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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시대 영화 계보학 ①] 로만 폴란스키 영화 소비가 비윤리적이라 말할 수 없다. 듀나 평론가가 말한다

창작자의 윤리를 말하다, ‘로만 폴란스키가 쏘아올린 작은 공’. 세자르영화제가 로만 폴란스키에 감독상 주며 촉발된 논란 ‘예술과 창작자를 분리할 것인가’

지난 2월28일 제45회 세자르영화제에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신작 <언 오피서 앤드 어 스파이>(J’accuse)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와 동시에 예술과 창작자의 윤리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로만 폴란스키는 1977년 미국에서 아동 강간 혐의에 대한 범죄를 인정한 이후 무려 40여년간 유럽에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 와중에도 로만 폴란스키는 꾸준히 영화를 찍었는데 이번에 프랑스 영화계가 그의 손을 잡아주며 문제를 촉발시킨 것이다. 프랑스 문화계는 작품은 그저 작품으로만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안팎으로 터져나오고 있는 저항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만도 없다. 이건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과 창작자를 분리할 것인가’에 관한 고답적인 질문이 되어서도 안된다. 로만 폴란스키와 세자르의 선택이라는 명백한 상황을 목격한 이상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드러내야만 한다. <씨네21>에서는 듀나와 박우성 영화평론가에게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이 두편의 서로 다른, 날카롭고 단단한 의견이 당신의 판단을 돕는 지팡이가 되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차이나타운>

<씨네21>로부터 ‘예술가의 윤리적 문제와 창작물을 분리할 수 있는가?’란 질문을 받았다. 여기서 그 예술가가 얼마 전에 세자르영화제에서 <언 오피서 앤드 어 스파이>로 각색상과 감독상을 받은 로만 폴란스키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답변을 하기 전에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분리할 수 있는가?’는 사실과 당위 중 어느 쪽을 의미하는가. 사실을 가리키는 거라면 가능하다. 폴란스키가 누구인지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폴란스키의 영화를 틀어준다면 이 관객은 예술가와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서 감상이 가능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폴란스키의 영화에서 감독이 미성년자를 강간하고 유럽으로 달아난 남자의 작품이라는 걸 보여주는 단서를 찾기는 어렵다.

이런 실험은 불필요하다. 지난 40여년 동안 로만 폴란스키는 이 분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세계에서 살았다. 폴란스키가 정당한 법의 처벌을 받지 않은 미성년자 성폭행범이라는 건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폴란스키는 그 뒤로 꾸준히 작품을 찍었고 쟁쟁한 배우와 스탭들이 이 남자와 함께 일하는 데에 어떤 주저함이 없었다. 저명한 예술가가 범죄의 처벌을 피해도 된다는 이상한 생각이 당연시되었고 이는 아주 최근까지 계속되었다. 이를 멈춘 것은 미투 운동이었다. 폴란스키가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박탈당한 게 겨우 지난 2018년이라는 걸 잊어선 안된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건 몇년 안된다. 그리고 당시엔 어떻게 생각했건 지금의 기준이 옳다.

질문을 당위로 옮겨보자. <물속의 칼> <혐오> <악마의 씨> <차이나타운>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사실 자체는 아직까진 부정할 수 없다. 폴란스키는 몇편의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다. 볼 생각은 없지만 <언 오피서 앤드 어 스파이>도 아마 잘 만든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좋은 작품이라는 사실이, 이들이 로만 폴란스키라는 성범죄자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분리되는가?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영화제나 영화상에서 이 작품을 감독과 분리해서 순수하게 작품만 보고 평가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역시 아니다. 애당초부터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른 스타일로 이야기하는 영화들을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을 세우는 건 불가능하다. 수많은 정치적 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게 정상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로만 폴란스키에게 상을 주는 행위가 비정치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는 적극적인 정치적 행위로 보아야 한다. 로만 폴란스키가 드레퓌스에게 자신의 사정을 덧씌우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게 명백하다면 더욱 그렇다.

