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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줄리엣을 위하여
2002-04-16

시사실/줄리엣을 위하여

■ Story

박사 논문을 준비하는 시몽(로랑 뤼카스)과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엠마(카랭 비야)는 함께 산다. 시몽과 달리 아기를 원한 엠마는 임신 5개월 판정에 행복해 하지만, 기쁨이 식기도 전에 유방의 악성종양을 발견하고 유산을 권고받는다. 포기하지 않고 다른 병원을 찾은 엠마와 시몽은 약물 치료를 계속하며 뱃속의 아기를 키워 제왕절개로 분만한 다음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는 방법을 택한다. 딸 줄리엣이 태어나는 날 유방절제 수술을 받은 엠마.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하기 위해 무균실에 격리된 엠마의 귀에는 시몽이 불러주던 노래가 맴돈다.

■ Review <줄리엣을 위하여>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새벽녘 눈을 뜬 엠마는 베개 위에 빠져 흩어진 머리칼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암 치료약의 부작용이다. 마침 같이 사는 애인 시몽의 잠을 여자 동료의 전화가 깨운다.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엠마는 소리지른다. “그 여자, 머리숱도 많고 가슴도 크겠지?” 바로 미용사를 찾아간 엠마는 아예 머리를 밀어버린다. <줄리엣을 위하여>에는 이런 장면도 있다. 클럽에 놀러간 엠마는 자기도 모르게 처음 보는 남자와 키스한다. 그리고 시몽이 사라진 걸 깨닫는다. 집에 돌아온 여자는 등 돌린 채 누워 있는 연인에게 말한다. “내가 왜 그랬나 모르겠어. 내 모습이 흉한 것 같아서…. 우리가 더이상 섹스하지 않을까봐 당신이 날 떠날까봐 무서웠어.” 남자는 병든 애인의 멱살을 잡는다. “겁먹은 게 너뿐인 줄 아니? 아프다고 네 멋대로 해도 되는 줄 알아?” 다시 얼굴이 보이지 않게 돌아누운 시몽은 가만히 팔을 뒤로 뻗어 엠마를 붙든다.

죽음에 이르는 중병이나 모성애는 인생에서 더이상 절박할 수 없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명제로 취급됨으로써 오히려 판타지에 가까워지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임신 5개월에 악성종양을 발견한 여성의 이야기 <줄리엣을 위하여>는 비탄에 빠지거나 고통에 탈진하는 일없이 마른 눈과 맨 정신으로 병상을 지킨다. 그것은 이 영화가 불행에 대한 하나의 가설이 아니라 솔베이 앙스파흐 감독이 몸소 겪은 체험인 때문이기도 하다. 1988년부터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한 앙스파흐 감독은 애초 병상일기를 초안으로 한 기록영화를 구상했으나 더 많은 사람과 교감하기 위해 극영화 <줄리엣을 위하여>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치료과정과 감정의 추이, 대화와 침묵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눈과 귀는 여전히 다큐멘터리의 그것이다. <줄리엣을 위하여>에서 엠마의 암은 하늘에서 떨어진 재난이 아니라 끊임없이 관객의 주의를 사로잡는 현실이다. 앙스파흐 감독은 임신 6개월이 될 때까지 항암치료를 하고 아기를 조기 분만해 인큐베이터에서 키우는 계획, 골수세포를 냉동한 다음 무균실에서 치료하는 시도, 인공유방에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현실 등을 시간을 들여 관객에게 설명한다. 실제로 병을 앓았던 감독 자신에게 중대했고 엠마와 시몽에게 중대한 문제이므로.

한글 번역 제목은 낙태를 거부한 엠마의 모성애에 초점을 두지만 <줄리엣을 위하여>는 무엇보다 생의 한가운데에서 수렁을 만난 여성의 육체와 정신이 경험하는 시련과 사랑의 수기다. 감독은 질병과 죽음의 그림자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광경을 관찰한다. 두 연인은 출산을 놓고 갈등하고 병원 대기실에서 농담과 침묵을 나누고 상대가 자기 손을 놓으려 한다는 의심으로 원망하고 유방 재건 수술을 상의한다. 한편 시몽의 고백은 <줄리엣을 위하여>를 범상치 않은 멜로드라마로 기억하게 한다. “엠마가 아픈 편이 내게 맞는지도 몰라. 예전엔 그녀의 에너지가 숨막히곤 했거든. 우리는 지금 더 가까워. 이게 사랑인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감독은 주연 카랭 비야르와 로랑 뤼카스를 즐겨 클로즈업하고 그 노력은 헛되지 않다. <줄리엣을 위하여>로 세자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카랭 비야르는 연약함이 아니라, 병마가 건드릴 수 없는 종류의 ‘건강함’으로 엠마의 본성을 포착하고, 속 깊은 애인 시몽으로 분한 로랑 뤼카스의 부은 눈과 헝클어진 머리는 입가의 미소를 부정하며 긴 사연을 전한다. 앙스파흐 감독은 관객의 눈물을 거부하지 않지만, 그것이 동정에서 비롯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한다. 좋은 사람들로 가득한 엠마의 인생은 부러우리만큼 살 만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환자에게 정직하고 충실한 의료진이 있고, 누나의 불행을 감당못해 외국에 취직했다는 거짓말까지 하며 칩거하는 착한 동생이 있고, 조용한 관심으로 담장 너머를 주시하는 다정한 이웃들이 있다.

<줄리엣을 위하여>는 치명적 질병을, 슬픔을 극대화시키는 충격요법이 아니라 삶의 시간과 공간, 인간관계를 천천히 물들이는 밀물처럼 그린다. 치료장면을 진료실에 한정하지 않고 병원을 오가는 길의 풍경과 소음까지 주인공의 시점으로 고스란히 살린 연출도 그것이 투병하는 환자와 그 연인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한 시간과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초음파에 잡힌 태아의 심장박동으로 시작한 <줄리엣을 위하여>는 아기 줄리엣과 헤어져 무균실의 새하얀 정적 속에 하염없이 누워 있는 엠마의 모습을 마지막 시퀀스로 삼는다. “잘 자, 내일 또 걸게.” 엠마가 소독된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어디선가 시몽의 노랫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노래의 여린 끝자락은 시몽과 엠마의 허밍과 새의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 노는 어린이들의 소리와 어우러지고 이내 하나로 뭉뚱그려져 잦아들어간다. <줄리엣을 위하여>는 그렇게 생의 영역에 포함된 죽음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죽음과 생명을 한꺼번에 잉태한 엠마의 육체처럼. 김혜리 verme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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