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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범> 허정 감독, "소리에 홀리지 말 것"
이화정 사진 손홍주 2017-08-24

<숨바꼭질>(2013)의 사실적 공포가 준 파장이 컸다. 괴담을 소재로, 도심에 사는 사람들의 공포를 포착한 허정 감독이 다시 괴담에 주목한다. <장산범>은 이미 <숨바꼭질>을 만들 때부터 감독이 주목한 소재다. 부산 장산에 출몰한다는 호랑이 모양의 꽤 디테일한 괴수 목격담은, 가깝게 잡아도 1980년 이후로 막 생겨난 괴담이다. 허정 감독은 사람의 소리를 모사하는 괴생명체인 장산범의 특징을 바탕으로, 한국 공포 장르에서는 자주 취약점으로 일컬어지는 ‘소리의 공포’를 본격적으로 표현한다. 완성도에 있어서 숱한 아쉬움을 남겼던 최근 한국 공포영화들을 떠올린다면 <장산범>은 독특한 소재의 활용, 긴장을 조율하는 전반부의 흡입력,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이는, 주목할 만한 공포영화다. 이 장르에 대해서라면 허정이라는 이름을 믿어도 될 이유가 또 하나 추가됐다.

-<숨바꼭질>의 초인종 괴담에 이어 이번엔 장산범 괴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괴담을 워낙 좋아한다. <숨바꼭질>을 준비하면서 괴담들을 찾아봤는데 한국 괴담이 많지는 않다. 관심을 끄는 괴담도 적고 소비도 많지 않다. 알려진 괴담은 대부분 일본에서 생긴 것들이었다. <장산범> 대신 다른 공포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스포츠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예산 규모가 너무 크더라. 그러던 차에 장산범 괴담을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산범 괴담의 어떤 지점이 영화적으로 매력이 있다고 판단했나.

=장산범 괴담이 비교적 막 만들어진 거라 이 이야기를 새롭게 전개하는 것도 재미가 있겠더라. 호랑이 귀신이 사람 귀신을 내세워서 사람을 유혹하는 설정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익숙한 소리를 듣고 따라갔는데 상대가 다른 사람이면 재밌지 않을까. 소리를 흉내내는 것과 더불어 소리로 홀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감정을 건드린다는 부분을 발전시키고 싶었다. 괴수가 아닌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나오면 기분이 더 나쁘고 공포가 배가될 거 같았다.

-목격담에서 묘사된 ‘하얀 털을 뒤집어쓴 호랑이 모양을 한’ 장산범의 형태를 구현해야 했다.

=장산범 괴담을 접하면서 내 마음에 들고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소리였다. 그래서 괴수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괴수의 형체가 부각되다보면 ‘괴수에게 먹힌다’는 측면이 너무 강해질 것 같더라. 그러다보니 괴수쪽으로의 접근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물론 괴담 속 장산범의 형체를 구현해야 했다. 목소리를 흉내낸다는 점에서, 예를 들어 소녀의 목소리를 흉내낸다면 얼굴에 소녀의 표정이 장산범의 표정에 반영되어야 했다. 그런 지점들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배우 이준혁이 장산범을 연기했다. 기는 듯한 장산범의 동작이 배우의 연기를 통해 구현된다.

=준혁 선배는 <숨바꼭질> 때부터 같이 작업했다. <미스터 고>(2013)에서 고릴라 CG 대행 연기를 하기도 해서 준혁 선배와 이야기하면 장산범의 움직임을 만들어나갈 수 있겠다 생각했다. 상업영화에서는 주로 가볍고 재밌는 역할도 많이 하는 편이지만 독립영화에서는 강한 악역, 인상적인 역할을 많이 했는데 그런 지점을 이번 작품에서 부각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맡은 배역이 무속인 설정이라 실제 그들을 직접 많이 만났고 연구를 정말 많이 하셨다.

-소리를 모사하는 장산범의 설정이 한국 무속신앙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굿판을 벌일 때 주로 원혼의 목소리가 무당을 통해 전달된다.

=무속인들을 보면 의뢰자들의 아픈 감정을 목소리를 통해서 해소해준다. 장산범이 희생자들을 ‘처단한다’기보다 장산범에게 희생자들을 ‘바친다’라는 말이 맞을 거다. 장산범은 실체보다는 기운으로 전해져야 한다고 봤고, 그렇다면 관객을 어떻게 체험하게 만들까를 고민했다. 괴로운 소리들을 쌓아가고, 그 과정을 관객이 같이 체험하는 과정을 만들어나가려고 했다.

