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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
2001-03-21

본능의 도그마, 디지털이 그를 자유케 하리라

■민규동 감독이 만난 라스 폰 트리에, 그리고 ‘왕국’ 젠트로파 스튜디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이 있다. 김태용 감독과 함께 <여고괴담

그 두번째 이야기>를 만든 민규동 감독에겐 라스 폰 트리에가 그런 사람이다. 지난해 6월30일부터 파리에 머무르고 있는 민 감독은 지난해

연말 코펜하겐의 젠트로파 스튜디오를 방문해 그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올해 1월 셋째주에는 일주일 동안 스튜디오에 머물면서 폰 트리에의

차기작 <독빌> 테스트 촬영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씨네21>은 민 감독에게 이 두번의 방문에 관한 글을 부탁했고, 민 감독은 부탁한

분량의 2배가 좀 넘는, 그리고 다소 예상 밖의 글을 보내왔다. 그 글은 감독의 눈이 아니라면 발견하기 힘든 예민한 통찰이 담긴 작가론이었다.

동시에 “세트 주변 아무 데서나 지퍼를 내리고 오줌을 누”는 것조차 정겨운 “진심으로 새로운 시대의 위대한 인물”에게, 새로운 영화에의

긴 여정에 막 들어선 젊은 감독이 바치는 따뜻한 연서였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그 글의 전부를 싣는다. -편집자

평생 오른손으로 글을 쓰다가 갑자기 어떤 영감으로, 단지 재창조라는 목표만을 가지고 왼손으로 계속 글을 써보자. 첨엔 기대할 수 있듯

글자와 거의 닮지 않은 흔적들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곧 오른손으로 썼다면 뻔히 진부했을 몇 문장과 단어를 마스터하는 즐거움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왼손으로 써내는 엉성한 품질이 갑자기 존경스럽고 위대한 목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 순간에 다시 펜을 오른손으로 옮기고

이 모든 일들을 단순히 즐기기 위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안 그러면 우린 그 순진한 왼손의 흔적들에 완전히 반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과 그 공포에…. 라스 폰 트리에는 <킹덤>을 선보이면서, 왼손으로 쓴 자기 사인을 남기며 영화 연출의 변을 대신했다. 라스는 스스로를

과학자로 비유하듯, 그는 매번 한계를 바라보고 극단으로 달려 내용의 실험뿐만 아니라 비주얼 기술의 새 영역까지 한 걸음 살짝 그 한계와

안주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나의 원초적 취향,라스폰 트리에

98년 나는 <키노> 인터뷰에서 ‘젤 좋아하는 감독은?’이라는, 좋아하는 색깔을 묻는 것만큼 매번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그 질문에 약간

우물쭈물 끝에 나 자신도 놀라운 대답을 했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 단 한편만으로 라스 폰 트리에를 내가 젤 좋아하는 감독으로 꼽았던

것이다. 어째서였을까? 나는 3년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바로 눈앞에서 그를 직면하고 나의 본능적인 대답이 가진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생애 말기 자신의 회고록에서 어느새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준 웰스, 펠리니, 베리만, 타르코프스키 등 그 많은 위대한 인물들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떠올렸다. 하지만 영화학교에선 아직도 볼 수 없는 그들 영화의 권위를 주입시킨다. 우린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위대한 인물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키에슬로프스키도 시인 김남주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떴다. 키에슬로프스키가 토로했듯 나도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내 자신이

어떻게든 닿을 수 없는 영역의 것들을 부러워하고 질투할 수는 없다. 나는 다시 한번 위대한 감독을 묻는 질문에 방금 만든 작품이 채 그

온기를 식히기도 전에 벌써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하는 21세기의 <동사서독>, 나는 왕가위와 라스 폰 트리에를 떠올린다. 운이 좋게도 어느

날 나는 코펜하겐의 ‘Filmbyen’에서 이뤄진 다음 작품 <독빌>(Dogville) 테스트 촬영에 초대되어 한동안 바로 곁에서 라스를

지켜볼 수 있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누구의 조감독도 하고 싶지 않다고 단연코 주장했지만 켄 로치가 원한다면 그를 위해 기꺼이 커피 심부름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제 커피 심부름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그랬듯 라스 폰 트리에, 그의 발등 위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만져줘 그의 영혼의 피곤함을 씻어주고 싶을 정도이다.

