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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과 더불어 TV 퀴즈쇼는 자본주의가 인색하게나마 베푸는 이상한 소득 재분배 방식이다. TV는 보통 사람이 영웅이 될 수도 있다는 환상을 부풀리고, 보통 사람은 퀴즈쇼로 ‘누구나 일생에 15분쯤은 유명해질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환상에 동참한다. TV가 부풀린 이런 환상의 무대 뒤편을 조명하는 <퀴즈쇼>, 또는 퀴즈쇼에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집착을 보여준 <매그놀리아>의 에피소드는 퀴즈쇼가 갖는 두 얼굴에 대한 예리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미스터주부퀴즈왕>은 퀴즈쇼라는 자극적인 소재에 여/남의 역할 교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더한 영화다. 남편 한석규는 전업주부가 되고 TV 리포터인 아내 신은경은 가정도 잊은 채 일에 몰두한다.
퀴즈쇼에 대한 성찰이 없다고 해서 나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녀의 역할 교체에 대한 시대상의 반영이 날카롭지 못하다고 해서 재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퀴즈쇼에 대해서도 설렁설렁 넘어가고, 성역
최상의 재료로 만든 매력없는 음식, <미스터 주부퀴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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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매우 염세적인 인생관을 가졌어요. 우리가 함께 다니려면 당신이 알아두는 게 좋을 겁니다. 난 인생은 끔찍한 삶과 비참한 삶으로 나뉘어 있다고 느낍니다. 그 두 범주로 말입니다. 끔찍한 삶이란 말하자면, 모르겠어요, 막다른 지점에 도달한 경우랄까요…. 장님이거나 불구이거나….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견뎌나가는지 모르겠어요. 나에겐 놀라울 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비참한 삶에 속합니다. 그게 전부죠.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당신이 비참한 쪽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당신이… 비참하다는 건 운이 좋다는 거거든요….” 우디 앨런이 몸의 우스꽝스러운 전시를 뒤로 하고 철학적 억견의 세계로 들어섰을 때 거기에는 <애니홀>(1977)이 있었다. 그 자신조차 전환점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주인공 앨비는 이렇게 삶을 불운하거나 덜 불운한 양편으로 나누는 것 이외에는 몰랐다.
25년이 지난 뒤(<헐리우드 엔딩>은 2002년 제작된 영
순진한 희망으로의 역전, <헐리우드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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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객에게 검은 신체와 에너지의 연장과도 같다. 내부에서 뻗어나온 기는 손끝을 거쳐 검으로 이어지며 직선을 완성하고, 그 선은 다른 검과 맞부딪치기 위해 대기를 가르는 곡선을 그린다. 영혼과 금속이 일체가 되어 빚어내는 검광(劍光). 서극이 18반의 무기 중에서도 굳이 검을 택한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극은 양우생의 <칠검하천산>을 각색하면서, 천산에서 내려온 검객들이 아닌, 일곱 자루의 검에게 더 많은 애정을 주었고, 사막의 먼지 속에서도 빛을 뿜는 검의 신화를 완성했다.
이 영화의 원작 <칠검하천산>은 김용과 함께 무협소설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양우생의 초기대표작이다. 양우생은 <백발마녀전>과 <칠검하천산>의 인물들을 엮어 느슨한 시리즈를 만들었지만, 영화 <칠검>은 그 관계를 무시하고 서부영화와도 같은 짧은 드라마만을 남겨두었다. 아직은 복명(復明)운동의 기운이 남아 있는 청조 초기, 황제는 무예수련을 금하는 ‘금무령
사막의 먼지 속에서도 빛을 뿜는 검의 신화, <칠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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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계 미국인이 주인공인 영화’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레퍼토리가 있다. 세대 갈등과 정체성 혼란의 테마,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 저예산 독립 제작 방식, 스테레오 타입에 갇힌 캐릭터. 지난해 여름 미국에서 개봉한 <해롤드와 쿠마>에는 그중 해당사항이 하나도 없다. 스타도 아니요 백인도 아닌 아시아계 청년 둘을 짝지운 이 영화는 개봉 주말 흥행 7위라는 예상 밖의 선전을 펼쳤고, 무명에 가깝던 한국계 배우 존 조는 <피플>의 ‘매력남’ 리스트로 뛰어들었다. 아마도 이 영화와 배우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가벼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변에 흔하지만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시아계 친구들의 모습이 코믹하게 녹아든 이 판타지적 성장담은 보는 이가 누구이건 받아들이고 즐기기에 별 이물감이 없다.
