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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추모, 안식을 빕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강머리 앤> 등 연출한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사진 씨네21

애니메이션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가 세상을 떴다. 지난 4월 6일 그는 향년 82살로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암으로 숨졌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은 매체를 넘나들며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강머리 앤> <반딧불이의 묘> 등 일본 애니메이션의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지난 1985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스튜디오 지브리를 공동 설립한 뒤 <추억은 방울방울> <이웃집 야마다군> 등을 발표하며 변함없는 그만의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애니메이션 연구자 나호원 평론가가 <플란다스의 개>에서, 루벤스 그림 앞에서 파트라슈와 함께 세상을 떠난 네로를 떠올리며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플란다스의 개>

다카하타 이사오가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접한 날엔 봄비와 미세먼지가 꽃을 시샘했다. 정서와 풍경, 날씨가 뒤엉키면서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그의 작품 어딘가에서 풍겨져 나오는 맛과 내음 같았다. 그는 누구였을까? 조금이라도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름일 테다. 그가 만든 작품이 무엇인지 정확히 집어내기에는 약간의 머뭇거림과 망설임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작품 리스트를 소개하면 ‘아, 그게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이었군’이라고 반응하거나 ‘그것도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이었나?’ 혹은 ‘그건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은 아니었군!’이라 답하기 쉽다. 다카하타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경계에서 어렴풋한 모습으로 여겨지곤 한다. 아무래도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단단한 성 속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커다란 나무 옆에 늘 함께 있던 존재의 숙명 같은 것일까? 카리스마 넘치는 아티스트의 모습보다는 사람 좋은 동네 아저씨의 인상도 한몫할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입문은 흔히 지브리 작품에서 시작하지만, 본격적인 반열에 오르고 나면 슬그머니 한켠으로 밀어두곤 한다. 그 와중에 애석하게도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들은 (초심자에게는) 너무 어려웠거나, (알 것 다 안다는 자신감이 생길 때는)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채로 어정쩡하게 밀려나야 했다. 때론 미야자키 하야오에 비해 너무나 실사영화에 가까워 보였고, 때론 그 반대로 너무나 만화적 생략법이 강했다. 때론 너무 무거웠고, 때론 너무 가벼웠다. 이처럼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인지 그의 작품들은 자신의 명성 또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유명세에 비해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소개되었다(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황금기에 발표된 <반딧불이의 묘>(1988), <추억은 방울방울>(1991),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같은 작품은 여전히 회자되지만 <이웃집 야마다군>(1999)나 <가구야 공주 이야기>(2013)처럼 이후의 작품은 온전히 접할 기회가 없는 실정이다. 다카하타 이사오는 정녕 2인자에 불과한 것일까?

<반딧불이의 묘>

명작 극장 속 유럽

어렸을 때 보던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우리의 머릿속에 강렬한 이미지를 새겨넣는다. 피노키오, 백설공주, 신데렐라, 피터팬, 곰돌이 푸가 어떻게 생겼는가? 제아무리 원작을 충실히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퍼덕이더라도 (더구나 몇몇의 경우, 오리지널 삽화가 버젓이 함께 실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디즈니가 만들어낸 캐릭터 디자인을 걷어내기는 어렵다. 이렇게 우리가 어렸을 때 읽었던 책들의 절반은 디즈니 캐릭터가 채워넣었다. 그 나머지 반은 1970년대 닛폰 애니메이션에서 제작한 <세계 명작 극장> 시리즈(그리고 그 무렵의 유사 시리즈)가 담당한다. 먼동이 트는 아침에 길게 뻗은 가로수를 누비며 우유 수레를 끄는 파트라슈와 네로, 알프스 벌판에서 해맑게 뛰노는 볼빨간 하이디, 주근깨 빼빼마른 빨간머리 앤의 앞이마,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설고 물길 설어도 엄마를 찾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삼만리 머나먼 길을 떠난 꼬마 마르코 등등 이들 주인공의 다른 외양을 떠올리는 게 가능한가? 덕분에 당시의 어린이들은 세계명작동화 전집을 힘겹게 읽어내려가지 않아도 짐짓 읽은 체를 할 수 있었고(플러스 1점), 그러하기에 때론 원작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가버렸다(마이너스 1점).

당시 국내에 소개된 어린이 명작 동화가 일본식 편집본을 카피하거나 재가공했다는 원본의 진위성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지닌 문학적 소양의 절반은 <세계 명작 극장>의 몫이었다. 그중에서도 <알프스 소녀 하이디>(1974), <엄마 찾아 삼만리>(1976), <빨강머리 앤>(1979)의 감독을 맡고, <플란다스의 개>(1975)에는 조금이나마 스토리보드 작업에 관여했던 이가 바로 다카하타 이사오였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우리가 세계명작동화를 통해 갖게 되는 ‘세계의 이미지’ (정확히는 서유럽의 이미지)를 형성시켰다. 마치 미국인 월트 디즈니가 유럽의 이야기를 재가공하여 ‘디즈니 버전의 유럽 이미지’로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알프스는 눈 덮인 산악만큼이나 푸른 잔디가 펼쳐져야 했고, 플랑드르 지역은 그곳 출신 화가들이 담은 풍경보다 더욱 선명한 색감을 가져야 했으며, 캐나다의 시골 마을은 실제보다 훨씬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야 했다(서구 관객에게 이러한 풍경은 꽤나 ‘일본식’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겠다).

