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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을 두고 프랑스의 작가 장 지로두는 ‘짐 없는 여행객’이라 불렀다. 이 어구를 제목으로 삼은 또 다른 프랑스 작가 장 아누이의 희곡은 이제 짐작할 수 있듯이 망각의 강을 헤엄쳐야 하는 인물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그 인물 가스통이 꽤 흥미로운 캐릭터인 것은 그로서는 잃어버린 과거를 차라리 복원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비롯한다. 이래저래 되찾아진 기억은 그가 예전에 악행만을 일삼던 ‘괴물’이었음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멀리 나아가지 말고 딱 이 정도의 기본 전제에서만 본다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는 가스통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인물, 즉 기억을 잃기 전의 삶이 그리 평탄치 않았던 인물에 대한 영화다. 그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카우리스마키는 멀리는 <마음의 행로>(머빈 르로이, 1942)로부터 가까이는 <메멘토>(크리스토퍼 놀란, 2000)에 이르기까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 무
망각이란 건설적인 것, <과거가 없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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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상 쇼윈도를 들여다보던 남자, 매튜(조시 하트넷). 주인이 권해주는 화려한 반지들 앞에서 다만 망설일 뿐, 결국 반지를 사지 못한다. 그의 부유하고 아름다운 약혼녀는 그의 장래까지 보장해줄 사람이지만 어쩐지 그는 확신이 없어 보인다.
카페 공중전화 부스에서 새어나오는 낯익은 음성에, 이 남자는 탄식에 가까운 이름 하나를 뱉어놓는다. “리사!” 2년 전 연락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랑의 환영. 심히 불안해 보이는 그는 더욱 불안한 표정이 되어 그 환영을 쫓아간다. 그녀는 사라지고, 공중전화 부스에는 호텔 키가 남아 있다.
약혼녀의 배웅을 받으며 예정된 출장길에 오른 그는, 비행기를 타려다 말고 몰래 빠져나와 리사(다이앤 크루거)의 흔적을 쫓기 시작한다. 결국 찾아낸 그녀의 아파트는 2년 전과 똑같은 향기와 낯익은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선 ‘리사’(로즈 번)는 이름만 같을 뿐, 2년 전의 리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1996년 뱅상 카셀,
<라 빠르망>의 할리우드판 리메이크작,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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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진시황릉의 비밀>은 희박한 의미에서만 성룡 영화의 고유성을 갖고 있다. 그보다는 그 고유성을 어떻게 아시아 블록버스터의 시류 안으로 합류시킬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생긴 흠이 더 많은 영화다.
진시황제 제위 시절, 몽이 장군(성룡)은 시황의 후궁인 옥수(김희선)를 사랑하지만 단지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위험에 처한 옥수를 구하려다 절벽 아래로 함께 떨어지는 두 사람. 여기까지는 꿈이다. 고고학자 잭(성룡)은 그런 꿈을 계속 꾼다. 그즈음 친구 윌리엄(양가휘)의 제안을 받아들여 무중력 위에 떠 있는 관과 칼이 있다는 인도 다사이 왕국의 유적지를 찾아간다. 무중력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신비의 암석 그리고 꿈에서 보았던 옥수의 초상화, 몽이 장군의 칼 등을 발견하면서, 잭은 자신의 반복되는 꿈과 진시황릉의 풀리지 않는 비밀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음을 직감한다.
<신화…>가 아시아 블록버스터의 기질을 갖추기 위해 선택한 영화적 방법은 대립각을
아시아 블록버스터로 향하는 성룡영화,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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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여고생 납치사건>은 사이코드라마와 에로영화 사이를 위태롭게 오간다. 시종일관 낮고 굵은 목소리와 무표정한 얼굴로 납치범 이와조노를 충실히 연기한 중견배우 다케나카 나오토의 에너지를 빌려 전반부는 심리묘사를 통해 긴장감을 끌어내는 드라마가 유지된다. 그러나 후반부는 급격히 조악한 에로영화로 돌변한다. 고지마 히지리의 관능적인 육체를 보여주기 위해 20여분 동안 집중된 정사장면은 개연성이나 심리 묘사도 부족하고, 화면의 아름다움도 느껴지지 않도록 관습적으로 구성됐다.