나는 평화지수 세계 1위의 나라, 덴마크에서 영화 만들기가 그를 전략적으로 다국적 시간과 공간으로 옮겨준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가 인정하는

것은 모든 덴마크 사람들이 덴마크를 떠난 다른 곳에서 살고 싶어하지만, 아무도 그럴 엄두는 못 낸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덴마크라고. 라스는

현재 예전 어머니의 집이었던, 헤어진 전 아내의 집에서 살고 있다. 그곳은 자신이 태어난 집이고 이혼 때 아내에게 양도된 집이었고 다시

젠트로파가 사들여서 지금 라스가 살고 있는 것이다. 라스에겐 여행공포증이 있어서 미국은커녕 칸영화제로 한번 나서는 일조차 너무나 힘들어한다(뉴욕대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그는 ‘거기가 정말로 미국이냐’고 몇번이나 흥분된 확인을 거듭했다). 그런 그에게 그 집은 중요한 창작공간이면서 모든 영감의

원천이 되는 곳이다.

출생의 비밀, 그의 아버지는 옆집 아저씨 모든 훌륭한 예술가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성장과정의 비뚤어진 이력처럼, 너무나 부럽게도, 라스도 보통 아이로 자라지 않았다. 유대인 아버지는

사민주의자였고, 어머니는 공산주의자였다. 겁쟁이 라스는 우디 앨런과는 비슷하지만 반대의 경우로 어머니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자라났다. 어머니가

죽기 전 침대에서 라스가 18살 때 죽은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님을 밝혔다(덕택에 뉴욕대의 한 학생이 갑자기 라스의 동생으로 밝혀지고

그녀는 즉시 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즉, 라스의 아버지는 이웃집 아저씨란 걸 평생을 숨겨오며 살아온 어머니는 그 자기 생애에 실현하지

못했던 예술적 열망을 라스의 어린 시절에 가득 풀어헤쳤다. 어려서부터 자유롭게 세상에 대한 ‘자기’만의 가치관을 세우도록 방목시켰다(예를

들어, 여느 어머니와 달리 숙제하라는 말, 학교 빼먹지 말라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의 모든 작품의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라스는 의식적으로 사람들을 향해 뛰쳐나가거나 영감의 소스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떤 주제든 모티브든 어떤 창작에의 관심영역이 축적되고 그것이 평생을 지속하게 되는 것. 6살 때부터 원자폭탄 투하를

두려워하며 테이블 밑에 숨어 하루를 보내던 라스 또한 이미 모든 세계의 이미지를 어려서부터 그의 맘속에 키워왔다. 그는 두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가 짠 하며 눈을 뜨고 그 상상 속에서 만난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가 미국에 대한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었던 카프카의 비결이라면서

가르쳐주는 것, 그것은 경험하지 않은 공간에 대한 매력이 주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어느 한국영화보다도

아름다울 수 있을 거라고 농담짓는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허공에 붕 뜬 허약한 진실의 영화가 아님은 명확하다. 나의 본능은 자연스럽게 어떤

배경이 그의 현재 영화세계를 이루었는지를 탐색한다. 그의 겸손한 표현대로 라스의 뒤에는 여러 가지 필연적인 행운이 존재하는데, 그의 운명적

복(福)에 대한 감상적인 상상은 바로 흔히 내가 그리고 내 몇 동료들과 꿈꿔오던 이상과 맞닿아 있으므로, 늘 즐거운 정신적 여행이다.

