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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절제하고 사운드를 극대화한 <더 길티>가 긴장감을 유지하는 법
송경원 2019-04-04

귀로 상상하라!

구스타브 몰레르 감독의 <더 길티>는 제34회 선댄스영화제를 시작으로 뮌헨국제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등 전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잇달아 초청받고 수상하며 화제를 모은 영화다. 긴급구조전화센터에서 일하는 남자에게 걸려온 한통의 구조 요청 전화만으로 88분을 지탱하는 독특한 소재의 영화 <더 길티>는 기초적인 요소로 영화가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미 할리우드에서 제이크 질렌홀 주연 및 제작으로 리메이크를 결정했을 만큼 흥미로운 영화. 하지만 이건 그간 전혀 보지 못한 파격적인 문법이 아니다. 아니, 차라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래된 미래에 가깝다. <더 길티>는 어떻게 흥미로운 영화가 되었나. 소리만으로도 관객의 호기심을 붙들어두는 기술, 이 모든 걸 조화롭게 관리하는 연출의 힘, 구스타브 몰레르 감독이 상영시간 내내 긴장을 유지하는 비결에 대해 찬찬히 풀어보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노이즈가 화면을 메운다. 이윽고 이어폰을 낀 귀를 크게 클로즈업한 화면이 등장하고 카메라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한 남자의 모습을 비춘다. 전화기 너머로는 한 남자가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에 맞춰 발신지의 위치를 확인하는 모니터가 등장한다. 관객은 이제 화면 속 남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남자는 긴급구조전화센터에서 일하는 듯하다. 하지만 곧이어 남자의 손을 클로즈업한 장면이 나오는데 수화기 너머 긴급한 목소리와 달리 남자는 지루한 듯 손으로 공을 돌리고 있다. 곧이어 카메라는 멀리서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잡는다.

아주 단순하고 건조한 일련의 몽타주는 충격적일 만큼 효과적이다. 여기엔 최소한 세 가지의 상이한 정보가 충돌하며 관객을 화면 속으로 끌어들인다. 첫째,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사운드, 부분 클로즈업, 전체 모습 순으로 정보를 조금씩 제공하며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숨길지를 고른다. 관객은 정보를 차례로 습득하며 다음 화면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긴장감을 느낀다. 둘째, 긴급한 목소리와 달리 클로즈업된 남자의 손은 권태롭게 공을 굴리고 있다. 사운드와 이미지의 충돌로 이 긴박한 상황이 전화를 받고 있는 남자에겐 권태로운 일상의 일부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지금부터 사운드만큼 보여주는 것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학습한다.

압권은 마지막이다. 손으로 공을 돌리고 있는 부분 클로즈업 다음에 이어지는 숏은 남자의 얼굴이나 앞모습이 아니라 롱숏으로 잡은 뒷모습이다. 남자의 어깨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천천히 멀어지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우리는 상상한다. 남자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심드렁하게 공을 굴리는 손을 클로즈업한 숏도, 어깨를 잡은 롱숏도 모두 아무런 감정을 제시하지 않는 중립적 이미지들이다. 그런데 이런 두 가지 숏이 수화기 너머 긴박한 사운드를 매개로 이어질 때 기묘한 효과가 일어난다. 남자의 어깨가 왠지 축 처져 있다 싶다가 지루하고 권태로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중립적인 숏 뒤에 무슨 장면이 이어지는지에 따라 감정의 방향을 제시하는 효과. 이것이 바로 고전영화의 미학을 강조하는 이들이 그토록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하는 몽타주의 힘이다.

침묵이 들려주고, 손이 말을 거는 영화

덴마크의 웰메이드 스릴러영화 <더 길티>는 긴급구조전화센터에서 일하는 경찰 아스게르(야코브 세데르그렌)가 이벤(예시카 딘나게)이라는 여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따라간다. 영화는 88분의 상영시간 내내 긴급구조전화센터를 벗어나지 않는다. 등장인물도 사무실 배경에 그치는 몇몇 동료를 제외하면 아스게르 한명뿐이다. 사실 <폰부스>(2002), <베리드>(2010) 등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드물지 않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승부하려는 영화가 종종 선택하는 제한된 상황극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긴장감을 높이기에 효과적인 세팅 중 하나다. <더 길티> 역시 88분이라는 길지 않는 시간 동안 관객의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인 선택에 충실한 영화다. 이야기는 거의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특정 공간을 벗어나지 않지만 공간의 성격을 나누기 위한 여러 장치를 활용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88분의 상영 시간 동안 늘어지는 부분 없이 기본에 충실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집중력을 위해 <더 길티>가 꺼내 든 카드는 다름 아닌 사운드의 활용이다.

