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박찬욱표 ‘종합선물세트’이다. 이러저러한 장르적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진 일종의 ‘초패러디’인 셈이다.
우선, 이 영화는 그 구성이 너무 치밀하고 완벽해서 오히려 모든 인과관계가 ‘우연성’으로 조작된 듯 보이는 일종의 ‘범죄스릴러’이고 잔혹한 ‘필름누아르’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일련의 엽기적인 죽음들에 관한 극도로 축약된 ‘검찰보고서’이기도 하다. 잘 알다시피 수사보고서는 거꾸로 쓰여진다. 결과가 먼저 있고 원인이 뒤따른다. 먼저 처벌해야 할 ‘죄’가 있고, 나중에 그 행위의 그럴듯한 ‘동기’가 구성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필요한 잉여가 전혀 없다. 이 영화는 마치 수사보고서처럼 군살 하나 없이 철저한 ‘인과율’로 꽉 짜여 있다. ‘결과’는 황당한데, 그러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동기’는 지나칠 정도로 풍부하고 설득력 있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류’가 그토록 황당할 정도로 잔인하게 ‘장기밀매 패밀리’를 처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영화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2] - 변성찬 비평 <복수는 나의 것>
-
누아르를 계승해가는, 포스트누아르 또는 네오누아르라고 불릴 수 있는 진영 중에는 이런 두 가지 부류들이 속한다. <폐쇄구역>의 제임스 폴리처럼 외설적 아버지의 형상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악질 경찰>의 아벨 페라라처럼 존재론적인 것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면서, 누아르의 주제에 닿아 있는 어느 하나를 심화시키는 부류와 <블루스틸>의 캐서린 비글로처럼 팜므파탈을 옴므파탈로 대체하고, <유주얼 서스펙트>의 크리스토퍼 매커리, 브라이언 싱어처럼 1인칭 보이스 오버의 회고를 거짓 내러티브로 뒤바꾸면서, 전체 누아르 컨벤션 중 일부를 변주하는 부류.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는 아마도 후자의 경우에 속할 것이다.
누아르 역사에 수없이 등장했던 직업인 보험수사관이 전직인 레너드, 그가 들려주는 1인칭 보이스 오버, 그의 기억손실증을 악용하는 팜므파탈로서의 나탈리, 그의 주위를 맴도는 정체불명의 사내 테드. <메멘토>는 누아르 형식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3] - 정사헌 작품비평 전문 <메멘토>
-
1981년 서울대 사회학과 입학, 88년 졸업, 93년까지 노동운동을 했고 현 대입학원 영어강사. 불혹의 나이에 20년 전 꺾였던 꿈에 다시 도전한 변성찬씨의 경력에는 고단한 시대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자 남은 것은 저녁 7시부터 밤 12시30분까지 이어지는 학원수업이었고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에서 그는 영화라는 출구를 찾아냈다. 극장을 찾을 기회가 거의 없는 일상이지만 변성찬씨는 귀가하는 새벽 2시부터 아침 6시까지 비디오를 보며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처음엔 여흥과 오락일 뿐이던 영화가 본격적인 탐구의 대상이 된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 나서다. 할리우드 못지않은 세련된 한국영화가 쏟아지면서 그의 몸에서 발언하고픈 욕망이 꿈틀댔다. 혼자 책과 영화를 보고 인터넷 영화동호회에서 대화를 나누며 영화평론의 가능성을 타진했던 변성찬씨가 이번에 <씨네21>에 보낸 원고는 대중적으로 공개하는 그의 첫 작품이다.