라스에겐 아주 오래된 동료이면서 젠트로파의 공동소유자인 ‘Peter Aalbæk Jensen’이라는 호인과 <브레이킹 더 웨이브> 이후

계속 라스와 작업하는 여성 프로듀서 ‘Vibeke Windeløv’가 있다. 흔히 좋은 감독의 역사에는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훌륭한 프로듀서가

그뒤에 있게 마련이다. 영화는 그렇게 매번 많은 이들을 시험에 빠뜨리는데, 매번 새 파트너와 그 장애를 제대로 극복한다는 건 영화 만들기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우리나라에서는 정말로 힘든 일이다). 피터에게 어떻게 라스와 오랫동안 함께 작업할 수 있었냐고 묻자, 그는 당연히

여태껏 모든 작품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니었으면 당장 깨졌지라고. 라스도 똑같이 대답하는 걸 보면 수없이 있었던 질문임이 틀림없다.

피터는 자신은 회사운영에 대한 모든 결정을 알아서 하고 라스는 아무 간섭을 하지 않으며, 라스는 자신의 창작조건을 원하는 대로 만들어가고,

피터는 이를 완벽히 지원한다. 이것이 덧붙이는 그들의 비결이다. 놀랍고도 감동적이며 중요한 건 이 평범해 보이는 원칙이 서로의 배려 속에

엄연히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필름보다 큰 그릇

창작을 위한 사고와 창작 환경을 위한 사고는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일이다. 라스가 설명하는 디지털 작업의 장점은 우선 감독에게 환경이 아니라

창작에 열중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효율성만이 아니라 상상력을 제한하는 현재 35mm 영화제작의 무거운 기술적

한계의 극복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는 단 한번도 ‘싸기 때문에’ 디지털을 선택한 적이 없다고 한다. 임상수 감독님이 토로하듯 한국에선 디지털은

‘더 싸다’의 의미지만, 그건 프로듀서의 구두를 신었을 때의 의미 아닐까? 그의 디지털영화에 대한 추구는 본격적인 디지털카메라의 등장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훌륭한 입자의 질감은 놀랍게도 편집한 필름을 비디오로 트랜스퍼하고 그 비디오 데이터를 다시 35mm

필름으로 트랜스퍼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영화가 다큐멘터리처럼 그 이야기의 진실 속에서 살아 있도록 화질의 질감을 거칠게 만들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필름의 뛰어난 질감에 놀랐다.

그의 디지털에 대한 기술적 실험은 <백치들>을 넘어 <어둠 속의 댄서>에서 극을 발휘한다. 많은 감독 친구들이 <어둠 속의 댄서>를 보고

뮤지컬 장면만 디지털로 찍고 나머지 현실 부분은 35mm 카메라로 찍었다고 얘기한다. 아니다. 사실은 모두 디지털카메라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뮤지컬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필름으로 찍은 것으로 속일 정도로 디지털 화질이 주는 거리감을 극복했다. 그는 비디오가 먼저 발명되고

필름이 나중에 발명됐다면 모든 필름으로 찍는 영화가 비디오의 느낌을 내려고 노력할 거라고 말한다. 낯선 디지털, 그것은 흑백영화와 컬러영화의

순서,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순서처럼 우리 인식영역의 익숙해지는 방식에 불과한 것. 그는 단 한번도 디지털의 화질에 대한 열등감을 가져보지

않았다고 한다. 즉 어떻게 트랜스퍼를 하면 필름에 가깝게 느껴질까는 그가 디지털을 선택한 철학적 배경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그는 뮤지컬 장면을 위해 100대의 카메라를 썼다. 비욕은 혼자 내버려두면 30분이 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놀라운 연기를 보여줬다고 한다. 그는 춤의 어느 한 리듬도 커트하고 다시 시작하는 방식으로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디지털은 필름보다

큰 그릇인 것이다. 그것은 소통과 경계의 확장인 것이다. <어둠 속의 댄서>를 보노라면 디지털은 그 가치를 알고 필요로 하는 자에게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프로듀서는 디지털 작업이 오히려 비싸며 너무나 많은 양의 머티리얼이 쌓여서 관리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투덜댄다.