<더 길티>는 귀로 상상하는 영화다. 사운드는 영화의 여러 요소 중 가장 직접적으로 관객의 감정을 이끄는 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지와 사운드가 충돌할 때, 가령 평범한 화면에 무서운 소리가 입혀지면 대개 사운드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 마련이다. 영화 속 사운드는 크게는 대사, 배경음악, 공간음(앰비언스 사운드)으로 이뤄지는데, 그중 배경음악이 가장 직접적이고 그다음이 대사, 제일 마지막 공간음이 가장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다. <더 길티>는 우선 감정의 방향을 제시하지 않기 위해 배경음악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공간음 역시 그 성격에 따라 이미지 정보가 화면 안에 드러나는 내재음과 화면 바깥에 존재하는 외재음으로 나눌 수 있다. 긴급구조전화센터라는 특색에 맞게 <더 길티>는 아스게르가 있는 센터의 풍경과 수화기 너머 사건 현장에서 들리는 소리를 철저히 구분한 뒤 영리하게 활용한다. 긴박한 사운드는 대부분 프레임 바깥, 인물의 힘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생기고 이는 오로지 관객의 상상과 개입을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

<더 길티>가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종전에 없던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탄생 이래 꾸준히 쌓아온 클래식한 문법에 가깝다. 영화가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은 단순하다. 정보를 제한한 뒤 한 박자씩 늦게 제시하고 그 찰나의 공백에 관객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미세하게는 느린 패닝이나 풀백숏처럼 보여주는 속도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다음 화면을 궁금해한다. 액션숏(바라보는 대상)보다 리액션숏(바라보는 사람)을 먼저 보여주면 무엇을 바라보는지 궁금하기 마련이다. 요컨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오는 긴장감에 관객의 상상력을 뒤섞는 기초적인 문법이다. 영화의 탄생과 함께 줄곧 다듬어온 이 효과적인 언어가 최근 영화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러한 연출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발을 디딜 쉼표가 필요하다. 완만한 속도라고 해도 좋겠다. 정신없이 빠른 편집으로 관객의 멱살을 잡아끄는 영화가 포기해야 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더 길티>는 차분한 호흡으로 이 아름다운 속도를 되살린다. 앞서 언급했듯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은 88분간 시종일관 텐션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마치 한 호흡으로 진행되는 현장 공연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가 어느새 스크린의 막을 녹이고 관객을 인물의 옆자리에 앉힌다.

구스타브 몰레르 감독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비장의 무기 두 가지를 더 투입했다. 첫째는 침묵. <더 길티>는 직접적인 대사나 사운드 대신 침묵이 상황을 지배하는 보기 드문 마술을 종종 발휘한다. 긴급구조전화센터에 걸려온 대화만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에 대사가 많을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의외로 상영시간이 비슷한 여타 영화에 비해 대사량이 적은 편이다. 그 덕분에 대사와 대사 사이 공백, 이른바 침묵이 감도는 시간이 꽤 길다. 보통 침묵은 어색함이나 사고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더 길티>에서 한박자 쉬고 답하는 짧은 공백은 관객을 상황에 개입시키는 중요한 쉼표역할을 한다. 예컨대 이벤과 본격적으로 대화를 주고받기 전 아스게르가 물을 한잔 마시며 잠시 쉬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는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아스게르의 얼굴을 천천히 줌인해 들어간다. 이와 동시에 같은 박자로 상황실의 앰비언스 사운드도 천천히 줄어들고 결국 화면은 완전한 침묵으로 접어든다. 이 영화 속 침묵은 어쩌면 유일한 일인칭 주관적 사운드다. 아스게르가 자신의 내면에 완전히 빠져들 때 영화는 침묵이라는 비현실적 사운드로 스크린을 메우고 관객은 이를 매개로 인물의 심리에 동화된다. 요컨대 <더 길티>는 침묵이라는 사건을 통해 끊임없이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영화 속 침묵에는 또 하나의 기능이 더 있다. 한정된 공간의 실내극에서 리듬을 만들어내기 위해 <더 길티>는 몇 차례 공간을 이동한다. 하지만 옮길 수 있는 무대는 사실상 모두 함께 있는 상황실과 혼자 들어가서 전화를 받는 별도의 방, 두 군데뿐이다. 영화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침묵을 활용한다. <더 길티>가 침묵을 허락하는 순간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물의 심리에 완전히 몰입해 주관적 사운드 시점으로 돌입할 때, 다른 하나는 상황이 전환될 때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시퀀스에서 직장인 긴급구조전화센터의 전경을 롱숏으로 잡은 후 사운드가 천천히 잦아든다. 이건 비유하자면 무대에서 막이 한번 내려오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자아낸다. 공간이 바뀌지 않아도 침묵이 한차례 찾아오면 상황이 전환되어 다음 챕터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스게르만을 집요하게 따라가야 하는 영화는 침묵이란 칼을 휘둘러 공간을 나누고 막간극으로 거듭난다.

