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people
[people] <흔들리는 물결> 김진도 감독
정지혜 사진 오계옥 2016-10-27

흔들리는 물결을 본 적 있는가. 그것은 무상한 시간의 흐름이다. 김진도 감독은 “무한한 시간성 앞에 서 있는 나약한 인간, 그 실존의 문제”를 데뷔작 <흔들리는 물결>에 담으려 했다. 영화 곳곳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고요한 시골 병원 방사선과에서 일하는 연우(심희섭)는 어린 시절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뒤부터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한다. 간호사 원희(고원희)는 그런 연우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넨다. 실은 그녀는 홀로 암과 싸우며 매일같이 죽음의 두려움과 사투를 벌인다. 한없이 나약하고 깨지기 쉬운 사람들은 서로의 고통을 예민하게도 감지한다. 그런 이들이 온기를 나누며 각자의 마음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게 된다면 괜찮은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잔잔한 강물이 흘러가듯 천천히 그리고 고요히 이 질문의 대답을 향해 나아간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소개된 후 1년여 만에 개봉(10월27일)하게 됐다.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계속해 복기해봤다. 만듦새의 아쉬운 지점들이 보이더라. 서사가 느슨하고 등장인물도 몇명 안 나오니 자칫 단조로워 보이면 어쩌나 싶고. 영화에는 일상성과 리얼리티가 잘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리얼리티는 결국 디테일에서 오는 게 아닐까. 인물의 행위나 감정, 공간 등과 관련된 아주 사소한 것이 영화가 말하려는 본질과 닿아 있는 법이다. 디테일을 챙기면 영화의 완성도도 높아진다. ‘다음 작품은 더 잘 만들겠다’는 말을 계속 하게 되더라. 그러던 차에 얼마 전 박찬옥 감독님을 뵙고 위안을 얻었다. 감독님이 “<흔들리는 물결>에는 촌스러움이 있다. 근데 그 투박한 촌스러움이 나는 나쁘지 않더라”라고 하시더라.

-영화는 시종 죽음을 암시한다. 연우와 원희뿐만 아니라 병원이라는 그들의 일터와 그들이 사는 노쇠한 마을 공동체에서도 그런 기운이 감지된다.

=죽음에 대한 고민은 어릴 때부터 계속해 왔다. 초등학생 때도 선생님께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흔들리는 물결>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시나리오 전공과정을 마치며 졸업작품으로 쓴 작품이다. 방사선사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방사선 사진을 보는 이미지가 그 출발이었다. 굉장히 강렬한 인상으로 남더라. 공간도 단양의 자연 풍광이 좋은 고요한 곳으로 잡았다. 자연과 가까이 있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끔찍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나. 약동하는 삶의 에너지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무한한 세계다. 그 앞에서 흔들리는 물결처럼 나약한 인간을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죽음의 테마가 완성됐다.

-쉽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자기 안에서 감내해야 하는 연우와 원희 두 캐릭터는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됐나.

=처음에는 캐릭터화가 잘 안 돼 갈팡질팡했다. 이 영화의 본질이 뭘까를 다시 생각해보니 아주 깊은 어둠 속에 있다가 희미한 빛을 보고 상승하는 것이더라. 물론 그것이 대단한 빛은 아니다. 연우는 산다는 게 무의미해 고통스러운 사람이고 원희는 실존하는 자신이 곧 죽어 없어질까봐 두려운 사람이다. 이처럼 양극단에 있는 이들이 만나 삶의 작은 희망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 여성 캐릭터를 만들 땐 제작사 비밀의 화원의 심현우 대표와 이지연 프로듀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여성들의 심리가 어떠한지 좀더 세밀하게 관찰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웃음) 그러지 않으려 해도 여성을 바라보는 내 시각에 한계가 있더라. 이런 점도 앞으로 내가 풀어야 할 과제다.

-일상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게 배우에게는 상당히 큰 부담이었을 텐데. 심희섭, 고원희 두 배우와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캐릭터를 만들어갔나.

=(심)희섭씨를 실제로 만나보니 연우처럼 섬세하고 감성적인 면이 있더라. 하지만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답 없는 질문을 계속 던지는 연우를 표현하기가 힘들었을 거다. 게다가 촬영 일정도 뒤죽박죽이라 배우가 감정을 잡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고)원희씨도 씩씩하지만 불안해 보이는 원희를 이해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나도 신인감독이라 정신이 없었다. 나처럼 정신 없는 사람을 만나 배우들이 고생이 많았다. 배우의 연기를 보다 세밀하게 이끌어낸다는 게 정말 쉬운 게 아니더라. 학교에서 수업으로 배우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내 것으로 체화하지는 못한 것 같다. 아직도 배운 걸 소화시키는 과정 중이다.

-연우가 때때로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이 있다. 서정성 짙고 정적인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는 잔잔함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감정 같은 게 있다. 비균질적인 장면들이다. 오토바이 신도 그렇다. 물론 감정을 너무 직접적으로 보여줘 촌스러워질까 고민도 있었다.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연우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 때만큼은 폭발하고 싶은, 좀더 멀리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라 생각해 넣었다.

-<와니와 준하>(감독 김용균, 2001)의 연출부 생활을 시작으로 김성수 감독이 운영한 제작사 나비픽쳐스 등을 거쳐 시나리오 전공까지 마쳤다. 연출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내 안의 궁금증이 있다. 죽음의 문제뿐 아니라 ‘왜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부자인가’, ‘어째서 정의는 바로 서지 않는가’, ‘타락한 자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그 해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철학서와 시집을 뒤적였고 이미지화해서 보여줄 수 있길 바랐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지도교수로 만났던 이창동 감독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걸로 안다.

=사실 <흔들리는 물결> 이전에 나우필름에서 준비하던 작품이 하나 있었다. 이창동 감독님이 그 시나리오를 보시더니 ‘그럴듯하긴 한데 이 인물은 가짜다. 흉내만 냈다’고 하시더라.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오죽 했으면 꿈에 이창동 감독님이 나와 “가짜야, 가짜야”라고 하실 정도였다. (웃음) 영화는 시작도 끝도 인물인 것 같다. 캐릭터가 좋으면 배우도 자연스레 연기가 잘되고 인물이 좋다는 건 결국 그 인물이 그리는 서사도 좋다는 말이다. 영화의 주제가 좋다는 걸로도 이어진다. 이창동 감독님이 수업을 통해 이런 생각을 정리해보게끔 해주셨다.

-그럼 그때 준비하던 작품은 어떻게 됐나.

=시나리오가 산으로 가고 있다. 이창동 감독님도 ‘이거 산으로 간다. 진도야, 좀 쉬어라’ 하실 정도였다. (웃음) 그사이 청년필름에서 <흔들리는 물결>을 찍게 된 거다. 내용이 지나치게 우울해 투자가 안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설정을 바꾸면 원래 갖고 있던 이야기가 사라져 이상해지고. 고민이다, 고민.

-화려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이 조용하고 서정적인 <흔들리는 물결>이 관객의 눈에 띄는 게 관건이겠다.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있다. 연우가 원희에게 “너무 외로워하지 마세요, 시간만 지나면 꽃이 피니까”라고 하는 대사다. 누군가가 그런 얘길 진심으로 해준다면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느슨한 서사에 단조로운 방식으로 찍었고 속도도 느리다. 하지만 ‘외로워하지 마세요’는 인간이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의 말이 아닐까. 그런 영화의 온도가 관객의 정서를 건드릴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