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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철 편집장] 아벨과 황시목의 이성
주성철 2017-08-11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를 다시 봤다. 이 영화의 미덕은 그야말로 차가운 이성의 드라마라는 데 있다. 변호사 도노반(톰 행크스)이 스파이로 의심받는 아벨(마크 라일런스)과 오랜 시간 마주하면서 인간미에 감화되었거나 무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변호에 힘쓰는 것이 아니다. 첫 만남에서도 그저 가벼운 신상정보만 나눌 뿐, 그 어떤 사적 감정도 끼어들 틈이 없다. 도노반은 ‘반역자라도 변론의 기회는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합법적인 증거로 입증하기 전까지는 무죄다’라는 당연한 원칙에 입각해 그저 법조인으로서의 직분에 충실할 뿐이다. 영화의 바탕이 된 실존 인물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영화에서 그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다. “법 위에 조국 안보가 있다”는 판사 앞에서 도노반은 자신의 그런 믿음이 바로 좌우를 초월한 ‘당연한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최근 빠져들어 봤던 드라마 <비밀의 숲>의 검사 황시목(조승우)도 그랬다. 그는 일체의 사적 감정 없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조사과정 중에 누가 억울해 보이고, 누가 선량해 보이고, 누가 못돼 보이고, 그런 수식어 없이 그냥 현재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정보로만 상대를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감정에 구애 없는 성문법이 그 삶의 가이드라인이다. 동시에 절차를 무시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다. 지켜야 할 절차를 지키지 않아서 배가 가라앉고 사람들이 죽는 거라고 말할 때, 그 어떤 대사와 사건보다 감정적 동요가 일었다. 결국 세상 모든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지름길은 차가운 이성이다.

최근 <군함도>를 둘러싼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10년 동안 이처럼 이성을 외면하는 대중과 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언론이, 하나의 텍스트를 불과 한두주의 시간 동안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 내팽개쳐버린 일이 있었나 싶다(이번호 임수연 기자의 ‘<군함도> 타임라인’ 참조).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가짜뉴스까지 더해져 영화 얘기를 하기도 전에 낭떠러지로 밀어버린 것이다. 거기에는 대기업의 배급과 상영의 수직계열화에 제동을 건 새로운 정부의 구상과도 맞물리면서 개봉 초기부터 대중의 반감이 깊게 겹친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식민사관이니 뉴라이트니 하는 잣대를 <군함도>에 들이대는 황당한 일이 어떻게 벌어졌을까. 류승완 감독과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 부부가 그간 한국영화감독조합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그리고 여성영화인모임의 브레인으로서 일궈낸 성취가 분명 있을진대 그마저 싹 지워져버린 것이다. 좋은 일 했으니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누군가가 왜곡된 얘기를 깃발 꽂으며 전하는 순간 당사자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며 그것이 고착화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뭐랄까, 이성적인 팩트 체크 없이 나는 너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공익제보자를 자처하는 혼란스런 풍경이랄까. 그래서 그냥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할 뿐이다. <스파이 브릿지>에서 도노반이 아벨에게 “전혀 걱정하지 않는군요”라고 묻자, 그는 “걱정한다고 달라질 게 있소?”라며 그저 교도소 내로 그림 그리는 도구를 넣어달라는 부탁만 한다. 영화에서 유독 그림에 집착하는 아벨을 보면서 그저 입을 다물어야겠다, 다른 취미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만 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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