치 않는 한 잘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 장면을 최소 10번은 기본으로 촬영하니 밤새는 건 다반사였다. 스탭들이 탈진할 정도였는데 그걸 다 지휘하고 독려하는 감독은 어느 정도였겠나. 나홍진 감독 혼자 산삼 뜯어 먹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생명을 불태우는 것 같은 감독 얼굴을 볼 때마다 이 영화는 무조건 잘돼야 한다는 확신, 아니 간절함이 절로 생겼다.

-나홍진 감독이 캐스팅을 위해 직접 여러 번 찾아갔다고 들었다.

=내 어떤 부분을 보고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천재들 눈에는 뭔가 보이는 게 있는가보다. 예전 신상옥 감독님이 <여수 407호>에 나를 캐스팅할 때도 그랬다. 아무것도 증명된 게 없는 신인 여배우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시면서 나를 꼭 붙들어주셨다. 신성일 배우가 40만원을 받을 때였는데 <여수 407호>와 <여수 407호(속)>, 두편을 묶어 60만원을 달라고 했다. 당시엔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최고 액수의 개런티를 부른 건데 1원도 안 깎고 그러자고 하시더라. 나도 모르는 뭔가가 있나보다, 내가 정말 필요한가보다 싶어 마음이 흔들렸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다 시들어가는 연기자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꼭 필요하다고 찾아오니 이 나이에 새삼 도전해볼 이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래도 막상 현장에 갔을 때 다른 생각이 들진 않았나. 워낙 힘들기로 소문난 촬영현장이었는데.

=개인적으로도 이만큼 치열한 현장은 겪어본 적이 없다. 신상옥 감독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땐 하고 싶지 않았다. 웬만하면 편하고 덜 고생스러운 것 하면서 살고 싶었으니까. 순전히 나를 필요로 하는 감독의 열정에 반해 시작한 거다. 돌이켜보면 그때 하기로 한 게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캐스팅 계약하기 전날 성당에 갔는데 내 생전 그렇게 많은 네잎클로버를 뽑아본 적이 없다. 이 영화야말로 내 뜻과 상관없이 어느 날 문득 내게 찾아온 행운 아니면 운명 같은 작품이다.

-완성된 영화를 일부러 혼자 다시 봤다고 들었다.

=며칠 전에 극장에 가서 보고 왔다. 내가 나오지 않는 장면들도 다시 한번 꼼꼼히 보고 싶어서. 장면마다 현장에서의 기억과 노력, 감독의 진심이 전해져서 좋았다. 함께한 배우와 스탭들 얼굴 하나하나가 이렇게 생생히 떠오르는 영화는 처음이다. 황정민 배우는 추운 겨울에 맨발로 굿판을 벌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항상 더 챙겼고, 곽도원 배우는 내가 매번 생불(살아있는 부처)이라고 불렀다. (웃음)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촬영 중에는 나홍진 감독이 미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꼭 안아주고 싶다. 싫다고 질색하며 도망갈지도 모르지만. (웃음)

-신상옥 감독도 현장에서 엄격하고 꼼꼼하기로 유명한데, 나홍진 감독과 비교하면 어땠나.

=일단 스타일이 완전 다르다. 특히 완벽함에 대한 집착은 나홍진 감독만한 사람을 못 봤다. 신상옥 감독님은 아무리 많아야 한 장면에 5테이크 정도였는데 나홍진 감독은 최소 10테이크가 기본이었다. 미웠다가 불쌍했다가 예뻤다가 하루에 열두번도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일하다가 죽는 게 소원이라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이 사람은 이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구나 싶더라. 촬영할 때는 나홍진 감독 작품 다시는 안 해야지 해도 지나고 나면 또 불러줬으면, 함께했으면 하는 기분이 드는 사람이다.

-70, 8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어느 순간 모습을 감췄다. 특히 영화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투정도 많이 부렸다. 한•홍 합작영화였던 <여수 407호> 찍을 때 하루는 식사하는데 홍콩 배우에게만 달걀을 주고 나는 안 주는 거다. (웃음) 그게 서운해서 못 찍겠다고 했는데 그때 신상옥 감독님이 그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들으면서도 화 한번 안 내시고 나를 가만히 다독여주셨다. KBS 드라마 <셋방살이>(1975)를 찍을 땐 구질구질한 월남치마가 창피해 촬영하다가 집으로 가버리기도 했고, 설태호 감독의 <사랑이 있는 곳에>는 김진규 배우와 함께 주연을 맡았는데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찍으면서도 내내 속상했다. 그 정도로 너무 어렸고 뭐가 중요한지 몰랐던 시절이었다. 모진 풍파를 거친 이제는 다른 걸 보여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멀고 먼 길을 돌아와 겨우 연기와 삶이 별개가 아니란 걸 느낀다.

