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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김혜리 기자의 제46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다이어리
김혜리 2017-02-15

제46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가 지난 2월5일 축제의 막을 내렸다. 세계 독립영화의 재능을 발굴·육성하고, 미래지향적 실험과 간과된 역사를 조명하는 작업을 정체성으로 삼는 로테르담국제영화제는 언제나 가장 반권위적이고 세계 시민주의적 입장에 서 있었지만 올해는 유난히 그 색이 선명했다. 전통의 영화제 마스코트인 호랑이를 다양한 목소리와 감수성이 섞이고 소용돌이치는 천체로 해석한 구체 상징물이 웅변하듯, 올해의 로테르담은 국가주의와 우파의 득세, 양극화가 휴머니티를 위협하고 있는 현실에 대응해 11일 동안의 축제를 시네마의 역할과 잠재력을 믿는 관객과 영화인이 연대를 확인하고 토론하는 소행성으로 만들었다. 뜨거운 현안을 파고든 블랙 시네마 섹션과 벨라 타르와 배리 젠킨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마스터클래스가 높은 관심을 모은 가운데 로테르담 특유의 난이도 높은 프로그램에 연인원 31만4천명의 관객이 몰려 주최쪽을 고무시켰고 상영작 관객 만족도 평균이 5점 만점에 4점을 상회하는 역대 기록을 세웠다. 이 와중에 내용도 형식도 ‘펑키’한 정윤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밤섬 해적단 서울 불바다>는 전체 상영작 중 무려 관객투표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 로테르담 관객의 취향을 방증하기도 했다(결국 관객상은 <문라이트>가 차지했다). 2017년 타이거 경쟁부문의 트로피는 인도영화 <섹시 두르가>에, 주목할 만한 미학적 도전을 보여준 경쟁작에 주어지는 심사위원 특별상은 칠레에서 온 <레이>에 돌아갔다. 다음은 플래닛 로테르담을 방문한 기자의 열흘간의 일지이다.

벨라 타르 전시 <세상 끝까지> 중 ‘키친’ 전시실.