43살 독신남 이와조노(다케나카 나오토)는 조깅 중인 여고생 구니코(고지마 히지리)를 납치한다. 이와조노는 그녀를 수갑과 밧줄로 묶고 출근하기를 반복한다. 여름날 오래된 다가구주택에 갇혀 사육당하는 구니코는 점차 자신을 돌봐주고 설득하는 이와조노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급기야 두 사람은 빨간색 오픈카를 타고 온천여행을 떠난다. 이와조노는 장난삼아 구니코를 제압하던 수갑을 자신의 손에 채우고 구니코는 이를
프로이트와 ‘정사’(情死)의 결합, <신주쿠 여고생 납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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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강렬한 이미지로 시작한다. 비내리는 거리를 내려다보는 전지전능한 시선. 그 아래 사고로 나뒹구는 오토바이와 피흘린 채 쓰러진 소녀가 있다. 소녀는 병원으로 옮겨지고 그녀의 일기를 읽던 간호사는 소녀가 다름 아닌 그 병원의 외과의사 띠모떼오(세르지오 카스텔리토)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수술을 집도하다가 딸의 사고 소식을 접하게 된 띠모떼오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동료에게 딸의 수술을 맡기고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린다. 그는 딸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는 몇 시간 동안 15여년의 세월을 거슬러올라가 한 여인과의 첫 만남, 강렬했던 사랑과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뒤엉킨 과거의 기억을 되짚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그 불행의 원인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으려고 애쓴다. 그 불운이 설령 자기 자신의 행동이나 마음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에도, 그것을 자신이 의식 혹은 무의식 중에 저지른 어떤 죄와 연관된 벌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기 때
15년 전 강렬했던 사랑, <빨간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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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느낌이 좋다. 보스턴에서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린지(드루 배리모어)는 어느 날 자기 앞에 나타난 수학교사 벤(지미 팰론)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그동안 사귀던 남자친구들과 달리 벤은 친절함과 참을성도 있고, 센스와 유머도 갖추고 있는 너무 귀여운 남자다. 망가져버린 첫 데이트 날, 벤이 보여준 헌신적인 행동에 감동까지 받은 린지는 그와 진지하게 사랑을 해볼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린지는 핵심을 찌르는 친구들의 질문을 너무 쉽게 간과했다. “뭔가 석연치 않아. 그렇게 괜찮은 남자가 왜 아직까지 이 연애시장에서 팔리지 않았을까?”
하긴, 린지가 벤과 사귀기 시작한 겨울철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열혈 팬인 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을 게다. 하지만 봄이 다가옴에 따라 벤의 감춰졌던 ‘광기’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23년 전 보스턴의 홈구장 펜웨이 파크에 가서 팬이 된 이후, 외삼촌으로부터 물려받은 평생 관람권으로 11년 동안 보스턴 레드삭스의
패럴리 형제의 깔끔한 로맨틱코미디, <날 미치게 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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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니체의 이 말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은 끔찍하지 않다고 반박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생이 끔찍하다면 그것을 거듭 겪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되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아직 생이 ‘어떠하다’고 단언할 만큼 생을 알지 못한다. 다만 세상이 달리 보이고, 인생이 달라지는 어떤 경험에 대해선 알고 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바로 그 ‘사랑’의 기적을 찬미하는 이야기다. 천진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멀티플렉스 재건축 압력을 받는 낡은 극장의 주인 곽 회장(주현)은 간이 커피숍을 운영하는 배우 지망생 오 여인(오미희)을 흠모한다. 극장을 찾은 외판원 창후(임창정)는 선애(서영희)와 살림을 차린 가난한 새신랑이다. 창후에게 카드 대금 독촉 전화를 걸어대는 성원(김수로)은 전직 농구선수로, 어린이돕기 성금을 모금하는 TV 프로에서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진아를 소개받는다. 진아의 친구인
‘사랑’의 기적을 찬미하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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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이름의 제목, <리플리스 게임>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리플리> 시리즈 중 후기작에 속한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리플리는 줄곧 모호한 성정체성과 비정한 범죄자의 이미지를 지녀왔다. 이는 이미 두 차례나 영화화된 <The Talented Mr. Ripley>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그 리플리를 이번에는 <비엔나 호텔의 야간배달부>로 알려진 릴리아나 카바니가 조율한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선과 악의 경계를 사유하던 카바니에게 리플리는 더할 나위 없는 텍스트였을 것이다.
