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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박홍열의 <가리베가스> 김선민 감독을 추모하며
박홍열(촬영감독) 2017-05-03

감독 김선민 / 출연 이윤미, 정대용 / 제작연도 2005년

‘내 인생의 영화’ 원고 청탁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가리봉’이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가 일하셨고, 내가 중학교를 다녔고, 첫사랑을 만났고, 서른 남짓까지 들락날락했던 동네가 가리봉이다. 성장기 동안 그곳에서 봤던 풍경과 기억들은 영화가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도구라는 믿음을 갖게 해준 이미지이자, 내가 영화를 하는 이유다. 원고 청탁을 받은 다음날 김선민 감독의 부고를 받았다. 내 기억 속의 가리봉과 <가리베가스>의 이미지들을 떠올리고 있던 차라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단편영화 <가리베가스>는 새로운 것에 밀려 가리봉 쪽방을 떠나는 노동자 선화와 그 자리를 메우며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 안에서 무력하게 사라지는 삶을 보여준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영화에 빚을 지고 있다.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영화인으로 지향한 삶을 망각하고 생활인으로서 영화 일을 하고 있던 나에게, <가리베가스>는 내가 인생에서 ‘영화’를 선택한 이유를 명징하게 상기시켜주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너무 익숙한 풍경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그 익숙한 것들이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가오면서 또 다른 풍경들을 만들고 있었다.

카메라는 정직하다. 만드는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카메라는 만드는 사람의 태도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2006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김선민 감독이 이야기했듯, 가리봉의 골목은 카메라를 어느 곳에 놓아도 그림이 된다. 그러나 <가리베가스>의 카메라는 쪽방을 떠나고 싶지 않은 듯 집 안에 머무른다. 떠나가는 선화를 지켜보고 변해가는 가리봉을 지켜본다. 이사 가는 방 안을 깨끗이 청소하는 선화에게 이삿짐 아저씨는 청소하면 재수 없다고 하며 신발을 신고 들어선다. 카메라는 지저분해진 방 안을 다시 닦는 선화를 지켜본다. 새로 이사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쪽방 생활 안내 편지를 남기는 선화. 영화의 마지막, 가리봉을 떠나는 선화의 아쉬운 표정과 선화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선화의 얼굴과 교차해서 보여준다. 카메라는 그림이 될 공간들이 아닌 선화가 남기고 간 낡은 냉장고, 하수구 냄새를 막기 위해 수챗구멍을 막아놓은 테니스 공, 방 안 햇볕을 가리는 녹색 블라인드를 정직하게 담아내어 세상을 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과 치열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에 대한 믿음을 붙잡고 여전히 고민이 많은 나에게 다시 한번 <가리베가스>가, 김선민 감독이, 대체할 수 없는 부재가 말을 걸어온다. 비슷한 시기에 영화아카데미를 다녔고, 경험은 서로 다르지만 가리봉이란 공간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했다. 같은 영화인으로서 든든했다. 삶도 영화도 치열했던 김선민 감독의 명복을 빈다. 못다 한 그녀의 삶, 그녀의 영화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가리봉에서 피땀 흘렸던 수많은 선화(노동자)들의 애환이 밀리고 밀려서 그냥 사라지는 것 같다’라는 연출의 말을 빌려 약속하고 싶다. 그녀의 삶과 영화는 그냥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박홍열 촬영감독. 2003년 <자본당 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감독 김곡·김선, 2003)로 장편 데뷔. <찌라시: 위험한 소문>(2013), <간신>(2014),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2016) 등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하하하>(2009)부터 홍상수 감독과 꾸준히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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