01.26

고작 이틀 늦는데 대단한 보석을 놓치겠느냐는 배짱으로 영화제 첫 주말을 중심으로 일정을 짠 내가 건방졌다. 하루 차이로 로테르담국제영화제가 준비한 벨라 타르 감독의 마스터클래스를 비껴간 것이다! 그러나 시네마의 신이 굽어살피사 영화제와 연계해 암스테르담 아이(EYE) 필름 뮤지엄(<씨네21> 929호 참조)에서 진행 중인 벨라 타르의 전시회 <세상 끝까지>(Till the End of the World)를 관람할 수 있었다. <토리노의 말>(2011)을 마지막으로 “영화로 하려는 이야기를 다 마쳤다”며 연출 은퇴를 선언한 벨라 타르가 이제 와서 생애 첫 전시를 연 동기는, 난민들의 사진을 철조망과 함께 설치한 제1 전시실부터 분명해 보였다. 타르의 조국 헝가리는 유럽에서도 앞장서서 이민과 난민, 불법체류자에게 문을 닫았다. 전란과 굶주림에 쫓겨 밀려온 국경에서 재차 내몰리는 인간의 얼굴들. 그 얼굴들이, 역사의 벼랑이, 이 은퇴한 노장에게 다시 에필로그를 쓰도록 만들었으리라. 제2 전시실에 들어서면 삶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느끼는 이들이 경험했을 광풍이 거대한 방 한쪽 강풍기로부터 헐벗은 나무를 흔들며 불어닥친다. 바닥의 토양이 날리고 조명이 새기는 나무의 앙상한 그림자가 떨리는 방을 가로지르는 동안 관객의 눈은 스스로 벨라 타르의 기나긴 트래킹숏을 찍게 된다. 세 번째 전시실부터는 벨라 타르의 영화 일부와 실제 소품으로 연출한 인스톨레이션이 이어졌다. 말하자면 고향에서도 ‘난민’과 같은 궁핍과 고독을 감내하는 인간들의 파노라마다. ‘키친’이라 명명된 방은, <토리노의 말>에서 부녀가 감자를 먹던 식탁과 의자가 그대로 설치돼 전시실을 곧장 영화 속 종말의 오두막으로 만들었다. ‘서곡’이라는 제목의 갤러리는 <댐네이션> <베르크마이스터 하모니> <사탄탱고> <토리노의 말>의 기적적인 원테이크 오프닝 시퀀스들을 네개의 스크린으로 상영했다. 의자 아래 스피커에서 올라오도록 디자인된 사운드는 벨라 타르의 비전을 감상 이전에 체내에 들이도록 만들었다. <세상 끝까지> 전시 가운데에는 예전에 못 본 작업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로비 뮐러가 촬영한 <유럽의 비전>의 프롤로그다. 뮐러의 카메라는 급식소 앞에서 정오의 빵 한 덩이 배급을 기다려 길게 늘어선 남녀의 단단한 얼굴을 천천히 훑어나간다. 마침내 화면이 급식소 창구에 이르면 창문이 열리고 배급이 시작된다. 영화는 마지막 한명이 한끼 식사를 받아들 때까지 지켜보고 엔딩 크레딧에 그 모든 노동자, 룸펜들의 이름을 천천히 올린다. 그것이 전부다. 켄 로치가 장편 드라마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호소한 이야기를, 벨라 타르는 단 몇분 동안 그렇게 말없이 했다. 그러나 작품 밖의 벨라 타르는 침묵과 거리가 멀었다. 전시회장 출구 벽에 새겨진 벨라 타르의 ‘작가의 말’은 인간된 품위를 탐욕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하는 긴급함으로 거의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출구 코너에 틀어놓은 과거 인터뷰 속에서 벨라 타르는 “당신은 염세주의자인가?”라는 질문에 쓸쓸히 미소 지으며 “염세주의자는 영화 같은 것을 만들지 않는다”고 답하고 있었다.

<날>(Raw)

01.27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40분 걸려 로테르담에 도착했다. 올해도 중앙역 광장에서 시의적절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하는 영화제 상징물이 환영해준다. 부산역으로 치면 택시 정류장에 해당하는 지척의 영화제 본부 건물 데 돌렌(De Doelen)에서 셔틀 승합차를 타고 첫 영화 <양 살해자>(Killer of Sheep, 1978)의 상영관으로 향했는데 하마터면 상영에 늦을 뻔했다. 십수년간 자원봉사를 해왔다는 수송팀 할아버지께서 한국인들과 사업한 추억을 들려주시며 본인이 평생 제조한 선박 인양용 와이어에 대한 설명에 돌입하셨기 때문이다(나는 서울에서도 택시 기사님들의 대화 상대로 인기 있는 편인데 어느 해 명절에는 아들과 한번 만나보라고 명함을 받은 적도 있다). 와이어 공장을 견학시켜준다는 약속까지 받고 뛰어올라간 극장에서 관람한 <양 살해자>는, 스파이크 리 이전의 블랙 시네마 기수 찰스 버넷의 초기작으로 2000년대 후반에야 복원 개봉된 영화다. 제목대로 영화는 범죄의 유혹을 물리치며 양 도축장에서 건실히 일하지만 영혼을 갉아먹는 노동의 성격 때문에 가족과 소원해지는 남자, 그리고 그 이웃과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일상을 그린다. 어른들이 삶에 실망하고 지쳐가는 동안, 아이들은 공터에서 천진하게 뛰어논다. 그리고 부모와 비슷한 인생을 향해 다가간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중심에 선 영화가 블랙스플로이테이션 무비 아니면 정치성 강한 영화뿐이던 시대에, UCLA 영화과 졸업반 학생 찰스 버넷은 자기 이웃의 일상을 찍었다. 상영이 끝나자 놀랍게도 찰스 버넷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에 나섰다. 5분이 지나지 않아 나는 그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젊어 보이는 이유가 야구 모자가 아니라 몸에 밴 겸양과 호기심임을 알 수 있었다. “70년대 당시 영화과의 인기 테마는 성 해방과 히피 문화였지만 그건 나의 현실이 아니었다. 걸핏하면 흑인 청년들은 경찰서에 끌려가 맞고 계단에서 넘어졌다는 설명과 함께 풀려나왔다. 동네 경찰서에는 계단도 없었다! 반면 노예제를 경험하고도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의견을 가진 이웃도 많았다. 나는 내 정치적 견해를 보태지 않은 채 흑인 공동체의 현실을 옮기고 싶었다.” 마치 다르덴 형제의 출발이 그랬듯, 개봉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만들었다는 버넷의 <양 살해자>는 미국 인디의 고전이 되었다. 영화제 본부로 돌아가는 승합차의 옆자리에 버넷 감독이 불쑥 올라탔을때 나는 펄쩍 뛸 뻔했다(의전 차량도 있을 텐데!). 습관대로 머릿속으로 질문을 뽑으려는 순간, 뒷자리에 앉아 있던 뉴욕대 영화과 졸업생 일행이 존경하는 선배와 열렬한 상담을 시작했다. 영화제라는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좋을지, 관습적 이야기 구조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경제적으로 독립영화를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15분간의 동행 내내 찰스 버넷은 동등한 동료의 태도로 젊은이들에게 답하고 반문했다.