배우 옆에서, 직접 찍고 길게 찍다

디지털이 감독에게 가져다준 또 하나의 큰 혁명적 변화는 배우와의 거리를 없앤 것이다. 그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좀더 거칠고 아마추어

같은 촬영을 원했지만, 촬영감독의 감각이 너무 좋아서 아무리 들고찍기로 휘둘러도 너무나 훌륭한 구도와 포커스를 찾아낸 것에 대해 분노했다고

한다. 그래서 라스는 백치 이후로 직접 카메라를 들었다. 그는 카메라와 함께 배우들 사이에 서 있을 때 진실로 그들과 동격이 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하긴 떠올려보면 30초 동안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가 ‘컷’ 하고 뛰어나가 배우들과 얘기하고 다시 모니터 앞으로 뛰어들어와서

레디라고 소리치는 이미지가 갑자기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카메라를 잡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찍든 천천히 팬을 하든 그 모든 정지와 움직임에는 그 프레임의 철학이

있는 것인데, 그걸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에 너무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35mm 카메라를 들고 경험이 없는 감독이 촬영을 직접

하는 건 불가능하다. 디지털카메라가 그 기술적 장벽을 허문 것이다. 그리고 라스는 배우의 오른쪽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금하면 오른쪽으로 팬하고,

그동안 다시 배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면 다시 원래 자리로 팬한다고 한다. 그렇게 모든 미시적인 움직임 하나하나에 자신의 의미를

담아, 그 한 프레임의 온전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10살 때부터, 어머니의 Elmo standard 슈퍼8mm를 들고 직접 영화를 찍어왔던

라스의 욕심과 갈망이 기술과 만나 폭발하는 것이다.

그는 배우들 바로 코앞에서 연기지도를 하며 원하는 순간에 무의식적이고 충동적인 줌과 무빙 그리고 소리를 전달하는 공기 같은 카메라라는 입자를

통해 배우 그리고 감독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손실분을 제거한다. 그것이 내가 발견한 그의 비밀이다. 그는 그리고 직접 찍고

길게 찍는다. 방대한 분량의 필름을 토해낸 <킹덤>의 16mm 작업에서부터 그는 배우의 한 리듬이 끝날 때까지 ‘컷’을 부르지 않고, 또

매번 다시 찍을 때마다 조금 다른 느낌의 상황으로 재연시켜, 편집 과정에서 재창조를 이루어내는 방식을 터득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어둠 속의 댄서>에서 자전거를 선물받고 즐거워하는 신을 20분 찍고 2분을 영화에 남겼다. 컷이 왜 바뀌어서 다른 앵글에서 다시 찍어야

하는지에 대한 내적 논리를 발견하고 정당화하느라고 스토리에 대한 집중을 놓치는 오류를 피하는 것이다. 그는 68년 TV 아역배우로 시작해서

자신의 단편들, 장편 <범죄의 요소>(The Element of Crime, 1984), <전염병>(Epidemic, 1987)에까지 직접

배우로 출연했다. 하지만 <백치들> 이후 카메라를 직접 잡는 것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으므로, 더이상 화면에서 라스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는 자꾸 촬영을 하다보니 자신의 촬영실력이 일취월장해서 큰일났다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도그마95,탁월하고 오만한

그의 이런 자유분방한 연출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그의 ‘즉흥연출(improvisation)’에 대한 것이다. 그는 “시나리오는 쇼핑 리스트

같은 것이다. 정확히 리스트에 있는 것만을 사면, 우린 집에 뭘 들고 돌아갈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리스트 없이 충동적으로

더 많은 걸 사게 되면 필요한 걸 사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필요한 것들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 나를 풀어놓는다”라고 즉흥을 정의한다.

