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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랑의 영화비평] <연애담>에서 공간이 가지는 중요성
이미랑(영화감독) 2016-12-08

‘하이퍼 리얼리즘.’ 이현주 감독의 <연애담>을 본 관객의 한줄평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단어의 올바른 쓰임에 대해 논하기보다 유머를 겸비한 이 단명한 감상평에 탄복할 것이다. 이 관객은 영화를 ‘극사실주의’라는 예술 양식으로 읽은 것이 아니다. 겁나 진짜 같았다는 뜻이다. 겁나 진짜 같아서 공감했다는 속내다. 영화를 상찬할 때 ‘보통의’, ‘일상적’, ‘보편적’ 등의 단어가 관객과 비평 지면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도 위의 감상평과 같은 맥락에서다. 에누리 없이 겁나 진짜 같은 이 영화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지질했던 연애를 떠올리고 공감한다. 이 단단하고 고요한 마음의 움직임을 관객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이유를 더듬어보고 싶었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다. 영화의 장르를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멜로드라마가 우리의 연애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미처 하지 못한, 앞으로 하지 못할,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일탈을 포함한 쾌감을 대리만족시켜주는 데 복무한다. 불장난 같은 연애를 꿈꾸는 다수의 관객을 향해, 멜로드라마의 대다수가 공감의 능력보다 상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장난을 넘어 방화 수준의 멜로드라마를 보고도 더 강렬한 자극을 원하는 지금의 관객에게, 한 감독이 멜로드라마를 만들면서 이 상상의 능력을 자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상상을 거둬낸 자리는 공백으로 남겨둘 수 없고, 다른 선택이 필연적이기에 용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랑과 공간의 방정식

놀랐다. 상상을 거둬낸 자리에 ‘너도나도 해봤을 그저 그런 연애’라는 카드를 꺼내는 감독은 드물기 때문이다. 관객이라는 미지의 타인을 공감케 하는 능력은 영화를 연출하고 제작하는 능력과 별개로 삶에 대한 감각과 통찰이 필요하기에 더욱 어렵다. 매끈하게 잘 만든 영화는 늘어나도, 시간의 녹을 먹지 않고 관객의 공감을 사는 영화가 드물어진 탓도 이 감각과 통찰의 빈자리 때문이리라.

이 영화는 공감의 능력을 가졌다. 공감을 이끌어내는 손짓에서 공간이 일임하는 전달력이 가장 세다. 이 영화에서 공간은 미장센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가 아니다. 미장센적 의미로 배경을 넘어선다. <연애담>에서의 공간은 연애의 권력구도를 흔드는 축으로, 두 사람의 연애를 훼방 놓았다가 이어놓기도 한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위협적이고 유동적인 ‘공간’은 윤주(이상희)와 지수(류선영) 커플이 갈구하는 안정되고 안락한 ‘장소’의 개념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윤주와 지수가 동일한 성(性)임에도 그들의 연애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30대 초반 미대 대학원생 윤주가 머무르는 주된 공간은 친구 인영은(임성미)의 아파트에 월세 놓은 방 하나와 대학원 작업실 한편의 간이침대다. 두 공간 모두 윤주의 것이 아니다. 빌린 공간이다.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임시로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88만원 세대의 비루한 주거환경을 시사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윤주를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약자의 입장에 서게 한다. 멜로드라마에서의 약자란 현실과 다르지 않아서 애정을 갈구하는 쪽이다. 자신의 공간이 없으면 왜 약자가 되나. 이는 지수의 공간과 대치되며 분명해진다. 윤주는 고물상과 편의점에서 우연히 만난 지수에게 호감을 느끼고, 지수의 제안으로 지수가 일하는 술집으로 찾아간다. 지수의 공간에 자발적으로 들어선 윤주는 동행한 친구들이 추태를 부리고 술값마저 빚지면서 위축되지만, 지수는 자신의 공간에 윤주가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연애의 출발선에서 강자가 된다. 이 기세를 빌려 지수는 윤주를 자신의 집으로 들인다. 주방이 분리된 원룸형 옥탑에 살고 있는 지수는 윤주와 다르게 당돌하리만큼 단단한 자아를 표현한다. 옥탑은 지수의 공간, 지수의 것이다. 그곳에는 윤주를 취하게 할 와인도 있고, 분위기를 북돋울 조명과 초가 있으며, 동침할 수 있는 침대가 있다. 하지만 윤주에겐 이 모든 것이 없다. 공간이라는 물질의 결여가 관계의 축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인상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두 사람이 멀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지수가 아버지(김종수)가 있는 인천의 본가에 들어가면서다. 서울-인천이라는 물리적 거리가 심리적 거리와 비례할 것이라는 불안에 더욱 취약한 쪽은 여전히 윤주다. 지수가 인천으로 공간을 옮기면서 지수만의 공간이 사라졌음에도 지수는 더욱 강건하게 강자의 입장을 고수하는데, 숙맥인 윤주와는 달리 연애의 유경험자로서 지수는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공유하고 있는 본가라는 공간은 윤주와 식사를 하고 동침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데, 그럼에도 강자의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선 방어기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수는 인천으로 오기를 마다하지 않는 윤주를 데리고 한겨울 길거리와 호프집으로 나돌고,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모텔마저 빠져나와 방어기제의 날을 세운다. 윤주가 있는 ‘서울’의 모텔이 아니라, 모태신앙을 가진 반듯한 중산층의 자녀로서 지수가 있는 ‘인천’의 모텔이라서 이 방어기제는 유효하다.

