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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하는 영화들①] <매혹당한 사람들>, 우아한 질투에 사로잡히다
임수연 2017-09-04

<매혹당한 사람들>(2017)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돈 시겔 연출,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매혹당한 사람들>(1971)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소피아 코폴라는 “돈 시겔의 영화를 리메이크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며 “1971년 영화는 잊고 원작 소설을 새로운 시각에서 풀어내는 데 집중해” <매혹당한 사람들>을 재탄생시켰다. 2017년작 <매혹당한 사람들>은 46년 뒤 리메이크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완벽하게 설득하고 새로운 매력도 부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가진 독자적인 가치를 개봉에 맞춰 미리 살펴보려 한다.

<매혹당한 사람들>(1971)

남성 중심에서 여성 중심으로

1971년의 <매혹당한 사람들>이 존 맥버니 상병을 연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로 기억된다면, 2017년에 나온 동명 작품은 그 앞에서 각자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세 여자의 이미지로 각인된다. 전쟁의 참혹한 광경을 비추며 시작하는 1971년작 <매혹당한 사람들>은 오프닝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로 이 영화가 남성 화자의 이야기임을 넌지시 알린다. “북소리에 장단 맞춰 예쁜 여성들이여 이리 모여요. 햇빛 속에서 걸어요. 그리고 남자들의 손에 총을 쥐게 하지 마요.” 부대에서 탈출하고 부상을 입은 채 쓰러진 존을 처음 마주하는 소녀, 에이미(파멜린 페르딘)와의 첫 만남에서도 카메라는 남성의 위압적인 체구를 강조한다. 에이미가 13살이라는 말에 “키스할 수 있는 나이”라며 그에게 일방적으로 입을 맞추고, 부대를 떠난 그가 병사들에게 발각될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 역시 1971년작에만 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과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 <섬웨어>(2010), <블링 링>(2013) 등에서 함께 작업했던 프로덕션 디자이너 앤로스는 그녀에게 <매혹당한 사람들>의 리메이크를 권유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남북전쟁 당시 소외되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펼쳐내고 싶었다. 그래서 시나리오 작업 당시 원작 소설을 여성의 시점으로 다시 읽었다”고 전한다. 남성 중심의 이야기는 페미니즘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화두가 된 시대에 시점을 바꾸어 재탄생했다. 시대 배경을 바꾸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권유에도 여전히 설정을 유지한 것은 “당시 여성들은 고상하고 좋은 주부가 되어야만 했고, 그들의 역할은 완전히 남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됐다”(<가디언>)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존(콜린 파렐)이 아닌 에이미(우나 로렌스)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시작하는 2017년작 <매혹당한 사람들>의 카메라는 존과 엮이는 판스워스 신학교 여성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데 훨씬 집중한다. 존이 전쟁터에서 겪은 일을 고백할 때 이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과감히 사라졌다. 드물게 남성 캐릭터가 대상화되는 영화의 촬영현장 분위기를 짐작게 할 만한 유쾌한 에피소드가 있다. 존이 정원 일을 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소녀들이 ‘섹시 캘린더’를 위한 사진을 찍었다는 것. 콜린 파렐은 기꺼이 각종 도구와 함께 포즈를 취해주고 셔츠를 벗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매혹당한 사람들>(1971)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복잡한 감정

1971년작 <매혹당한 사람들>에서 신학교의 교장 마사(제라르딘 페이지)와 교사 에드위나(엘리자베스 하트먼), 당돌한 학생 캐롤(조 앤 해리스, 2017년작에서 엘르 패닝이 연기한 알리시아에 해당하는 캐릭터다)이 서로에게 갖는 감정은 명백히 존을 둘러싼 질투로 보인다. 그들이 존에게 갖는 성적 욕망은 내레이션과 적극적인 행동, 상상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서로의 존재를 의식한다. 에드위나가 존의 몸을 닦아주는 모습을 목격한 캐롤은 “최소한 남자의 몸을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얻었다”고 생각하고, 나머지 부분은 자신이 닦아줄 수 있다는 캐롤의 얼굴을 에드위나가 수건으로 후려친다. 캐롤은 다리 상태도 호전되고 방에서 자유롭게 나올 수 있게 된 존의 근육질 몸을 칭찬하며 먼저 키스를 한다. 마사는 꿈속에서 존, 에드위나와 함께 한 침대에서 뒤엉켜 정사를 나눈다. 감정이 분명하다 보니 존이 마사나 에드위나가 아닌 캐롤의 방을 찾아가는 장면도 보다 자세하게 사연이 드러난다.

<매혹당한 사람들>(2017)

캐롤은 원래 다른 방으로 가려고 고민하던 존을 노골적으로 유혹한다. 반면 <매혹당한 사람들>(2017)의 여성들은 서로에게 갖는 감정이 질투에 국한되지는 않는다고 생략을 통해 보여준다. 안 하던 장신구를 하거나 학교 분위기가 밝게 바뀐 것을 의식하는 장면이 있을지언정, 중대한 그 사건을 제외하면 존과 다른 여자의 애정 행각을 보고 분노하는 장면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존에게 갖는 감정 역시 훨씬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가령 존의 죽음 이후 눈물을 흘리며 그를 사랑한다고 속으로 마음을 고백하는 1971년의 에드위나와 달리, 커스틴 던스트의 에드위나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에이미에게 바느질을 지적한다. “에드위나에게 존은 학교를 벗어날 수 있게 해줄지 모르는 마지막 희망 같은 것이었다.”(<인터뷰 매거진>) 캐롤과 에드위나의 나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 1971년작보다 연령의 차이도 크게 설정함으로써, “에드위나에게는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고. 학교의 모든 여성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혼자 키득키득 웃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존이 우습게 보이는 것은 그래서다.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자만한 남자는, 우아함을 잃지 않는 여성들에 의해 처단된다.

