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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터/액트리스] 독을 품은 성실함 – 구로키 하루

<립반윙클의 신부>

여성 유명인에게 ‘~녀’랍시고 라벨을 붙여대는 미디어의 안이한 습성은 일본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배우 구로키 하루의 경우, 한때 현지 대중지들은 ‘갓포기(割烹着)녀’라는 수식어와 함께 헤드라인을 뽑았다. 갓포기란 과거 기모노가 평상복이던 시대, 일본 여성들이 밥을 짓거나 청소할 때 덧입던 구식 앞치마를 가리킨다. 즉 ‘앞치마녀’다.

한국이었다면 아마도 그녀에겐 ‘베를린의 여왕’ 내지 ‘시상식의 여왕’이라는 라벨이 붙었을 듯하다. 구로키 하루가 <도쿄 오아시스>로 영화에 데뷔한 때는 대학 4학년이었던 2011년. 그로부터 불과 2년 만에 <행복한 사전>으로 일본 아카데미상 신인상을 비롯해 2013년에만 총 7개의 신인상을 석권했다. 기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작은 집>으로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여우조연상에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최우수 여배우상(은곰상)의 영예까지 안았다. 설마 하는 기대감조차 없이 시상식 당일 낮에도 베를린 관광만 즐겼다는 구로키 하루의 은곰상 수상은 히다리 사치코, 다나카 기누요, 데라지마 시노부에 이어 일본 배우로서는 역대 네 번째이자 최연소로 수상. 가공할 상복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으니, 2015년에는 <어머니와 살면>으로 일본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2년 연속 석권했다. 이 또한 사상 두 번째에 해당하는 대기록이다.

구로키 하루에게 트로피 2연패를 선사한 <작은 집>과 <어머니와 살면>의 야마다 요지 감독. 갓포기녀라는 라벨은 그의 말에서 유래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상 당시 논평에서 “구로키 하루는 일본에서 갓포기가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언급했던 까닭인데, 1940년대 하녀를 연기했던 <작은 집>에서 그녀는 줄곧 앞치마 차림이었다. 그리고 감독의 이 말을 받은 언론을 통해 구로키 하루는 당대 가장 쇼와적인 이미지, 순수 일본 느낌의 여배우로 꼽히게 되었다.

쇼와적이라거나 순수 일본적이라는 이미지는 <하나코와 앤> <천황의 요리사> <사나다마루> 등의 TV시대극을 통해서도 꾸준히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오즈 야스지로가 여배우 하라 세쓰코에게서 일본의 딸 또는 며느리상을 본 데 반해 구로사와 아키라가 그녀에게 팜므파탈을 읽기도 한 것처럼, 구로키 하루도 작품과 연출가에 따라 쇼와적이라고 한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이미지를 선보였다. 따라서 야마다 요지 외에 다른 이들의 언급과 평가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구로키 하루라는 배우의 진면목에 아마도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990년 오사카부 이바라키시에서 태어나 중학생 시절부터 연기를 동경했던 구로키 하루는 연극부로 이름난 오테몬학원고등학교에 자진 입학했다. 매년 4개의 희곡을 연습, 8번의 공연을 빡빡하게 치른다는 연극부에서 그녀는 1학년부터 주연을 꿰차며 일찌감치 자질을 과시했다. 당시 지도교사는 구로키에 대해 “첫인상은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아이였다. 하지만 기초 연습 단계부터 다른 부원들과는 연기력과 표현력이 달랐다”고 평가했다. 첫인상의 반전은 훗날 <행복한 사전>에서 함께 연기한 미야자키 아오이의 소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성실하지만 독을 품고 있다. 그런 구로키의 균형을 아주 좋아한다.”

흔한 천재의 과거사처럼 보이는 청소년기의 이력과 달리 오늘의 구로키 하루를 만든 것은 재능보다 성실함이라는 것이 본인의 변이기도 하다. 요즘도 문득 야식이 생각나면 직접 밀가루를 반죽하고 면을 뽑아서 우동을 만들어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성격이니만큼 연기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대충은 사절, 후배들에게는 호통을 아끼지 않는 엄한 선배라고. 교토조형예술대학 영화학과 지도교수였던 하야시 가이조 감독이 “연기를 대하는 그녀의 진지함에서 광채가 났다”고 회상한 것은 의례적인 덕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공부하기 싫어서 연극을 시작했을 뿐 졸업하면 유치원 교사가 되리라고 생각하던 구로키의 인생을 바꾼 계기는 배우 노다 히데키의 연극 워크숍 ‘노다 맵’(NODA MAP)이었다. 극단의 틀 없이 작품에 따라 필요한 배우들을 모아 소규모로 공연하는 이 획기적인 워크숍 오디션에 통과, 무대에 데뷔한 때가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10년. 당시 오디션을 심사한 노다 히데키가 구로키에게 낸 과제는 “온몸으로 흙을 표현해보라”는 것이었다. “무아지경인 상태여서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과제가 난감하다기보다 재미있었다”는 것이 당시를 회상한 그녀의 말이다. 아울러 노다 히데키는 훗날 구로키 하루를 이렇게 정의했다. “어떤 색깔이든 입힐 수 있는 배우다.”