<디스 이즈 아워 랜드>

01.28

내게는 영화제 징크스가 하나 있다. 심사숙고해서 영화를 고르고 나면, 내가 극장에서 견디기 어려워하는 동물에 대한 잔혹 행위 장면이 튀어나온다는 슬픈 이야기다. 제목이 전혀 은유가 아니었던 어제 영화 <양 살해자>에 이어, 오늘은 수의대에서 기계에 묶여 달리기 실험을 당하는 말을 지켜보아야 했다. 문제의 영화는 2016년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호러 무비의 테마를 빌려 10대 소녀의 고독과 성적 눈뜸을 그린 어두운 성장영화”라는 평과 더불어 국제비평가협회상을 탄 줄리아 뒤코르노 감독의 <날>(Raw)이다. 토론토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앰뷸런스가 출동했다는 뉴스가 있었고, 프랑스어 대사에 네덜란드 자막만 제공되는 난감한 상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프랑스 영화인으로부터 추천받았다고 박찬욱 감독이 언급한 기억이 나 택했다. 같은 해 태어난 <부산행>과 우연히도 놀랄 만큼 유사한 오프닝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채식주의자 수의사 부모 가정에서 자라 역시 수의대에 진학한 소녀 저스틴이, 토끼 내장을 먹고 동물 피를 뒤집어쓰는 강압적 신고식 이후 경험하는 존재론적 변이를 짓궂은 표정으로 따라간다. 영화에서 내가 목격한 가장 끔찍한 가려움증, 눈동자 키스, 비키니 왁싱 장면을 주먹 부르쥐고 통과하고 나면, 성인이 되는 과정은 10대들의 예상과 달리 삶의 통제력을 강화하기는커녕 시스템의 요구와 욕망에 통제력을 내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대사와 자막을 이해하지 못하는 조건은 영화를 즐기는 데에 결정적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한편 네덜란드어 및 영어를 제외한 제3국어 영화의 일반 상영에 네덜란드어 자막만 제공하는 로테르담의 관행은 저녁 술자리에 모여 앉은 게스트들의 단골 성토 대상이었다. 일반 관객은 대다수 현지인이고, 프레스 및 영화산업 관계자 상영과 비디오 시사에는 반드시 영어 자막이 제공 되며, 각종 토크와 이벤트는 모두 영어로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로테르담국제영화제이지 네덜란드영화제가 아니잖아! 영어 자막 못 읽는 네덜란드 관객이 누가 있다고!” 영어를 공용어로 국제영화제를 진행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힘든 나라에서 온, 나를 포함한 몇 사람이 “호의를 권리로 여기는 건 아닐까?” 소심히 주저하는 동안, 동석한 네덜란드인들은 매우 미안해하며 시정을 약속하고 있었다. 자국영화 프로모션 요구를 단호히 방어하며 국제적 문화행사로서 정체를 사수해온 영화제니까 볼 수 있는 풍경일 것이다.