너와 내가 겪은 연애

이쯤 되면 두 사람의 연애를 방해하는 궁극적인 장애물은 물리적 거리도, 결혼을 재촉하는 지수 아버지도, 윤주의 커밍아웃에 난색을 보이며 눈도 마주치지 않는 룸메이트도 아님을 알게 된다. 두 사람에게 닥친 가장 큰 난관은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두 사람의 육체와 음성이 나돌거나 튕기지 않고 안정되게 머무를 수 있는, ‘부유하는 공간’을 넘어선 ‘안정적인 장소’가 부재하는 데 있다. 여기서 장소란 집 같은 주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로 이런 장면이 있다. 지수는 아버지의 권유로 소개팅을 한다. 지수와 남자가 만나는 공간은 카페도 레스토랑도 아닌 남자의 차 안이다. 남자와 지수는 영화 속에서 두번 만나는데, 둘 다 남자의 차 안에서다. 이런 가정을 해본다. 만약 지수와 윤주에게 차가 있다면 두 사람의 연애가 조금은 수월해지지 않았을까. 볼품없는 중고 소형차라도 상관없다. 이때의 차란, 풍요로움이나 편이성을 담보하는 재물의 성질이 아니라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둘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안락한 장소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연애의 권력구도에서 약자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윤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유일하게 강자가 된다. 이 장면의 공간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윤주가 처음으로 소유하게 된, 윤주만의 공간인 옥탑방이다. 지수는 윤주의 공간인 서울로 찾아오고, 막차가 끊어져 윤주의 옥탑방으로 가게 된다. 이때 지수의 행동은 마치 잘 보이려는 어린아이처럼 윤주의 방 안을 둘러보며 이것저것 물을 정도로 과잉되어 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한 윤주는 보고싶었다며 자신에게 안기는 지수로부터 처음으로 제 마음을 선택할 수 있는 처지가 된다.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윤주의 공간으로 지수가 입성했을 때 윤주가 약자의 입장에서 벗어나는 모습은, 앞서 지수의 공간에서 내몰리던 윤주의 모습과 대치를 이루며 시리게 공명한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를 적지 않게 보고 그 사랑의 장애물을 일정 학습해온 관객에게, 이 영화에서 공간이라는 장애물은 분명 비껴난 답안지다. 기존의 영화들처럼 인물이 정체성을 고민하여 주변과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가지도, 사고처럼 닥친 연애를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공표하면서 스스로가 된다는 결론도 짓지 않는다. 윤주와 지수의 문제는 너와 내가 연애하며 겪었던 문제와 다를게 없다. 사랑하는 상대가 머무르는 공간에 내가 갔을 때, 한없이 작아지는 나에 비해 상대가 한없이 커지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연애에서의 공간이란, 육체가 놓이는 자리가 아니라 언제나 제 마음이 무게를 가늠해야 하는 저울의 자리였음을 우리는 알고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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