이러한 풍경은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업을 통해 더욱 풍성해진다. 서구의 목가적 풍경은 <미래 소년 코난>(1978)에서 유토피아와 같은 위상을 지니는 하이하버의 모습으로 이어졌고(다카하타 이사오는 이 작품에서 9화와 10화의 연출을 맡았다), 유럽 도시의 모습은 <마녀 배달부 키키>(1989)로 더욱 명확히 구현되었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현실과 일상의 모습

잘 알려져 있다시피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하고 나서, 다카하타 이사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투톱을 구성한다. 스튜디오 초기의 주요 작품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을 맡을 때, 다카하타 이사오는 제작을 맡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이사이자 프로듀서로서 설립 초기부터 미야자키 하야오, 다카하타 이사오와 함께했던 스즈키 도시오는 이 둘을 일컬어 ‘서양숭배자’(<반딧불이의 묘> 블루레이 DVD 출시에 맞춰 쓴 글인데, 한국판 DVD에서는 ‘서양숭배자’로 번역, <지브리의 문학>에서는 ‘사대주의자’로 번역되었다)라고 불렀다. 물론 팀킬을 노린 비난은 아니다. 2차대전 패전 후, 일본이 싫고 미국을 찬양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유럽을 통해 위안을 (혹은 도피처를) 찾고자 했던 세대의 등장은 미야자키와 다카하타가 자신들의 작품에서 서구 이미지를 추구했던 맥락을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시선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야 하는 건 일종의 채무이자 책무와도 같은 것이었다. 1988년은 그런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다. 미야자키는 <이웃집 토토로>를 만들었고, 다카하타는 <반딧불이의 묘>를 만들었다. 스즈키 도시오의 말처럼 비로소 미야자키와 다카하타는 그간 미루어 두었던 일본의 모습을 봐야 할 때였다. 이 과제를 다카하타는 좀더 충실하게 이행했다.

<반딧불이의 묘>를 비롯해 <추억은 방울방울>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현실 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판타지가 있다면 그것은 마치 굳건한 현실/일상이라는 배경 위에 얇게 덧얹힌 레이어와도 같다. 두겹의 층위가 이루는 장면을 통해 현재와 과거가 마주보고, 현재를 점유하는 존재와 밀려난 존재가 대화를 한다. 마주보고 대화하는 일이란 때론 개인적인 성찰이기도 하고, 때론 사회비판이기도 하고, 때론 역사에 대한 되새김이기도 하다(그래서 간혹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했다면, 다카하타 이사오는 다시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땅으로 내려오도록 이끈다. 땅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더이상 멀고 낯선 곳의 가공된 이미지가 아니었다. 바로 그가 속한 곳, 일본의 풍경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비해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은 문화와 국가의 장벽을 쉽게 넘어서지 못하면서 외연 확장에 어려움을 겪곤 한다. 간혹 별도의 각주와 번역이 추가로 요구되고, 그러하기에 종종 논쟁과 비판, 나아가 오해를 야기하는 까닭도 바로 일본이라는 좌표 때문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여기/일본은 지금/현재에 한정되지 않는다. 기꺼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그 과거는 쉽게 화해하고 용서하고 극복할 수 있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기어이 발을 내디디는 기반을 탄탄히 다져놓아야 비로소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고, 그래야 그 비행이 허망한 공상에 그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라는 상반된 접근법은 화학작용을 일으켜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추억은 방울방울>

<이웃집 야마다군>

여백으로서의 풍경

그 이후 다카하타 이사오는 꽤나 느릿한 속도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스타일을 추구한다. <이웃집 야마다군>과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평면적이면서도 여백을 확보하고자 한다. 사실적 재현이라고 할 수 있는 디테일은 버린다. 그리고 선이 강조된다. 이러한 스타일로부터 누군가가 떠오른다. 바로 미하일 두독 드 비트. 그 무렵, 그러니까 <수도사와 물고기>가 선을 보인 1994년부터 <아버지와 딸>이 전세계를 뒤흔든 2000년 그리고 <차의 향기>가 나온 2006년까지, 그는 선과 여백, 풍경과 인물에 대한 관조 그리고 삶을 다룬 감독이다.

2016년 가을, 인디애니페스트에서 <붉은 거북>이 소개되었을 때, 미하일 두독 드 비트는 이 작품이 어떻게 스튜디오 지브리를 통해 제작되었는지 들려준 적이 있다. 그가 2006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고 있을 때, 맨 앞자리에 기대치 않던 사람, 다카하타 이사오가 앉아 있었다 (다카하타 역시 SiCAF의 다른 행사 때문에 한국에 와 있던 참이었다). 평소 미하일 두독 드 비트 감독의 작품을 좋아하던 다카하타였기에 예고 없이 찾아간 것이다. 미하일 두독 드 비트도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을 흠모했기에,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함께 일할 프로젝트 얘기를 나눴다(미하일 두독 드 비트의 작품은 서구인이 보기에는 꽤나 동아시아적이고, 동아시아인이 보기에는 꽤나 서구적이다). 동서양을 넘어, 경력의 길고 짧음을 넘어,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 많은 이가 스튜디오 지브리의 후계자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온갖 얘기를 풀어놓을 때, 정작 당사자들은 후계자가 아닌 동료를 찾고 있었다(기실,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생각보다 평화롭고 화기애애하다. 그리고 수줍음이 많다). 그렇게 <붉은 거북>은 다카하타 이사오가 관여한 마지막 작품으로 남는다. 1935년생이니 향년 82살.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서 가장 연장자였다. 감독으로서 그의 마지막 작품인 <가구야 공주 이야기>가 2013년에 개봉하였으니, 여든을 코앞에 둔 시기까지 활동했다는 얘기다.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 루벤스 그림 앞에서 파트라슈와 함께 세상을 떠난 네로. 한없이 평화롭기에 더없이 슬펐던 장면. 평화로운 안식을 기원하는 건 그래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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