<양 살해자>

01.29

“이 나라는 우리의 나라다.” 2016년 언론이 예상치 못한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겪으며 귓가에 쟁쟁해진 슬로건이다. 루카스 벨보 감독의 <디스 이즈 아워 랜드>(Chez Nous)는 오늘 월드 프리미어를 갖기도 전에,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비난을 받아 화제가 됐다. 덕망 높은 성실한 간호사 폴린을 시장 후보로 영입해 대외적으로는 포퓔리스트 전략을 구사하면서, 뒤로는 네오 나치와 손잡는 극중 프랑스 우파정당이 마린 르 펜이 이끄는 국민전선을 악의적으로 빗댔다는 이유였다. 진보적 68세대 아버지를 포함해 주변의 모든 사람을 부지런히 돌봐온 폴린은 15년간 투표 한번 하지 않은 정치 냉담자이지만, 너처럼 열심히 일하고 국가를 지탱하는 동료 시민이 혜택받는 사회를 만들어보라는 우파정당의 권유에 설득돼 정치에 입문한다. 극중 우파정당의 캠페인 요령은 절묘하다. 예컨대 그들은 ‘하류인생’ , ‘뜨내기’ 같은 표현은 쓰되 특정 종교와 인종을 지시하는 단어는 피해 이민자, 소수자 시민마저 본인이 배척당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이 당의 민족주의자들이 “불순한 피가 우리의 땅을 적시게 하라”고 프랑스 혁명가 <라 마르세예즈>를 합창할 때 그것은 자유, 평등, 박애의 노래이기를 그치고 협박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정작 <디스 이즈 아워 랜드>가 시의적절하고 흥미로운 진짜 까닭은, 브렉시트나 트럼프 승리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인구 절반을 타자화하지 않고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영화라서였다. 루카스 벨보는, 진보적 엘리트를 향한 반감과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발생하고 정당화되는지 ‘그들’의 자리에서 보여준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찬성표를 던진 사람이 없는데 왜?”라는 물음을 품어봤다면 <디스 이즈 아워 랜드>는 볼만하다. <토니 에드만>이 그러하듯 이 영화는 유럽에서 보수적 기성세대와 반항아 자식세대의 갈등이라는 틀이 정확히 물구나무선 현실을 반영한다. 딸의 우파정당 후보 출마 소식에 아버지는 2대에 걸친 신념과 계급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분개하지만 딸에게는 공허한 꽃노래일 따름이다. 21세기 세계의 정치적 동력은 슬프게도 이상과 신념이 아니라 내 걸 빼앗긴다는 공포와 염증이다. 만들어지는 데에 2, 3년이 걸리는 매체인 영화가 이처럼 현재진행 중인 사회 이슈를 정확히 건드리는 현상은 매번 놀랍다. 아마 예지몽의 원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요컨대 사태가 가시화되기 전 사회의 공기 중에 떠도는 징후가 꿈/영화의 재료가 되고 완성될 무렵에는 현실로 결정(結晶)되는 것이다.