<더 길티>는 여기에 대중적인 화법으로 친절한 가이드 역할도 잊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감정을 제시하는 이미지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역할을 여느 내러티브영화처럼 인물의 얼굴에 맡기는 대신 부분 클로즈업, 특히 손에 양보한다. 영화에서 아스게르의 심리를 꼭 표현할 때는 중간중간 손을 클로즈업해 그의 권태, 초조함, 불안감 등을 짚어준다. 공간을 이동하면서 극적으로 세팅되는 조명, 대표적으로 방 안의 어둠을 이용한 실루엣과 붉은색 조명은 아스게르의 심리를 직접 색채화하기도 한다. 요컨대 <더 길티>는 손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색으로 마음이 드러나며, 침묵이 상황을 들려주는 영화다. 이러한 요소가 부각될 수 있는 건 뒤집어 말해 이같은 기본적인 요소를 제외하곤 모두 제거된, 미니멀한 영화기 때문이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원죄의 그림자를 이끌어내는 영화적 마술

또 하나, 단순하지만 <더 길티>가 반복하는 또 하나의 규칙이 있다. 영화에서 중요한 상황은 항상 세 번째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긴박한 상황을 다룬 영화지만 감독은 서두르지 않는다. 우선 영화는 긴급구조전화센터에서 첫 번째 전화를 받은 아스게르의 모습을 보여주며 전반적인 상황의 세팅과 영화의 톤을 조정한다. 이어서 아스게르는 유흥가에서 트러블이 일어난 남자의 전화를 두 번째로 받는다. 상대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고 짧은 대화 속에서 모순을 찾아내 수화기 너머 상황을 유추하는 아스게르의 모습은 긴급구조전화센터 경찰이 하는 일의 본질이기도 하다. 동시에 영화는 똑같은 역할을 관객에게도 권한다. 이제부터 관객이 해야 할 일은 아무런 정보 없이 우리 앞에 던져진 아스게르가 어떤 인물인지 추리하는 것이다. 곧이어 아스게르는 잠깐 쉬는 시간 동안 동료와 사적인 통화를 나누는데 우리는 이 짧은 대화에서 아스게르가 원래 마약 단속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이라는 점, 어떤 문제가 생겨 잠시 이 센터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야 영화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에게 붙잡혀온 여성 이벤의 세 번째 전화를 허락한다. 반복과 변주. 이것이야말로 <더 길티>가 정보의 부스러기를 하나씩 떨어뜨리며 관객을 다음 걸음으로 이끄는 방식, 영화 전체에 서스펜스를 불어넣는 요령이다.

중반이 훌쩍 지나서야 드러나는 아스게르의 상황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아스게르는 원래 현장에서 활동하는 경찰이었고 모종의 사건으로 긴급구조전화센터에 임시로 발령받은 상황이다. 내일이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재판을 받을 예정이며 동료가 자신의 변호를 위해 위증해주기로 한 상태다. 아무 일 없이 오늘만 무사히 보내면 되는 아스게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 이벤은 모든 걸 바꿀 운명의 상대다. <더 길티>의 영리한 점은 이 정체 모를 수신자 아스게르와 위기의 발신자 이벤이 최종적으로 마주하는 진실을 인간의 죄의식과 원죄라는 근원적인 테마와 연결한다는 점이다. 관객은 당장 눈앞의 상황만 열심히 쫓아가면 충분하지만 종국에는 ‘누가, 왜, 유죄인가’라는 숙제를 함께 맞이하게 된다. 그 순간 단선적으로 느껴지던 사건과 인물의 두께가 한순간에 부풀어오르며 깊이를 획득한다.

절제함으로써 얻은 것

<더 길티>는 사운드, 그중에서도 앰비언스 사운드의 디자인에 집중한 영화다. 하지만 소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대상을 상상하도록 만드는 영리한 구성이 가능한 건 결국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보여주느냐’에 달렸다. 요컨대 <더 길티>는 돌고 돌아 결국 이미지의 힘을 믿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핵심 전략으로 삼은 건 두 가지,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과 부분 클로즈업 숏이다. 상황에 침착하게 대응해야 하는 아스게르는 대부분 절제된 표정으로 제시된다. 간혹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표정으로 묘사되는 장면은 거의 없다. 표정을 읽을 수 없다, 혹은 절제돼 있다는 것은 이 영화의 핵심 중 하나다. 아스게르의 표정이 중립적이기에 관객은 각자가 아스게르와 같은 전화교환원의 입장이 되어 그의 심리 상태와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열심히 추측할 수 있다. 관객에게 주어진 건 무표정이라는 중립적인 이미지, 그리고 수화기 너머 보이지 않는 사운드 정보다. 결국 이 간극을 메우려 시도하는 사이 관객은 어느새 인물에 감정이입하는 걸 넘어 영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존재가 된다.

