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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 인터뷰] "과거를 되돌아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 레스페 이봉우 대표

이봉우 대표를 마지막으로 본 건 8년 전이었다. 2009년 가을,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열린 아시아필름마켓을 찾았다. 2006년 그는 서울 명동의 한 건물과 임대 계약을 맺은 뒤 5개 스크린을 갖춘 극장 ‘시큐엔(CQN) 명동’을 운영하다가 6개월 만에 건물주에게 사기당해 건물에서 쫓겨났다. 2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재판을 진행했던 그는 수입이나 공동 제작을 할 만한 프로젝트들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부산을 찾았던 것이다. 되돌아보면 이봉우 대표의 인생은 자신이 제작한 영화 <박치기!>(2004)의 제목처럼 늘 박치기의 연속이었다. 영화 제작사이자 배급사인 ‘씨네콰논’을 설립해 <서편제>(1993), <쉬리>(1998), <공동경비구역 JSA>(2000) 등 한국영화를 일본에 배급했고, <박치기!>, <아무도 모른다>(2004), <훌라걸스>(2006), 등 일본영화를 제작해 한국에 소개했다. 지난 10월 제29회 도쿄국제영화제 출장을 앞두고 그가 생각나 연락처를 수소문했고, 그에게서 만나자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도쿄국제영화제 개막 리셉션이 열렸던 10월25일 저녁, 그랜드 하얏트 호텔 롯폰기 힐스의 한 커피숍에 들어온 레스페 이봉우 대표는 8년 전 만났을 때보다 얼굴이 밝아 보였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다시 영화를 제작하며 바쁘게, 잘 지내고 있다.

-옛날얘기부터 묻고 싶다. 사기사건을 당한 뒤 일본에 돌아가 재판을 마무리 짓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들었다.

=일본에서 20년 동안 영화사업을 해왔다. 시큐엔 명동 건물과 계약하고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문제가 많았다. 건물주가 공과금을 처리하지 않아 가스와 전기가 나오지 않았다. 소개해준 사람만 믿고 건물을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은 채 덜컥 계약한 탓이다. 극장을 연 뒤 6개월 정도 사업하던 중 건물주가 고의 부도를 내고, 건물의 8층부터 10층까지 5개관을 경매에 부쳤다. 우리는 그를 사기죄로 고발했고, 그는 특별경제범으로 1년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건물주는 모든 재산을 부인 명의로 돌린 채 이혼한 상태였던 탓에 한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새 건물주는 똑같은 액수의 임대료를 요구해왔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은행에 대한 입장이 난처해졌다.

-당시 일본 은행은 이봉우 대표가 한국인들과 꾸민 일로 오해하고 있었는데.

=미쓰비시, 스미토모 은행으로부터 각각 6억, 7억엔(63억, 74억원) 정도 대출을 받았다. 스미토모 은행은 시큐엔 명동 사업을 할 때 대출을 해줬다. 스미토모 은행 지사장과 관계도 좋았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은행은 시큐엔 명동 대출금뿐만 아니라 내 다른 사업의 대출금도 한꺼번에 상환하라고 통보했다. 날 믿을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은행쪽에 모두 설명해주었다. 스미토모 은행 본사는 내가 일본에서 돈을 가져다가 한국에서 일을 벌인 것으로 오해했다.

-일본영화계가 사건을 지켜보면서 많이 놀랐을 것 같다.

=다들 무척 놀랐다. 부끄러운 표현이지만, 일본 감독들이나 프로듀서들에게 나는 롤모델이었다. 메이저 스튜디오의 손을 거치지 않아도 <박치기!> <훌라걸스> <아무도 모른다> 같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고, 산업적으로도 흥행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튜디오가 제작하는 일본영화는 대부분 원작이 있지만, 내가 제작한 영화들은 거의 다 오리지널 시나리오였다. 내 영화관에 배급하는 게 하나의 길이었고, 시큐엔 운영이 잘되지 않으면 다른 영화인도 그런 영화사업을 시도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분위기였다. 시큐엔 명동 운영을 시작할 때쯤 50억엔(약 530억원) 규모의 영화펀드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런 영화펀드는 일본에서 처음이었다. 5년에 50억엔은 도호, 도에이, 쇼치쿠 같은 메이저 스튜디오만 조성할 수 있는 규모다. 그 펀드를 가지고 5년 동안 영화를 제작할 계획이었다. 영화관도 있었으니 상장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는 한국영화를 상영하고, 한국에서는 일본영화를 상영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사기사건에 휘말리면서 그 꿈은 물거품이 됐다.