-언제부터 영화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4] - 최우수상 수상작 변성찬 인터뷰
-
홍상수 감독이 네편의 작품을 통해서 일관되게 다루어온 소재(주제)는 한마디로 ‘삼각관계의 심리학’이었다. 감독(작가) 홍상수는 그 보편적인 주제(어떤 의미에서는 상투적이기도 한)를 독특한 ‘형식미학’으로 창출해낸 자신만의 공간 속에 던져놓고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중층적인 남녀 사이의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는 많은 ‘불륜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 어떤 인물도 그 관계의 부도덕성에 대한 갈등이나 자의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자의식의 부재란 곧 ‘사회(제도)와 개인’간의 대결의식이 없음을 뜻한다. 이렇듯 제도와의 긴장을 상실한 인물들은 결국 홍상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실험실’ 속의 모르모트와 같다. 다시 말하자면 홍상수의 영화공간은 결코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라 추상화된 ‘실험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실험실의 주요한 공간적 표상이 그의 영화에 끊임없이 반복되어 등장하는 ‘술집’과 ‘여관’이다. 홍상수는 이 밀실적 공간에서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5] - 이론비평요지_홍상수의 작품세계
-
-
정사헌(28)씨는 영화와 담담하지만 오랜 연애를 했다. 고교 시절 시네필의 자부심은 대학이라는 대처에 나와 곧 무너졌지만, 그는 대학 1학년 때 영화평을 쓰겠다고 먹은 마음을 군복무 기간 동안 잘 간수했다가 제대 뒤 영상원으로 학적을 옮겼다. 그쯤이면 추억담도 많을 만한데 그의 머릿속은 온통 현재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반한 영화의 기억을 묻는 질문을, 대신 최근 관심을 두는 영화를 말하면 안 되겠냐고 부드럽게 물리칠 만큼. 그럴 만도 하다. 영상원 예술사 과정 영상이론과 졸업반인 그는 이제 영화와 어떤 식으로 동거하며 살아갈 것인가 현실적인 방도를 결정해야 하는 시점을 맞았다. 그러나 평론과 이론, 연출 가운데 어떤 길을 고르건 아직 영화는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이 남은 주제라는 ‘공복감’이 정사헌씨를 이끄는 에너지가 될 거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지난해 <씨네21> 평론상 공모에 ‘한국영화에 나타난 리미날리티(liminality: 도피, 해방, 축제의 공간) 공간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6] - 우수상 수상자 정사헌 인터뷰
-
분절의 항목을 근거로 재배열의 행위를 자극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인식하기 위한 존재론적 질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도록 하고, 변환하게 하는 것은 인식을 구성하는 우리의 에피스테메, 즉 인식가능성의 조건이다. 관행적인 되풀이를 불안정하게 하고, 틈새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배열 집합들과는 전혀 다른 인식의 조건을 내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꽃섬>에서 달라 보이는 것은 언제나 다른 것이 아니다. 남편과 두식이 닮아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달라 보이는 것이 꽃섬의 질서에 의해서 같은 장력 위에 동일한 것이 될 수도 있음을 표상한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동일자로부터 타자를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의심에 찬 질문이 들어 있다.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에 있어서 혜나 어머니의 친구, 박희진에 대한 오해는 정확히 그 반대의 경우에 있다. 다른 것이 같을 수 있다면, 맞다고 생각했던 것은 틀릴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7] - 이론비평요지_<꽃섬>의 질서
-
‘슈팅 투 킬-인디 프로듀서는 문제적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장벽을 돌파해왔는가’. 자신의 영화 여정을 담은 책의 제목처럼, 크리스틴 바숑은 미국영화계에 풍부한 논쟁을 제공해온 독립영화의 프로듀서다. 토드 헤인즈의 91년작 <독약>을 필두로 그가 제작한 영화들은 저예산의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 분투해왔고, 동성애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도발적인 진술로 이성애 중심 사회의 편견에 문제를 제기했다. 96년 영화사 킬러 필름즈를 설립하고 더욱 다양한 독립영화 제작에 힘을 쏟고 있는 바숑을 전주에서 만났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 마련된 회고전을 계기로 한국을 찾은 바숑은 미국 독립영화의 대모란 수식어가 어울리게 넉넉한 인상이었다. 그녀 자신도 레즈비언으로 여자친구와 입양한 딸과 함께 대안가족을 이뤄서 살고 있다.제작자로 처음 이름을 올린 <독약>은 90년대 초반 뉴퀴어시네마라 불리는 흐름의 시작이라 할 만하고, <키즈> <소년은 울지 않는다> 등등