-장산범 소리는 어떻게 디자인했나. 장산범이 모사하는 사람의 목소리 말고도 시골 마을에 흔히 있는 공간이 주는 소리, 자연의 소재들이 장산범의 소리에 섞여 있다.

=괴담에서 산에서 마주친 장산범은 범 같은 꼬리를 가지고, 시냇물 소리를 내고 있는 존재였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기 위해 친근한 사람들의 소리를 낸다. 처음에는 일상적인 소리를 내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이상한 소리로 변해가는 그 변주를 두려고 했다. 초반 소리에 희연(염정아)의 집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매미 소리 같은 것들을 더 많이 넣었다. 최대한 일상적인 소리를 통해 공포를 담으려 노력했는데 아주 가깝게는 안 되더라. 가령 제프 니콜스의 <테이크 쉘터>(2011)나 M. 나이트 샤말란의 <해프닝>(2008)에서 기운을 조성하는 바람 소리,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1997)에서 세탁기 소리처럼 일상적인 소리가 주는 공포의 느낌들을 좋아한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사운드들이 여럿 있었는데 다시 찾아보니 내가 생각했던 사운드와는 차이가 있더라. 소리를 만들어내는 게 어려운 과정이었다.

-소리를 컨셉으로 내세우면서는 한국 공포영화 장르에서 과장된 사운드가 주는 부정적인 영향이 늘 지적되어왔는데, 이런 부분에 도전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 같다.

=사람마다 소리의 공포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달라 기준을 잡기가 어렵더라. 누군가에게는 아주 조용한 소리가 더 공포스럽게 다가올 수 있기도 하고, 더 강한 소리에 반응을 하기도 한다. 소위 말해 ‘놀라게 하다’는 것의 효과를 아예 안 주고 갈 수도 없더라. 처음엔 효과를 배제한 사운드로 가다가 점점 더 강해졌다가, 중간 지점 정도로 톤을 맞췄다.

-장산범 괴담을 아이를 잃고 상처입은 한 가족의 이야기와 접목했다. 가족이 서울이라는 도심을 떠나 장산으로 오면서 공포가 시작되고, 그들의 상처도 드러나게 된다.

=어떤 인물이 어떤 소리를 들으면 스토리가 만들어질까 고민하다가 ‘그리움’으로 컨셉을 잡았다. 사랑하는 연인 관계도 생각했는데, 가족(아들)을 잃은 상실감이 극의 전개를 헤쳐나가고 사람들에게 공감도 클 것 같아 희연 가족의 이야기를 발전시켰다. 희연이 가진 상처, 과거가 있고 그걸 가지고 도시를 떠나는 걸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았다. 새로운 공간으로 간 것은, 나는 그 공간에 이미 사는 사람들 이야기보다 그 공간을 따라가는 구성을 좋아한다. 그래야 그 인물을 따라 집중하게 되는 효과가 더 크지 싶었다.

-<숨바꼭질>의 낡은 서민형 아파트 구조가 공포를 만들어냈다면, 이번엔 외딴 마을에 자리한 펜션이 공포를 준다. 새집, 복층구조, 방들이 주는 공포는 <컨저링>류의 공포영화에서 자주 활용되었다.

=펜션 사업을 하려고 왔고, 아직 공사가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설정했다. 미술감독님과 헌팅 때 펜션들을 돌아다니면서 어떤 구조가 재밌을지 고심했다. 어떤 면에서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한편의 전래민담 같은 이야기를 생각했는데, 지금처럼 외딴곳으로 가면 조금 덜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더라.

-문이 열린 화장실 틈새로 새어나오는 공포를 포착했다. 영화의 한 장면만 꼽으라면 이 이미지를 떠올릴 정도로, 공간을 바탕으로 잘 설계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디에 장산범이 있을까, 에 대해 많이 고민했었다. 빛이 희미하게 나오면서 소리를 듣고 걸어가는 장면들이 주는 재미가 있겠더라. 시나리오 단계에서 복층으로 쓴 건 아니었다. 구조를 생각하고 구조에 맞춰서 시나리오를 썼다기보다 이 시나리오를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구조를 생각하면서 배치해나갔다.

-거울을 통해 심리 스릴러의 측면이 강화된다. 희연은 아이를 잃은 후 가족 구성원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결국 장산범을 통해 짓눌려 있던 자책감을 들여다보게 된다.