-파산 직전에서 회생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했나.

=절대 파산하고 싶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회사가 파산하면 저작권이 사라진다. 창작자의 저작권만큼은 지키기 위해 법원에 ‘민사재생법’을 신청했다. 채권자의 70% 이상이 동의해야 적용받을 수 있는 회생 제도인데 89%의 동의를 얻어냈고, 대출금 약 40억엔을 절감받을 수 있었다. 민사재생 절차를 거치면 영화 판권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 상환할 수 있고,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다. 영화관을 팔아 받은 약 18억5천엔을 먼저 상환했다. 대출금의 45%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3번의 재판을 거치면서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었고,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고, 영화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도망칠 수 없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컸을 텐데.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2009년 12월 소송이 끝났고, 이듬해 모든 일이 완전히 정리됐다. 도와주겠다는 사람도, 도와달라는 사람도 많아 빨리 재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010년 12월 긴자에서 이봉우의 부활을 바라는 행사가 열렸다. 일본 영화인들이 마련한 자리인가.

=영화인보다는 지인, 친구들이 행사를 열어주었다. 영화인들은 몇명 끼어 있는 정도였고. 친구라고 하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사업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그때도 지금도 계속 도와주고 있다.

-평소 사람들에게 잘했나보다.

=그보다는 그간 만든 영화들이 좋았기 때문인 것 같다. 쓸모없는 영화를 만들었다면 도움과 용기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제작한 영화 대부분 난관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또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우 최민식씨도 행사에 참석했고, 많은 용기를 주었다.

-최민식씨와는 어떤 인연이 있나.

=<쉬리>가 일본에 개봉했을 때 만난 적 있다. 또 <NHK>에서 <한국영화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 있다. 내가 진행자로 출연해 한국 영화인들을 만나고, 한국 영화사를 보여주는 5부작 프로그램이었다. 2회 때인가 3회 때, 최민식씨를 만났다. 프로그램으로 만났던 최민식, 문소리씨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영화를 일본에 소개할 수 있었던 건 좋은 경험이었다. 몰랐던 사실을 배웠고 스스로를 정리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한국영화와 항상 인연이 닿아 있는 느낌이다.

-새 회사를 차린 건 언제인가.

=2011년. 그때 이름은 스모모(すもも)였다. 스모모가 내성인 ‘이’(李)의 발음이기도 하지만 ‘복숭아’라는 뜻도 있다.

-가장 먼저 했던 사업은 무엇인가. 제작이나 배급 사업부터 시작하진 않았을 텐데.

=페스타(FESTA)라는 이름의 이동영화관 사업이었다. 3·11 동일본 대지진 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피해가 컸다. 영화관도 사라졌다. 지진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동일본 지역을 찾아가면서 이동영화관을 시작하게 됐다. 대형 트럭에 200여석 규모의 계단식 의자와 필름 영사 시스템을 갖췄다. 스크린은 난민 캠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텐트에 쓰이는 가벼운 소재로 특수 제작했다. 땅바닥이 판판한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도쿄 국제연합대학, 센다이현 마쓰시마 해안공원, 후쿠오카 하버시티, 구마모토현 아마쿠사 온천촌, 사이타마현 우라와프랑스영화제 등 여러 곳을 찾았다.

-이동영화관에서 주로 어떤 영화를 상영했나.

=대지진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많이 왔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할리우드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주로 틀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멋진 인생> (감독 프랭크 카프라, 1946)도 살짝 끼워넣었는데 사람들이 무척 감동받았다.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남자가 자살하려다 다시 살아보자고 결심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 영화를 계속 틀었다.