미국독립영화계의 대모 크리스틴 바숑, 7문7답
-
62년생인 크리스틴 바숑은 70년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피터 보그다노비치, 로버트 알트먼 등이 미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던 ‘전설적인 시절’에 열성적인 관객이었다. 뉴욕에서 나고 자란 그는 뉴아메리칸시네마와 유럽 예술영화를 찾아 극장을 드나들며 10대를 보냈다. 브라운대에서 기호학을 전공한 뒤 파리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 크리스티앙 메츠 등과 영화에 대한 토론을 나누며 1년을 보냈다. 뉴욕으로 돌아오자마자 영화현장에 뛰어들었다. 뉴라인시네마의 공포영화를 비롯해 많은 영화들에서 제작부 조수로 커피를 나르는 잔심부름부터 프로덕션 로케이션 매니저, 프로덕션 매니저를 거치면서 제작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고. 바숑은 80년대 중반 대학 동창인 토드 헤인즈와 어패러투스 프로덕션을 만들었고, 3년간 약 15편의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경영 연습’을 치렀다. 91년 첫 장편영화 <독약>으로 프로듀서에 입봉한 뒤, <졸도> <고 피쉬> <키
크리스틴 바숑과 킬러필름즈
-
올해 전주영화제는 남미영화의 변화를 가장 주목할 경향으로 내세웠다. 군부의 몰락과 경제적 불안 속에서도 그들은 동시대 젊은이들의 삶을 관찰하거나 혼자 힘으로 자신만의 영화를 완성시켰다. 쫓기듯 떠난 땅에 다시 돌아와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이도 있다. 올해 전주를 찾은 남미 감독은 <삼인조 택시강도>의 올란도 루버트와 <자유>의 리산드로 알론소, <끽연구역>의 베로니카 첸 세명. 이중 망명지에서 칠레로 돌아온 루버트와 과거 제3영화를 알지 못하는 26살의 젊은 아르헨티나 감독 알론소를, 전주영화제 서동진 프로그래머가 만났다. 스무살 차이가 나는 두 감독은 과거의 영화에 대해선 반대의 입장을 보이면서도 현재의 영화에 관해서는 서로 깊은 교류를 나눴다.“이전 세대로부터의 영향 거의 없다”서동진 이번 전주영화제에서 남미영화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아시아 지역을 처음 찾았다. 먼저 올란도 루버트 감독에게 자기 소개를 부탁한다.루
서동진 vs 남미영화의 기수들 올란도 루버트와 리산드로 알론소
-
올란도 루버트와 <삼인조 택시강도>올란도 루버트는 아옌데가 집권하던 시절 칠레에서 본격적인 영화작업을 시작했다. 아옌데 정권은 세계에서 최초로 선거를 통해 수립된, 시대의 희망이 집결됐던 정권.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영화인뿐 아니라 모든 예술인이 아옌데에게 열광했다”고 말하는 루버트는, 아옌데가 군부에 살해된 뒤 작업중이던 노동운동 다큐멘터리를 들고 망명길에 올랐다. 이번 전주영화제를 찾은 <삼인조 택시강도>는 루버트가 오랜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칠레로 돌아와 만든 첫 장편이자 그의 세 번째 영화이기도 하다.<삼인조 택시강도>는 말 그대로 택시를 타고 강도행각을 벌이며 돌아다니는 세 남자의 이야기다. 택시기사 율리시스는 성실하게 살면서 할부금을 갚고 싶지만 협박에 못 이겨 강도질에 동참한다. 그러나 차츰 액수가 커지면서, 율리시스는 한꺼번에 할부금을 갚고 편안히 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 역설적인 것은 나머지 두
<삼인조 택시강도>와 <자유>
-
나 홀로 극장, 비디오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영화관의 3분의 1도 채 안 되는 대여료에 섹스이건 잔혹한 폭력이건 상관없이 나만의 영화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 ‘비디오 오리지널’, 즉 극장에서 개봉을 하지 않는 비디오 전문영화인 일본의 V시네마는 이러한 배경에서 태어났다. 주로 20대 남성을 타깃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취향을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본의 V시네마는 89년 <크라임 헌터>로 시작했다.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비디오의 황혼이 찾아온 지금도 여전히 1년에 100여편이 제작되고, V시네마에서 출발한 미이케 다카시라는 거장도 낳았다. 스타와 장르라는 두 가지 안전판 사이에서 철저하게 상업적이고, 또 그만큼 자유로운 실험이 가능했던 V시네마는 그러나 이제 전환점에 서 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이미 전성기가 지난 일본 V시네마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부족한 장르영화의 가능성을 찾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일본 V시네마
B급영화광 김봉석, 일본 V시네마 현장을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