‘종말론’의 그늘은 저녁 영화인 콤 매카시 감독의 <멜라니: 인류 최후의 희망>(Girl with All the Gifts, 이하 <멜라니>)까지 연장됐다. 2016년 부산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된 이 작품은 국내 수입사도 있는, 영화제 기준으로는 구작(舊作)이지만, 인류가 쌓아올린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위기에 내몰린 최근의 세계에서 좀비물이 갖는 참신한 잠재력을 증명하는 예로 나무랄 데 없었다(비록 고양이의 희생이 등장해 나의 징크스를 굳혔지만). <멜라니>의 주인공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체에서 태어나, 생존한 인간들에 의해 백신의 재료로 사육되고 있는 반인 반좀비 어린이다. 어린이와 몬스터의 조합은 한끗 차이로 클리셰로 떨어지거나 참신한 감흥으로 도약하는데 이 경우는 후자다. 탁월한 지성을 가진 소녀 멜라니로 분한 세니아 나누아, 그리고 한동안 궁금했던 글렌 클로스의 연기도 멋지다. 그러나 무엇보다 <멜라니>는 세상을 구원하는 프로젝트가 과연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족의 생존에 달려 있는지, 휴머니티의 지속이 오히려 관건이 아닌지 질문을 바꾼다는 점에서 파문을 남겼다.

<안토니오 하나, 둘, 셋>

01.30

영화제란 주로 실내 행사지만, 멀리서 짐을 싸들고 찾아간 관객에게 날씨는 만족도를 좌우하는 중대한 변수다. 아무리 영화를 좋아한들 체코 전위 영화와 눈보라의 조합이 며칠간 계속되면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올해의 로테르담 하늘은 친절하다. 평균 기온 면에서는 얼어붙은 서울이 그립지 않았으나, ‘밝은 미래’ 부문에 출품된 포르투갈영화 <안토니오 하나, 둘, 셋>(Anto′ nio Um Dois Tre⋎s)은 북촌과 서촌을 불현듯 그려보게 했다. 레오나르도 무라마테우스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제목이 안내하듯 안토니오라는 청년이 사회 입구에서 머뭇거릴 시기에 겪는 며칠 동안의 경험을 세 가지 버전으로 들려준다. 1부의 안토니오는 엄한 아버지와 같이 살기 답답해 스스로 쫓겨날 빌미를 만든다. 계획이 성사돼 마침내 쫓겨나는 청년의 빙구 웃음이 일품이다. 영화의 세 챕터는 시제나 인과로 연결돼 있지 않다. 다만 동일한 배우가 연기하는 동일한 이름의 아버지, 연인, 새로운 여자친구, 이웃이 다른 처지에서 만나 다른 에피소드를 만든다. 이를테면 1부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동작이 2부의 연극 속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1부에서 러시아로 가는 여자가 3부에서는 러시아로 떠나는 식이다. 동일한 재료로 조합을 달리한 청춘영화 모음집인 <안토니오 하나, 둘, 셋>의 작법은 “이베리아반도의 작은 홍상수”라는 별명을 자연 떠올리게 했는데, 영화제의 포르투갈 프로그램 어드바이저인 메르세데스 마르티네즈 아바르카 역시 흔쾌히 동조했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무라마테우스 감독은 오직 안토니오라는 인물만 갖고 출발해 스탭과 배우들을 모은 다음 그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챕터를 찍고 6개월간 편집한 후에, 다음 챕터를 쓰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궁극적으로 장편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고 했다(어딘가 귀에 익지 않은가?). “이 영화는 인생의 여러 잠재력에 관한 이야기다. 저예산영화라기보다 무예산영화인데 난 워낙 손에 잡히는 주변의 모든 것을 이용하고 친구들과 빌린 물건으로 영화를 만드는 데에 익숙하다!” 청년 감독의 말투는 너무도 해맑고 쾌활해, 거금의 제작비라도 건네면 화들짝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질칠 기세였다.