즉 완벽한 시나리오와 무엇을 즉흥적으로 재창조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없는 즉흥은 테니스 공이 없는 테니스 시합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즉흥의 목표 또한 단일한 것인데, 그건 자신의 아이디어와 배우의 표현력 사이에서 오는 손실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감독은 배우와 함께

서로의 극단적인 한계를 묻고 토해내는 것이다. 그는 <백치들> 때 이미 리허설부터 배우들이 벗는 신에선 감독 스스로 완전히 발가벗고 배우들

속에 섞여 있었다. 박광수 감독의 단편 <빤스 벗고 덤벼라>는 겁많은 한국 배우들에 대한 조롱인가 아니면 무능력한 한국 감독들에 대한 조소인가

생각해본다. 그로서는 첫 번째였던 도그마, <백치들>의 촬영과정은 하나의 집단 퍼포먼스처럼 감독과 배우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허물들을 모조리

벗겨내는 것이었다.

그가 선언한 대로 도그마95는 당대 영화를 지배해온 어떤 경향에 대한 거부의 표현이며 동시에 구출 행위이다. 60년대 영화들이 우리에게

가져온 환상, 고상한 거짓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이다. 그야말로 ‘브레이킹 더 (누벨) 바그’(‘Breaking the nouvelle

vague’, 즉 ‘브레이킹 더 웨이브’였던 것이다). 그의 탁월하고 오만한 선언, 나를 전율시켰던 그의 선언. 그는 안 지킬 것 뻔히

알면서도 개학하면 이거 저거는 안 해야지 하고 자기다짐을 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한다. 그걸 지키고 안 지키고의 덫에 빠지면 그 순간, 그

도그마의 정신은 날아간다고.

<어둠 속의 댄서>상처로 빚은 영광

그의 행운은 또한 늘 훌륭한 배우들을 만난다는 것인데, 속을 보니 그는 늘 존재하는 배우들과의 충돌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킹덤> 때부터 여배우들과 친해지고 점점 좋아져서 적대적인 관계보다는 우호적인 관계가 훨씬 많은 걸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만난 비욕은 라스보다도 훨씬 에고가 강한 월드스타였다. 둘의 만남은 첨엔 흥분에 가득 차 서로의 야망을 향해

축복 속에 함께 살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점점 상대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지자 폭발하는 부부 사이를 닮았다. 촬영 도중

비욕이 그날 입던 의상을 갈기갈기 찢고 아무 말 없이 석양을 향해 떠나갔을 때, 그는 정말로 좌절했다. 대역에게 마스크를 씌워 연기를 시키자던

미술감독에게 자조적인 화를 내며 어쩔 줄 몰라하던 그의 좌절한 모습. 두개의 뜨거운 별이 충돌하고 훨씬 큰 별이 떠나갔을 때, 스탭들은

그를 불쌍한 ‘리틀 라스’(little lars)라고 불렀다. 그의 삶을 평화롭게 내버려두지 않는 무언가, 그 존재에의 확신. 두려움,

공포, 생존에의 희망, 매번 시도하는 치유요법. 어느 순간부터, 오로지 작품을 끝내는 것만이 목표라고 투덜대고는 기여코 이번처럼 힘든 작업은

처음이었다라고 고백하는 그 지옥 같은 영화작업의 순환.

그는 어린 시절부터의 편두통에 시달렸고 어딘가 아프기만 하면 암일 거라고 되뇌이며 하루에도 5∼6차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비욕과의 충돌은 그의 독특한 영화작업이 낳을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고통이며 공포였을 것이다. 비욕은 어느 날 신비롭게 미소지으며 돌아와

남은 촬영을 마쳤다. 비욕은 그뒤 베트남전 참전 용사처럼 일했다며 어려웠던 작업에 대한 불평을 인터뷰에 털어놓았다(하지만 그 정도 훌륭한

용사가 있다면 어떤 전쟁이고 할 만하지 않는가!). 1년이 지난 뒤 완성된 <어둠 속의 댄서>의 메이킹 다큐멘터리에는 일체의 코멘트와 이미지조차

남기기를 거부했다. 나는 전쟁으로 비유된 그 영화제작의 고통을 전일적으로 통감할 수 있다. 라스의 영화는 어떤 필요나 내외적 압력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부여받은 자유로움의 이면에 운명적으로 함께하던 수많은 종류의 포비아와 근심에 용감하게 맞서며 낯선 구도 속으로 뛰어든 예술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그가 말하듯 그건 그가 소유하고 있으며, 반드시 만나야 하는 모든 공포와 맞서 싸우는 일종의 생존의 양식인 것이다.