안다고 모두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건 실은 다른 차원의 문제, 좀더 구체적으로 좁히면 의지와 방향의 문제다. 영화는 어쩌면 100년 전에 이미 완성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관객을 동참시키고 긴장을 지속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은 꾸준히 만들어져왔다. 하지만 현란한 이미지와 속도에 홀려 새롭게 밀려오는 파도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이미 알고 있던 것마저 잊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더 길티>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가지고 있으며 즐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어떤 깊이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새삼 일깨워주는 영화다. 몰입이란 거창한 마술이 아니다. 최신 그래픽의 현란한 영화에 점점 무뎌지던 요즘, 정교한 사운드 디자인으로 승부한 <더 길티>를 보고 나니 고전영화가 관객에게 허락했던 상상력이 새삼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 <더 길티>를 보면 연상되는 영화들

<더 길티>는 고전적이고 기본에 충실한 만큼 여러 영화의 흔적과 맞닿아 있다. 소재, 주제, 스타일 면에서 <더 길티>에 영향을 주었을 법한, 혹은 <더 길티>를 보고 나서 찾아 보면 좋을 영화들을 소개한다.

소재: <폰부스>(2002)

감독 조엘 슈마허 / 출연 콜린 파렐, 포레스트 휘태커, 키퍼 서덜런드

“영화 전체가 거대한 함정이다.” 조엘 슈마허 감독의 말이다. 그는 시나리오작가 래리 코언이 품고 있던 ‘공중전화 부스에 갇힌 남자’라는 20년 된 아이디어를 받아들인다. 기획과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하는 영화에서도 불꽃처럼 몰아붙이는 자신의 스타일을 십분 살릴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일 터. 영화 속 시간과 상영시간이 일치하는 <폰부스>는 고작 열흘 만에 촬영을 완료한, 그야말로 실험적인 프로젝트에 가까웠다. 조엘 슈마허 감독은 한정된 공간에서 이동하지 않는 이야기를 혹여 관객이 지루해할까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방식을 택했다. 우선 한번에 돌아가는 네대의 카메라가 좁은 공간을 분할하여 동시에 비춘다. 다음으로 속사포 같은 대사들이 전화기와 모니터를 통해 쏟아져 나와 주인공 스투(콜린 파렐)만큼이나 관객 역시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만든다. 한정된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컨셉은 <더 길티>와 유사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정반대다.

주제: <더 헌트>(2012)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그 / 출연 매즈 미켈슨, 토마스 보 라센, 수시 울드

북유럽, 좁게는 덴마크영화가 공유하는 특징들이 몇 가지 있다. 건조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송곳처럼 날카롭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은 덴마크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런 인식을 안겨준 대표적인 영화가 다름 아닌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더 헌트>다. 영화는 다정하고 선량한 유치원 교사 루카스(매즈 미켈슨)가 한 어린아이의 거짓말로 아동 성추행범으로 몰리는 과정을 그린다. 거짓과 진실의 경계에서 타인에 공감하지 않는 합리와 이성이 얼마나 난폭해질 수 있는지를 서늘하게 그리는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현대판 ‘마녀 사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다고 믿고 있던 것을 배신하는 이러한 내러티브는 <더 길티>에서도 여지없이 반복되어 정의와 진실에 대한 관객의 맹목적인 믿음에 균열을 일으킨다.

형식: <론 서바이버>(2013)

감독 피터 버그 / 출연 마크 월버그, 테일러 키치, 벤 포스터, 에밀 허시

2005년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서 펼쳐진 ‘레드윙 작전’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탈레반 부사령관을 제거하기 위해 4명의 네이비실 정예요원이 투입된 이 작전에서 홀로 살아남은 마커스 러트렐이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논픽션 소설로 옮겼다. 200명 이상의 탈레반군에 포위된 네이비실 요원들의 사투는 당연히 치열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가는 이 사연을 실화 이상으로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 육군과 해군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영화는 실제 차량과 무기, 헬기 등을 사용하는 등 리얼리티를 높이는 데 공을 들였다. 그중 백미는 바로 사운드 디자인이다. 산악지대 전투에 맞춰 총탄마다 격발음, 공명음, 피탄음까지 모두 따로 사운드를 채집하여 조합하는 등 사운드를 통한 공간감을 완성시킨다. 마치 관객이 실제 산속에 갇힌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사실적이다. <더 길티>와 방향은 다르지만 ‘듣고 상상하고 체험하는’ 영화란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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