<매니페스토>

01.31

가장 다채로운 영화와 가장 단조로운 영화를 나란히 본 1월의 마지막날이다. 율리안 로제펠트 감독의 <매니페스토>는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악기로 연주한 12개의 바리에이션이다. 이 카멜레온 같은 디바 배우는 남성 노숙자부터 러시아계 안무가에 이르기까지 13명의 인물로 변신해 각 인물에게 어울리는 상황 속에서 각기 특유한 억양과 화법으로 독백한다. 그 내용은 20세기의 아티스트와 사상가들이 남긴 예술에 관한 50개 이상의 다양한 선언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발터 베냐민, 앙드레 브르통, 짐 자무시, 플럭서스, 도그마95 등이 남긴 어록이 블란쳇의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그 형식은 추도사, 식탁의 기도, 초등학교 수업, 무용 연출 등 다양하다. 말의 내용과 형식을 분리시키되 형식에 맞게 관념적 문장을 발화하는 난이도 높은 연기의 쇼케이스인 셈이다. 잘 감이 안 온다면 이런 그림이다. 블란쳇이 스튜디오에서 익숙한 <CNN> 앵커의 말투로 “케이트 기자, 그러니까 컨셉 아트는 아이디어가 좋아야 성립한다는 거지요?” 하면 우비를 입은 또 한명의 케이트 블란쳇이 기상캐스터의 화법으로 “예, 그렇습니다. 개념 예술은…”이라고 대꾸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초등학교 교실의 블란쳇은 분단 사이를 거닐며 “아니, 화면 밖 음악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빌리”라고 도그마 선언을 바로잡아준다. 단연 내가 본 가장 아티스틱한 블랙코미디인 이 영화에 대해 상영관에서 마주친 비디오 에세이스트 케빈 B. 리는 “얼마 전 베를린의 갤러리에서 12개 선언을 다수 스크린에서 동시에 영사한 전시회를 봤는데, 장편영화판이 훨씬 낫다. 적어도 하나씩은 제대로 들을 수 있으니까”라고 만족을 표했다. 국내에서는 어떤 전시회 혹은 영화제에서 볼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반면 오늘의 마지막 영화 <나는 올라간다>(I’ m Coming Up)는 더이상 단순해질 수 없는 한줄의 직선- 정확히 말하면 나선- 으로 그어진 영화였다. 팅 민웨이 감독은 1970년대 지어진 싱가포르의 거대한 복도식 주상복합 아파트 한곳을 선택해 1층부터 21층까지 복도를 따라 89분에 걸쳐 카메라를 움직인다. 새벽 시간이라 화면 안에 움직이는 존재는 길고양이 아니면 영화 후반에 마주치는 등굣길 초등학생- 싱가포르 어린이들의 생활도 꽤나 고되다- 정도다. 따로 녹음, 믹싱된 사운드트랙은, 주거단지에 들려오는 건물 내외의 생활소음과 대화, 음향을 조합해 유령영화의 그것에 버금가는 긴장감을 시종일관 빨랫줄처럼 유지한다. 마침내 당도한 21층에서 다시 한층씩 내려오지 않은 데에 안도한 인내심 많은 관객 앞에 나선 팅민웨이 감독은 “영화에서 보통 백그라운드로 쓰이는 건축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인간적이고 정서적 차원을 제거하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했다”라며 싱가포르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것 같은 아파트는 과거 계층 상승의 희망을 독려하는 구조물이었다고 덧붙였다. 말하나마나 건축영화제에 추천할 만한 영화다. 나는 스테디캠 기사- 단일 테이크는 아니라고 감독이 털어놓았지만- 의 초인적 노고와 프로그래머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02.01

