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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 속 여성들과 <아가씨> 속 히데코와 숙희
정지혜 2016-06-15

<아가씨>

존재의 목적은 희망을 버리고 밥 먹고 살아야 함에 있음을 알게 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의 영군(임수정), 이미 돼버린 것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 어른이 된다던 <스토커>(2013)의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 그 뒤에 <아가씨>(2016)가 왔다. ‘소녀 3부작’의 범주로 묶어 이들을 착란의 세계 밖으로 뛰쳐나온 소녀들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쩐지 <아가씨>는 그보다 더 큰 동심원, 그러니까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와 <박쥐>(2009)까지도 포함하는 박찬욱의 복수극의 계보에 둬도 무방하다. 금기를 넘음으로써 지은 죄와 복수가 끝내 닿으려 했던, 그러나 오랫동안 공란이었던, 구원에 대한 잠정적인 답변서처럼도 보인다.

박찬욱의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1992)에서 하영(송승환)은 배다른 동생(과 버려진 엄마)에 대한 죄의식으로 아버지를 증오한다. 이후 증오는 딸들의 몫으로 옮겨왔다. 첫 번째 단편 <심판>(1999)은 미약하나마 그 시작이었다. 죽은 여자를 두고 서로 자신의 딸이라는 두 아버지를 본다면 응당 내 자식만은 죽지 않았을 거라 믿는 통념의 부정(父情)은 배반당한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스위스계 한국인 소피 장 소령(이영애)은 중립국으로 망명한 아버지를 가족 사진에서 (잠정) 삭제했고,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처지의 사내들이 겪는 혼란을 목격한다(박찬욱은 원작 소설의 남성 캐릭터를 소피라는 여성 캐릭터로 바꾸었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는 망각된 아버지였고, <친절한 금자씨>의 백 선생(최민식)은 죽어야 할 대상이었으며, <박쥐>의 상현(송강호)은 태주(김옥빈)와 흡혈로 피 섞인 숙주다. 부녀의 세계가 불온했다면 모계의 혈통은 ‘루나틱’(lunatic)의 세계다. 정신착란과 신경과민으로 허우적댄다(박찬욱 감독의 세계에 등장하는 달은 그런 의미에서 눈여겨볼 상징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의 외할머니(손영순)와 엄마(이용녀), <박쥐>의 라 여사(김해숙), <스토커>의 이블린(니콜 키드먼)처럼 무력하거나 무심한 목격자의 자리에 선 어머니들이 곧바로 떠오른다.

<아가씨>의 소녀들의 태생도 다르지 않다. 자신을 낳다 목숨을 잃은 엄마에 대한 죄스러움을 간직한 히데코(김민희)를 목매달아 죽은 엄마를 둔 숙희(김태리)가 딱히 여긴다. 그녀들의 아버지들에 대해 들은 바는 없다. 대신 그녀들은 온통 ‘가짜’로 치장한 유사 아버지들이 드글대는 세계에 있다. 일본인인 척하는 조선인 코우즈키(조진웅), 위본들로 가득 찬 가짜 서재, 가짜들로 채워진 허기진 사내들의 욕정까지. 이 가짜들에게 히데코가 거짓말 놀이를 제안한다. 5살 때부터 가짜 세계에서만 자란 히데코가 이 놀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귀족자연하는 가짜들의 욕망을 믿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만이 이 세계의 유일한 진짜임을 히데코는 알고 있다.

거짓말 놀이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인(誤認)이다. 히데코의 낭송과 시연을 포함한 그 모든 ‘아가씨’ 놀이는 가짜가 아님을 가짜들에게 믿게 한다. 단편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2003), <>(2004)을 포함해 박찬욱 세계에서 오인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아가씨>의 오인 역시 복수에 가 있다. 이번 복수극은 더없이 깔끔하다. 히데코와 숙희는 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코우즈키와 백작을 지하실에서 죽인다. 물론 코우즈키의 조바심, 백작의 허풍은 마지막까지도 꺾이지 않는다. 더욱이 사내들의 상상력은 결코 히데코와 숙희의 거짓말의 진의, 그러니까 두 여성이 그들만의 세계로 떠났다는 데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숙희의 말마따나 “모두가 빌어먹게도 제 역할을 잘하고 있”는 역할 놀이에 충실한 결과다. 이로써 히데코와 숙희가 가버린 세계와 코우즈키의 지하는 화해 불가한 완벽하게 불화하는 세계로 남았다. 복수 이후의 상처는 <아가씨>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기꾼이 사랑도 하나?”라며 가짜들을 조롱하던 소녀들은 훔치고 속이고 거짓말하며 사랑으로 간다. 히데코는 구원자 숙희를 만나 가짜 아버지들에게 복수했고 자족의 세계에 안착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정적이다. 해무의 망망대해, 이동 중인 배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 배는 제3국으로 간다. 이들의 사랑은? 구원은?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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