우아함 이면에 잔혹성을 숨긴 사기꾼 리플리와 이 철두철미한 냉혈한을 감히, 비난하던 조나단. 그에 대한 리플리의 복수심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리플리는 조나단이 백혈병에 걸려 죽어간다는 점을 이용해 자신에게 들어온 살인청부를 그에게 넘긴다. 그러나 거액의 돈을 제시받고 살인을 결심한 조나단과 조나단의 행보를 관망하던 리플리 사이에 묘한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우아한 스릴러. <리플리스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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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유머 감각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보글보글 스폰지밥>(JEI, 원제 <The SpongeBob SquarePants>, EBS에서는 <네모네모 스펀지송>으로 방영)을 9월30일부터 CGV에서 만난다. 기괴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단순하게 반복되는 개그, 자신의 몸으로 설거지는 물론 화장실 변기까지 청소하는 정체 모를 스펀지와 해산물(?)들의 관계. 우정인지 적의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의 기묘한 관계와 비키니 보톰시티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들은 결국 보는 이의 폭소를 터뜨린다. 보고 있자면 웃을 수밖에 없는 <보글보글…>의 멋진 유머 센스와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정신없이 넘나드는 연출 방식은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데 성공했고, 국내에서도 많은 어린이들과 성인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극장용 작품으로 만나는 <보글보글…>은 TV시리즈와 달리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다. 수많은 TV애니메이션들이 극장용으
재미는 사라지고, 기괴함만 남다, <보글보글 스폰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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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우영구 형사는 “판단은 판사가 하고 변명은 변호사가 하고 용서는 목사가 하고 형사는 무조건 잡는 거야”라고 용의자의 애인에게 자신의 직업윤리를 고백한다. 상기 네 가지 직업 중 유일하게 ‘일하는’ 사(事)자를 쓰는 업종이 바로 형사(刑事)다. <강력3반>은 그런 형사라는 ‘직업’의 고단함을 이야기한다. 다행히 범인을 ‘무조건 잡더라도’ 수많은 서류를 구비하느라 밤을 지새다보면 여자친구, 자식들, 아내는 이미 그들을 떠나간 지 오래다. 경찰헌장의 문구처럼 ‘사회의 안녕과 질서는 유지’되지만, 정작 형사 개인과 가정은 파탄나기 십상이다.
수사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형사 홍주(김민준)는 여자친구 태희 때문에 경찰복을 벗으려 한다. 그러던 중 대형 마약사건이 배후를 드러내고, 고과점수 올리기에 급급하던 강력3반은 본격적인 수사 체제로 돌입한다. 그들은 재철(김태욱)이 부상당하는 어려움 끝에 마약밀매단의 핵심인 서태두(윤태영)를 포착한다
형사라는 ‘직업’의 고단함, <강력3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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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비슷한 외모나 느낌을 주는 상대하고만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경우, 그 외모 또는 느낌의 원형은 대개 첫사랑에서 비롯된다. 잘 나가는 대입학원 수학강사 조인영(김정은)이 수강생인 이석(이태성)을 사랑하게 된 상황 또한 비슷하다. 인영은 이석이 자신의 첫사랑과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열세살 터울인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면서 주위의 시선은 따가워지지만, 인영은 “누구랑 키스하고 싶은 게 나쁜 일이야?”라며 당당하게 사랑을 지켜나가려 한다.
<사랑니>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이름이 같은 여러 인물들과 독특한 시간배열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 있어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한다. 서른살 조인영과 열일곱 이석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와중, 우리는 간간이 끼어드는 열일곱 조인영(정유미)과 열일곱 이석의 에피소드를 보게 된다. 명백히 서른살 조인영의 회상으로 보이던 이 대목은 열일곱 조인영이 이석을 만나기 위해 서른살 조인영의
영화라는 매체가 품고 있는 환상성의 실체, <사랑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