-<곡성>은 워낙 해석의 여지가 분분한 영화다. 이번에 맡은 장모 역을 두고도 여러 설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혹시 동의하는 의견이 있나.

=어떤 해석이 맞는 건진 나도 모르겠다. 감독이 배우들에게도 전체 그림을 선명하게 설명해주진 않았다. 그때그때의 상황과 분위기를 강조했고 오히려 캐릭터의 전후 사정까지 명확하게 그리고 연기하는 걸 꺼려하는 것 같았다. 내겐 대체로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해주길 바랐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좀더 무섭게’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오히려 화면에서는 현장에서 보다 덜 무섭게 그려진 것 같다. ‘매번 어떻게 그렇게 연기를 잘하시냐’며 날 칭찬하면서 꼭 다시 한번 더 가자고 하더라. (웃음) 내 나름의 해석은 있지만 각자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게이 영화를 제대로 보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허정 감독의 <장산범>에도 출연한다.

=분위기나 역할이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허정 감독은 나홍진 감독과 180도 달라서 재미있었다. 인상 한번 쓰는 걸 본 적이 없다. 수줍은 소녀 같은 사람이다. 영화 현장은 분위기는 달라도 모두 함께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돈독한 유대감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특유의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 있다 보면 계속 머물고 싶어진다. 모든 게 연기자의 호흡을 우선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다.

-앞으로 드라마는 물론 영화에서도 자주 볼 것 같다. 연기자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한때는 죽으려고 할 만큼 지독한 허무에 시달렸다. 서서히 죽어갈 준비를 해왔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제는 어떻게든 살았으면 한다. 살려면 일을 해야 하고 죽을 때까지 일이 안 끊기고 들어왔으면 하는 게 유일한 바람이다. 어떤 후배는 나보고 희망의 본보기라고 하더라. 책임감까진 아니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증거가 되고 싶다. 열심히 일하고 곱게 살다가 가는 게 목표라면 목표다. 또 하나, 예전에는 선배 영화인들이 얼마나 대단한 족적을 남겼는지 몰랐다. <곡성>을 하면서 실컷 고생을 겪고 나니 한국영화를 이끌어갔던 그분들이 이뤄놓은 게 새삼스레 존경스럽다. 기왕 조금 더 욕심부리면 아주 작은 거라도 좋으니, 나도 그런 아름다운 자국들을 남기고 싶다.

<맨발의 억순이>

배우 허진의 그땐 그랬지

<맨발의 억순이>

감독 장현수 / 출연 허진, 박남옥, 조재성

연기력을 인정받는 동시에 <여수 407호> <여수 407호(속)>에 이어 당대의 섹시 스타 이미지를 공고히 한 작품이다. 허진 배우는 이 영화를 “시골에서 상경한 억순(허진)이 비정한 도시 생활을 겪으면서도 바르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이야기”로 기억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땐 좀더 예쁘게 나오고 싶었는데 시골 처녀 역할이라서 속이 상했다.”

<허튼 소리>

<허튼 소리>

감독 김수용 / 출연 정동환, 이혜숙, 허진, 전혜성

걸레스님 중광의 자서전 <허튼 소리>를 원작으로 중광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 김수용 감독의 107번째 연출작으로 당시 심의 문제로 12장면이 잘려 문제가 되었다. 허진 배우는 스님의 애인 역으로 출연했는데 “그땐 괴이하다고 느꼈지만 다시 볼 때마다 좋았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공옥진 여사의 특별출연이 특히 인상 깊었다고.

<25불의 인간>

<25불의 인간>

감독 김현명 / 출연 강석우, 이응경, 김용건, 정혜선, 허진

뉴욕 유학생이 25달러에 판 정자를 제공받은 두명의 동포 여인. 세월이 흘러 그 아이들이 우연히 만나 금지된 사랑을 한다. “해외 촬영이라 기대가 컸는데 막상 가보니 숙소가 할렘가 한가운데 있어 엄청 고생했다. 나중에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배우들이 항의하자 뉴욕에서 제일 좋은 숙소라며 옮겨줬는데, 숙소가 좋긴 좋아서 화장실에서도 수다를 떨며 놀았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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