<악마의 씨>

그럼 다음 문제로 넘어가자. 이제 폴란스키의 작품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이상 소비하지 않는다’는 아주 쉽게 나올 수 있는 답이다. 이는 윤리적인 선택이기도 하지만 생리적인 반응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만 해도 앞으로 한동안 폴란스키의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은 없는데, 윤리성을 떠나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폴란스키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배우 로레타 영클라크 게이블의 관계를 알게 된 뒤로 몇년 동안 클라크 게이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배우 커크 더글러스 부고를 접하고 <과거로부터>와 <스팔타커스>의 블루레이를 틀지 않았던 것도 최근 몇년 동안 쏟아져 나온 의혹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감독이나 배우 때문에 익숙한 고전을 감상하기가 껄끄러워지는 사례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아는 건 빙산의 일각일 것이기에. 여기서 우리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이들의 작품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 윤리적이라면, 이들의 작품을 소비하는 것은 비윤리적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시 폴란스키에게 돌아가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신작에 참여하지 않는 것, 신작을 감상하지 않는 것, 세자르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의 결과를 비난하는 것, 면책특권이 있는 위대한 예술가의 판타지를 깨는 것. 가장 좋은 건 역시 신비스러운 보호를 받으며 정당한 처벌을 피하고 있는 폴란스키를 법정에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폴란스키의 이전 작품을 보지 않는 것은 사정이 다르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유는 영화가 감독만의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물속의 칼>은 로만 폴란스키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악마의 씨>와 <차이나타운>에서 로만 폴란스키의 공헌이 그 정도였을까? 아니다. 여기서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은 폴란스키가 아니라 원작과 각본을 쓴 아이라 레빈로버트 타운이다. 폴란스키가 없었어도 이 영화들은 만들어졌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영화와 다른 모양이 됐겠지만 영화의 내용과 주제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더 좋았을 수도 있다(개인적으로 나는 <차이나타운>의 바뀐 결말을 싫어한다). 그렇다면 폴란스키가 감독이라는 이유로 이들 작품에 들어간 다른 사람들의 공적을 잊는 것이 옳은 일인가?

<물속의 칼>

둘째 이유는 한 사람의 영화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예술 작품은 수많은 맥락 안에서 존재한다. 폴란스키의 초기작은 냉전시대 동유럽 영화사의 장대한 흐름 안에 큰 덩어리로 존재하며 폴란스키를 빼면 이 흐름은 깨져버린다. <악마의 씨>를 빼면 오컬트 호러영화의 역사에 큰 구멍이 생긴다. <차이나타운>을 빼면 1970년대 미국 영화사와 네오 누아르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기가 힘들다. 만약 어떤 영화 애호가가 “나는 성범죄자의 영화를 보지 않겠어”라고 선언한다면 난 그 선택의 윤리성을 옹호하고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오컬트영화나 네오 누아르 영화를 만들거나 연구하는 사람이 <악마의 씨>와 <차이나타운>을 보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무책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를 건너뛰면 폴란스키의 영화 몇편만 건너뛰는 게 아니다. 이들에게서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영화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부당한 권력을 쥔 남자들의 영화 대신 지금까지 부당하게 무시되었던 여성 영화인의 영화에 집중하겠어”는 당연하고 생산적이고 정당하지만 그 남자들의 작품을 보지 않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마니> 촬영 당시 배우 티피 헤드런에게 저지른 일 때문에 히치콕의 영화를 보이콧하는 건 충분히 이해간다. 하지만 그 이유로 <현기증>을 보지 않은 관객이라면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몇몇 결정적인 장면을 감독이 의도한 맥락 안에서 온전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수많은 페미니스트영화들이 남성 중심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에 대한 답변, 미러링(특정 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자기들이 당한 방식을 그대로 돌려주는 행위), 공격, 패러디, 조롱의 형식을 취한다. 이들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독립적인 작품으로만 본다면 감상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하건 경험과 지식의 부족은 도움이 안된다.

예술사의 리스트에 기록된 과거의 고전들을 흠 없고 고결하고 완벽한 예술 작품의 집합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을 그렸던 옛날에는 그게 그럴싸하게 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순결한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사를 포함한 예술사는 불완전하고 종종 끔찍한 사람들이 만든 불완전하고 종종 불쾌한 작품들로 이루어진다. 옛 시대의 작품을 올바르게 감상하는 작업은 현대인의 관점으로 이 거칠고 더러운 이야기 속에서 어떤 미화나 삭제 없이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 과거 속에서 로만 폴란스키는 쉽게 망각 속으로 던질 수 없는 수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기분 나쁘지만 우린 이들을 사진 속 스탈린의 정적들을 에어브러시로 지우듯 임의로 삭제할 수 없다. 우리가 후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이들 창작자가 어떤 사람이었고 이들 영화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최대한 정직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잊히고 폴란스키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망각의 순서를 정하는 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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