올해 로테르담에서 본 영화 가운데 딱 한편만 추천하라고 누군가가 청한다면 돌려줄 대답을 오늘 얻었다. 타이거 경쟁부문의 브라질영화 <애러비>(Araby)는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의 한 단편에서 제목과 정서를 가져온다. 조이스의 <애러비>는 친구 누나를 동경해 그녀를 위한 선물을 구하려는 소년이 꿈꾸던 바자회에 도착하지만 상점들은 이미 문을 닫고 조롱하는 현실과 맞닥뜨리는 내용이다. 알폰소우초아와 호안 뒤만스 감독이 공동 연출한 영화 <애러비>는 평생 충분히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근심하며 손발이 닳도록 노동한 한 남자의 수기다. 알루미늄 공장 사고로 한 노동자가 숨지고, 그의 짐을 챙기러 온 마을 소년이 한 권의 노트를 발견하면서, 영화는 크리스티아노라는 남자의 고단한 로드무비와도 같은 생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톤은 네오리얼리즘에 가깝고 음악과 풍광은 서부극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젊은 날 우발적 절도로 옥살이를 한 후 출소한 크리스티아노는 오렌지 농장 인부, 화물 하역, 금속 공장을 전전한다. 거쳐온 많은 일터 중 한곳에서 연극 클럽에 가입했을 때 남자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남자의 잠자리를 염려하자 그는 답한다. “내게 잠은 대단치 않아요. 골판지, 땅바닥, 의자, 곡물 자루, 돌 위에서 잤어요. 서서 자기도 했어요.” 사랑과 행복도 남자를 스쳐가지만 그 시간은 장구한 노역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다. 크리스티아노와 동료 노동자들의 인생 감각은 몇몇 대화로 함축된다. 부두에서 일하던 어느 날 크리스티아노는 늙은 인부와 어떤 짐이 가장 나르기 힘든지 논한다. “시멘트가 최악이야.” “아니지. 살아 있는 돼지가 더해. 소금도 살을 파고들어서 나빠.” 잠시 둘은 감자와 커피 원두, 생선처럼 등에 져나르기 좋은 화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자리를 소개한 친구가 부당 해고된 공장에 홀로 남아 귀를 찢는 소음 속에서 일하던 크리스티아노는 어느 날 허리를 펴고 노동을 멈춘다. 그리고 갑작스럽고 열렬한 충동을 느낀다. “나는 마치 늙은 말과 같다. 머리도 허리도 아프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기계를 멈추고 집으로 가자고, 원할 때 낮잠을 자고 물을 마시자고 외치고 싶다.” 쿵, 쿵. 순간 육중한 모루가 영화를 보는 나의 명치를 쳤다. 크리스티아노의 죽음은 사고일까? 설령 자살이라 해도 그것을 타살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노동의 소외를 바라보는 <애러비>의 시선은 고전적이기까지 하지만 2017년의 세계를 뒤덮은 고통의 속성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불이 켜진 후에도 이 고요하고 통렬한 영화를 떠나는 일은 몹시 곤욕스러웠다.

02.02

이번 로테르담 여정의 마지막 이벤트는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마스터클래스였다. 초기작 <차가운 물>부터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까지 선택된 장면과 함께 그의 방법론을 해설하는 대화형 강연이었다(마스터클래스 내용은 다음주 <씨네21>에 실린다.-편집자) 단 10분의 질문 시간이 남았을 때 극장을 꽉 채운 팬들은 영화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 아사야스에게 물었다. 1968년 혁명 이후 실망을 맛본 1970년대에 대한 영화를 다수 만든 감독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현재의 상황이 70년대보다 훨씬 나쁘다”고 대답했다. “모두가 최대한의 정치 의식을 가져야 할 때다. 시위도 중요하지만 쏟아지는 정보를 지적으로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다가올 몇년은 어느 때보다 개인이 중요한 시대라고 본다. 그리고 나는 개인에게 신뢰가 있다.” 아사야스는 왜 영화 질문을 하지 않느냐고 물리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올해 ‘플래닛 로테르담’에서 만난 어떤 감독, 영화학자, 프로그래머, 관객 질문자도 영화와 세계의 현황을 갈라 발언하지 않았다. 당연히 반문명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욕망이 ‘정파’의 기치 아래 복귀하고 물리력을 갖게 될 때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탐구하는 예술은 저절로 ‘당파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모두가 은연중에 알아차리고 있어서일 것이다.

사진제공 로테르담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