<매혹당한 사람들>(1971)

흑인 노예 캐릭터가 사라진 이유

<매혹당한 사람들>(1971)의 판스워스 신학교에는 흑인 노예 할리(매 메르세)가 있었다. 그는 학교의 원장 마사가 친오빠와 맺었던 관계를 상기시켜 불편하게 하거나, “우리 둘 다 일종의 포로가 아니냐”는 존에게 “난 도망갈 수 있다”며 냉대하는 등 계급 문제를 드러내거나 뒤집는 역할을 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흑인 노예 캐릭터와 계급 문제를 가볍게 다루고 싶지 않아서”(<할리우드 리포터>) 각색 과정에서 제외했다고 말했다. 원작의 풍부한 텍스트가 좁아진 것은 아쉽지만, 대신 관객은 마사와 에드위나, 알리시아에 좀 더 집중하며 세 여인의 감정을 보다 치밀하게 따라갈 수 있다. 그외에도 마사가 오빠 마일스와 사랑을 나눈 일 등 소피아 코폴라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관련없다고 느껴지는 요소는 각색 과정에서 모두 생략됐다.

<매혹당한 사람들>(2017)

콜린 파렐의 아이리시 억양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존과 콜린 파렐의 존 사이에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바로 억양이다. 원작 소설에서 존은 아일랜드 사람이다. 원래 아일랜드 출신인 그의 억양을 부각시킨 것은 단지 소설의 설정 때문은 아니었다. 콜린 파렐을 만난 소피아 코폴라는 연합군 병사이며 남성으로서 여성들에게 이질적인 존의 캐릭터에 그의 이국적인 억양이 잘 어울릴 것이라 판단했다. 또한 소피아 코폴라는 그가 연기하는 존이 “여성뿐만 아니라 게이 남성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매혹당한 사람들>(1971)

그들이 사는 세상

파스텔 톤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이 기묘한 분위기를 낸다는 점에서, <매혹당한 사람들>과 시각적으로 가장 닮은 작품은 1971년작 동명의 영화보다는 차라리 영화 <행잉록에서의 소풍>(1975)이다. 실제로 <행잉록에서의 소풍>은 <매혹당한 사람들>의 제작진이 중요하게 참고한 자료 중 하나였다. 그외에도 존 싱어 사전트의 초상화, 초창기 사진술로 촬영한 다게레오타입의 사진, 윌리엄 이글스턴이 찍은 70년대 젊은 여성들의 사진도 참고자료가 됐다. 로만 폴란스키의 <테스>(1979)나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의 서스펜스도 비주얼에 영감을 줬다.

<매혹당한 사람들>(2017)

이렇게 모인 재료들은 캐릭터들의 감정이 진전됨에 따라 다양하게 배치된다. “존이 처음 등장할 때 이 여성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한결 부드러웠다. 따뜻한 파스텔 톤으로 채워진 세계였다. 하지만 그가 여성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색채는 점차 어두워진다. 색채는 단연코 영화의 분위기를 반영한다.”(앤 로스 프로덕션 디자이너)

남부 고딕 장르의 완벽한 비주얼을 구현해내기 위해 배우들도 특별한 교육을 받았다. 남북전쟁 당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기대를 받고 있었는지 경험하게 하기 위해, 배우들은 뉴올리언스의 프렌치쿼터에 있는 오래된 집에서 독특한 리허설을 거쳤다. 바느질, 요리, 춤 등을 배우고 당시 에티켓을 숙지해 실천하게 했다. 치마를 두손으로 잡으면 안 된다거나 발목이 보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배웠다고 한다.

<매혹당한 사람들>(2017)

새로운 페르소나에 대한 반가움

여성의 역할이 커지고, 그들의 욕망이 더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매혹당한 사람들>은 의미심장하게도 두 여성 영화인의 지속적인 교류로 탄생했다. <매혹당한 사람들>은 커스틴 던스트와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만난 세 번째 작품이다(카메오로 출연한 <블링 링>까지 합치면 총 네편이다). 아역배우 출신 커스틴 던스트의 첫 성인 연기이자 소피아 코폴라에게도 데뷔작이었던 <처녀자살소동>(1999), <마리 앙투아네트>(2006)에 이어 소피아 코폴라는 커스틴 던스트를 또 한번 선택했다. 이른바 남자-남자로 구성된 경우가 많은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라는 조합을 드물게 여성끼리 이룬 점도 흥미롭지만, 두 사람에게는 보다 특별한 신뢰가 있다. 커스틴 던스트는 <버라이어티> 인터뷰에서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할 당시 프로듀서 중 한명이 치과에 가보라고 권유하거나 포스터 속 내 이를 가지런하게 수정하기도 했다” 면서 과거를 회상했다. 하지만 소피아 코폴라는 그에게 “난 너의 이를 사랑한다”고 말해준 아주 쿨한 감독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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