전율적이고 극단적인 감동을 자아내는 <어둠 속의 댄서>는 그렇게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라스의 상처들이다.

하나 라스 폰 트리에 붐을 만들어 칸영화제 대상을 안겨주고는 개봉 때는 맘을 바꿔 <어둠 속의 댄서>에 대한 전일적의 혹평(별 0개)을

매긴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진들 말처럼 그는 보편으로 퇴행하고 있는가? 그의 필모그래피를 처음부터 되짚어본다면, (왕가위가 그렇듯),

그것은 보편으로의 전진임을 알 수 있다. 비베케는 라스가 좀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좀더 가슴을 울리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한다고

했다(그의 이런 소망이 왜 비난받아야 하는가!). 그의 다음 영화 <독빌>은 20년대 누아르 영화풍의 훨씬 쉽고 단순한 내러티브를 갖추고

있지만, 그의 실험현장은 도무지 그 표현양식을 예측할 수 없는 독특한 실험으로 가득 차 있다. 미국도 못 가는 겸손한 겁쟁이 과학자, 하지만

영화의 실험에서는 아무런 겁도 없이 누구도 개척하지 못한 곳으로 발을 내딛는 모험가. 그에게 내용은 좀더 보편으로 내려오고, 스타일과 형식은

또 새로운 영역의 극단을 향해가고 있는 것이다. H. L. 멩켄의 말처럼 시시한 주제는 없다. 다만 시시한 작가만 있을 뿐 아닌가.

건강하라,리틀 라스

그는 매번 컷 대신 ‘탁’(덴마크어로 ‘고맙다’는 뜻)을 부른다. 듣기 좋다. 인내심을 요구하는 테스트 촬영현장의 배우, 스탭 모두들 기다림에

지친 불평이 아니라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를 털어놓는다.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르는데 왜 그 소외에 대한 불평이 미지의 결과에

대한 기대로 표현될까? ‘기대’와 ‘불평’ 사이에서 무엇이 선택되느냐는 그 리듬을 사로잡고 있는 주체의 권위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실험’이냐

‘방황’이냐의 경계에도 해당되는 힘이다. 그는 25년 전에 충동적으로 몇몇 미국 재즈가수처럼 귀족임을 암시하는 ‘von’을 이름 사이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권위는 이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센티멘털하게 매혹당할 수밖에 없는 그의 솔직함, 그의 유약함,

그의 자기 중심적인 고집, 그의 부족한 인내심, 그의 탁월한 구체성, 그리고 그의 겸손함, 그의 아름다운 영화들에서 오는 것이다. HD

카메라와 모니터를 이어주는 긴 케이블을 어깨에 멘 채 촬영을 도와주던 고교생 자원봉사자들에게 디지털영화를 좋아하냐고 묻자 그들은 나에게

디지털영화가 뭐냐고 묻는다. 나도 알 수 없다. 생각해보니 우문현답이다. 아직도 그 경계가 있단 말인가. 세트 주변 아무데서나 지퍼를 내리고

오줌을 누던 라스, 나에게 들키자 ‘이런 게 덴마크식’이라고 웃어보인다. 스탭들의 표현대로 그는 ‘걷어붙인 팔뚝’이며 동시에 ‘귀여운 리틀

라스’, 나는 진심으로 새로운 시대의 위대한 인물, 그의 장수를 빈다.

코펜하겐=민규동/ 영화감독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