=사고를 겪은 후 희연의 감정이 다양했을 거다. 죄책감일 수도 있고, 원망일 수도 있고, 미안함일 수도 있다. 인물이 가지고 있는 감정적인 혼란을 다양한 거울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거울 안쪽에서 자신의 숨겨진 감정들이 반영되는 건 그리 낯설지 않은 설정이다. 그런 모티브에서 거울을 떠올렸다.

-동굴과 거울의 공간이 주는 질감을 구현하는 것도 중요했다.

=실제 동굴과 세트에서 진행했는데, 표현이 쉽지가 않더라. 욕심에는 동굴의 크기가 좀더 넓었으면 했고 어둠 역시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동굴 탐사를 소재로 한 공포물인 <디센트>(2007) 정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조명이 어렵더라. 보통 다큐멘터리에서 동굴을 탐사할 경우 인물들이 자체적으로 조명 장비를 장착하고 간다. 그런데 우리 영화 속 인물들은 전문 탐사가가 아니고 휴대폰에서 나오는 정도의 빛을 가진 게 전부인 설정이다. 어둠의 질감을 표현하려면 광원이 있어야 그만큼 효과가 나오는데 그 표현이 조금 아쉽다.

-<장화, 홍련>(2003)에서 열연했던 배우 염정아의 차가운 이미지 대신 막상 캐릭터는 <카트>(2014)에서 염정아가 연기했던 마트 해고노동자 선희처럼 감정선이 뜨거운 지점을 활용한다.

=장르 때문에 다들 염정아 선배를 <장화, 홍련>을 보고 캐스팅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카트>를 본 후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서 나에게는 그 느낌이 더 강했다. 워낙 공포라는 감정을 잘 표현하는 배우다. 예민한 느낌을 갖고 있으면서도 감정을 터뜨려야 하는 부분에서는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희연이라는 캐릭터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부터 염정아 선배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다. 다행히 ‘좋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정말 나는 캐스팅에 운이 있는 것 같다.

-염정아가 중심을 잡는다면, 소녀를 연기한 신린아는 이 영화의 톤을 만들어내는, 발견의 배우다. 드라마에서 주로 ‘눈물의 여왕’ 같은 감정을 표현하던 배우인데 이번엔 미스터리함과 연민을 동시에 자아낸다.

=주인에게 상처받은 강아지의 정서 같은 것들을 생각했다. 사람이 다가오는 걸 무서워하고 한편으로는 안되 보이기도 하고. 희연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아들 준서처럼 보일 수 있어야 했다. 오디션을 많이 봤는데, 린아가 그 다양한 지점들을 다 가지고 있더라. 극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런 대화를 많이 했는데 이 친구가 워낙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더라. (웃음) 자기가 아는 무서운 이야기도 나에게 많이 들려줬다.

-단편 <주희>(2012) 때부터 스릴러, 호러를 연출했다. 장르 연출에 있어 깨닫는 지점이 있다면.

=두 작품 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다보니 좋은 점도 있지만 아쉬운 점도 크다. 이렇게 하면 더 좋겠다 싶은 점도 있는데, 알면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고, 아예 놓치는 부분도 있다. 고민이 많다. 조금 더 이 고민을 이어가야 할 것 같은데. 차기작은 누군가 다른 작가와 손을 맞춰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장산범>이 마케팅 측면에서 호러라는 표현 대신 스릴러로 표방되는 건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한국영화계에서 어느덧 공포영화가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쨌든 여름 블록버스터 시즌에 한국 공포영화가 개봉해 승부수를 던지는 건 오랜만이다.

=시장 상황을 정의내리기는 어렵지만, 장르라는 게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곡성>이나 <검은 사제들> <부산행>처럼 공포의 범위에 들어가는 영화가 흥행이 됐다. 소재도 다양해지고 있고. <장산범>도 호러물로 보기에는 예산이 적지 않았다. 순제작비가 38억원인데 <숨바꼭질>보다 10억원 정도 많았다. 어쨌든 이렇게 만들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차기작도 괴담이 소재인가.

=재밌다고 생각한 괴담이 두개였는데 두 작품을 통해 다 사용했다. (웃음) 만약 그사이에 영화로 발전시킬 부분이 있는 더 재밌는 괴담이 나오면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없다. 색깔은 비슷할 거 같은데, 이번엔 괴담 말고 다른 걸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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