그러니까 쇼와적, 순수 일본적이라는 이미지는 구로키 하루의 수많은 색깔 중 하나일 뿐이다. 특히 구로키 하루의 연기와 캐릭터가 진정 흥미로워지는 때는 이러한 대중적 이미지를 배반하는 순간이다. <어머니와 살면>에서는 패전 후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치며 돌보는 책임감 투철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으나, 역시 교사를 연기한 <솔로몬의 위증> 2부작에서는 의문의 죽음을 맞은 자신의 반 학생에 대해 “어쩐지 그 아이의 눈이 무서웠다”라며 죄의식을 전가한다. 최근에는 처음 단독 주연을 맡은 드라마 <중쇄를 찍자!>에서 유도선수 출신으로 매사 의욕 충만한 신입 만화 편집자를 연기했다. 하지만 과거에 편집자를 연기했던 영화 <행복한 사전>의 첫 등장 장면에서 사전 편집부로 발령받은 그녀는 도살장에 끌려온 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흔히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느끼지 않고, 느끼지 않는 것을 느끼는 점이 구로키 하루의 매력”이라고 모호하게 평가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립반윙클의 신부>는 심지어 그녀의 전작들과 기존의 이미지 전체에 대한 안티테제처럼 보인다. 자신감 없고 목소리도 작아 학생들에게 놀림감이 되는 파견직 교사 나나미에게는 이전에 구로키가 연기했던 교사 캐릭터들의 어떤 에너지(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도 존재하지 않는다. 쇼와시대 조강지처 이미지는 극중 조작된 파혼과 함께 부서진다. 연극부 지도교사를 연기한 전작 <막이 오른다>에서 부원들에게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던 미야자와 겐지의 소설 <은하철도의 밤>은, 남편에게 자신의 SNS 계정을 숨기기 위한 위장 아이디(‘캄파넬라’, <은하철도의 밤>의 등장인물)로 인용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체불명의 부호에게 하녀로 고용되는 영화 후반부에서도 나나미는 갓포기를 입지 않는다. 구로키는 “쇼와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서양식 메이드복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까봐 불안했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이와이 슌지 감독이 구로키 하루를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한 광고 촬영현장. 이후 그녀를 이미지화해서 <립반윙클의 신부>의 원작을 썼다고 알려져 있는 바 놀랍게도 그 이미지는 기존의 구로키 캐릭터들과 모든 면에서 어긋나 있다. 배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처럼 판이한 변신의 행보에는 전작들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겠다는 안간힘보다 연기자로서 표현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가 더욱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 출연작을 보고 ‘본 적 없는 내 모습이 나왔어’라고 느껴보고 싶다. 흔히 ‘빙의형’이라 불리는 배우들이 부럽다. 나는 역할로 들어가는 타입도 아니고, 항상 냉정하게 자신을 지켜보는 나를 느낀다.” 이러한 의지를 품은 새로운 행보, 최근 출연한 영화 <에미아비의 시작과 시초>에서 그녀가 도전한 것은 코믹 바보 연기다.

<리갈 하이> 시즌2

하이톤의 “러브 앤드 피스!”

배우가 가진 표현력을 -10부터 +10까지 조절할 수 있는 기계 다이얼이라고 상상해보자. 법정 블랙코미디 드라마 <리갈 하이> 시즌2의 검사보/변호사 혼다 제인을 연기한 구로키 하루의 다이얼은 그 끝과 끝을 오간다. 검찰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늘 칙칙한 옷차림에 뿔테 안경, 얼굴은 앞머리로 가리고 목소리는 기어들어가 거의 들리질 않는다. 그러다 변호사로 독립한 후에는 플로럴 셔츠와 나팔바지 차림 히피 법률가로 변신. 시종일관 “러브 앤드 피스!”를 외치는 목소리는 허스키한 하이톤으로 귀청을 찌른다. 극도의 울증과 극도의 조증을 오가는 그녀의 연기 서커스를 한편의 작품에서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기회. 또한 아수라 백작마냥 만화적으로 비현실적인 이 혼다 제인 캐릭터에조차 문학에서는 다자이 오사무부터 다케모토 노바라까지, 음악에서는 야마구치 모모에에서 시규어 로스까지 넘나든다는 자연인 구로키 하루의 종잡을 수 없는 광범위한 취향이 겹쳐 보인다.

영화 2016 <립반윙클의 신부> 2016 <아주 긴 변명> 2015 <괴물의 아이> 2015 <막이 오른다> 2015 <어머니와 살면> 2015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 (목소리 출연) 2014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 2013 <약해지지 마> 2013 <은수저> 2013 <작은 집> 2013 <초원의 의자> 2013 <행복한 사전> 2012 <샤니다루의 꽃> 2012 <늑대아이> 2011 <도쿄 오아시스> 드라마 2016 <구구는 고양이다2> 2016 <중쇄를 찍자!> 2015 <사나다마루> 2015 <오리엔트 급행 살인사건> 2015 <천황의 요리사> 2014 <구구는 고양이다> 2014 <하나코와 앤> 2013 <리갈 하이> 시즌2 2012 <순수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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