-관객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

=이동영화관 사업을 할 때까지만 해도 영화를 또 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했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었고. 하지만 영화를 통해 삶의 용기를 얻는 관객을 보면서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

-제작자로서 사건을 겪기 전과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이동영화관을 운영하면서 영화를 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람들은 내게 용기를 주기 위해 <박치기!> <훌라걸스>를 만든 사람이라고 치켜세웠지만 과거에 젖어 있기만 하면 영화를 만들지 못할 것 같았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았고, 되돌아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TV에서 가끔 제작하거나 배급한 영화가 방영되면 채널을 돌렸다. 보고 싶지 않아서. 죽기 직전이라면 모를까. 영화를 할 때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 앞으로 무엇을 할까, 어떤 작품을 만들까라는 생각만 했다.

-2014년 영화사 이름을 스모모에서 레스페로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 사람들이 갈수록 한국영화를 포함해 아시아영화를 보지 않는 게 현실이다. 현재 와세다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20대 학생 100명 중 7명만이 한국영화를 봤고, 100명 중 1명만 중국영화를 본 적 있다고 하더라. 7, 8년 전 와세다대에서 강의할 때만 해도 30명 가까운 학생들이 다른 문화권의 영화들을 챙겨봤었다. 학생들에게 “당신들 인생이 무척 긴데 좋은 영화를 보고 죽는 것과 안 보고 죽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오아시스>라는 영화가 있는데 한번 봐라. 2시간 뒤에 당신의 인생관이 조금은 바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일본영화가 아닌 다른 나라 영화를 본다고 해서 인생관이 쉽게 바뀌진 않지만 세상을 조금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 ‘리스펙트’(존경)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영화를 만들 수 없다. 영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 가진 마음인데 다시 생각났다.

-지난 8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겐 상>(KEN-san)을 제작했다. 배우 다카쿠라 겐을 그린 작품이던데.

=그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인연도 있었다. 물론 함께 작업한 적은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히비 유이치 감독에게서 다카쿠라 겐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도에이가 많이 반대했지만 다카쿠라 겐을 도에이가 만든 스타라고 생각해 겨우 제작할 수 있었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넷플릭스와 함께 제작비 100억원이 넘는 규모의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1945~71년까지의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고아 출신인 두 남자의 20년간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현재 시나리오가 진행 중이다. 총 8부작으로 구성되는데 <박치기!>를 함께 만들었던 이즈쓰 가즈유키 감독이 4편을, 다른 두 감독이 각각 2편씩 연출한다. 그 두 감독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드라마와 영화로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또 <백엔의 사랑>을 만든 다케 마사하루 감독의 신작 <링사이드 스토리>는 편집을 다 끝냈고 내년 여름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수입·배급하고 있는 작품으로는 <변호인>이 지난 11월12일 개봉했다. 송강호씨가 도쿄에 와서 영화를 홍보해줘서 관객의 반응이 좋다. <우리들>과 <동주>는 내년 여름 개봉을 계획하고 있다.

-칸 마켓에 출장가기 전에 유럽 축구를 관전할 만큼 열혈 축구팬이라고 들었다. 축구를 좋아해 <지단, 21세기의 초상>(2006)을 일본에 수입·배급하기도 했고. 어느 팀을 응원하고 있나.

=아스널. 그중에서 메수트 외질 선수를 응원하고 있다. 유럽 리그 중에서 다양한 국적의 선수들이 모인 프리미어리그를 가장 좋아한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8년 전이나 지금이나 패션에 신경 쓰는 건 여전한 것 같다. (웃음)

=아들 둘과 축구를 오랫동안 꾸준히 해왔다. 아이들과 있으면 늙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굉장히 신경 쓰게 된다. (웃음) 함께 축구를 하는 친구들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영화인들도 중요하지만 그들은 영화만 생각하니까… 예전에는 영화밖에 몰랐는데 영화를 잠깐 놓고 나니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화하는 사람들은 다른 업계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봐야 한다. 한번 실수를 해봤으니 앞으로는 좋은 영화들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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