해롤드와 쿠마는 흔히들 ‘루저’라고 말하는 그런 인간형이다. 한국계인 해롤드(존 조)는 소심한 일벌레로 직장에서 노골적으로 무시당하고 이
아시아계 친구들의 판타지적 성장담, <해롤드와 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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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짧다. 그러나 이야기는 엉킨 실타래 같다. 한국판 제목만 보면 일본으로 간 서양 10대 여성의 성 편력기 같지만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복잡한 영어 원제만큼이나 이 영화는 장르와 인간에 대한 복잡한 탐구를 담고 있다. 원제는 ‘성층권, 최고 수준의, 고도로 추상적인’ 등의 뜻을 품고 있다.
도쿄의 밤거리를 뒤로 하고 금발의 젊은 여성이 어딘가를 보고 있는 영문 포스터를 보면 이 영화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연상시킨다. 스웨덴에 사는 안젤라(클로에 빈켈)는 그림에 재능이 있다. 훌쩍 도쿄로 가보고 싶어 일본 친구 야마모토의 주선으로 도쿄 유흥가에서 호스티스로 일하게 된다. 안젤라는 첫 출근부터 뭇 남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한다. 동료들은 질투에 사로잡혀 국수에 유리조각을 몰래 넣는가 하면 안젤라의 윗도리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앨프리드 히치콕을 흉내낸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일까 아니면 미카엘 하네케쪽일까. 영화는 숨바꼭질하듯 관객의 추리를 한발씩
인간에 대한 복잡한 탐구, <아이돌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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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이중첩자는 흥미로운 존재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당시 한길수(1900∼76)의 이중첩자 행각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1941년 일본 공격 계획을 미리 입수해 미국쪽에 여러 경로로 전달했다고 한다. 만약 미국이 일찌감치 그의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현대사는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1938년 미국 내 독립운동단체인 중한민중대동맹의 리더였던 그는 뒤에 미국과 일본 양쪽을 위해 이중첩자로 일했다. 영화는 그가 미 해군의 지시에 따라 하와이 일본 총영사관으로 위장취업하면서 시작한다. 독립운동을 하던 동료들은 일본군을 테러하기 위해 스스로 설치한 폭탄의 위치를 일본군에 알려주는 한길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테러 계획을 무화하고 일본쪽으로 돌아선 한길수 또한 자신의 계획을 독립운동 동료들에게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길수는 총영사관의 소좌와 약혼한 영사관 직원이 독립운동가의 자녀임을 알고 그녀를 포섭해 영사관 내부의 기밀 문서를 빼돌린다.
한국형 첩보액션, <한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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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소수자들의 악몽이다. 건강하고 총명한 아이들은 팔이나 다리가 하나 부족하다는 이유로 유치원 입학을 거절당하고, 사내들은 직장인 아내가 차려준 아침밥을 꼬박꼬박 얻어먹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임금도 받지 못한 채 구타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출근길 지하철 옆자리는 종종 비어 있으며, 기업들은 ‘키 160cm 이상, 몸무게 50kg 이하’라는 항목을 구직란에서 지우지 않는다. 심지어 이 나라의 학생들은 대학에 가야만 사람 취급을 받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 제작한 <별별 이야기>는 이처럼 우리 곁에 당면한 인권문제를 손에 쥐고 여섯명의 감독들이 어우러낸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2003년 제작된 <여섯개의 시선>이 다분히 성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였다면, <별별 이야기>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인권위의 고민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6개의 단편들이 구사하는 기법과 소재는 다양하다. <강아지 똥>(2
옴니버스 인권 애니메이션, <별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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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사랑이 변한다고 믿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너는 내 운명>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가 던진, 사랑은 변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읽힌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둘의 믿음은 한결같고 전혀 흔들리는 법이 없다. 극중 은하의 말투를 흉내내서 이렇게 되물을 수 있을까.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고? 진정? 그런데 박진표 감독은 허진호 감독의 맞은편에서 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은수가 볼 수 없는 지점에서 답한다. 사랑이란 두 개인 사이의 일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 사는 두 개인 사이의 일이라는 게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지점이고 입장이다.
목장에서 젖소를 키우는 석중(황정민)은 은하(전도연)만 좋아하는 순정의 남자다. 은하를 쉬게 하기 위해 티켓을 끊고, 아예 커피까지 타준다. 정말 쉬게 해주겠다는 거다. 진정? 진정 그렇다. 석중은 남자들 무의식 깊숙이 잠복해 있는 순정을 호명한다. 그러나 감독은 예리하게 그 순정의 한
사랑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너는 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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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랑이란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하자, 영화 <고백>(L’accompagnatrice)의 주인공 소피는 무심히 대꾸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난 늘 혼자였어.” 만약 토니 타키타니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이치카와 준 감독의 <토니 타키타니>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원작에 쓴 첫 문장을 첫 내레이션으로 삼는다.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정말 토니 타키타니였다.” 일본식 성에 미국식 이름을 덧붙인 그 별난 이름은 주인에게 고립의 운명을 점지한다.
영화의 프롤로그는 토니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한 주석이자 아버지 쇼자부로(잇세 오가타) 반생의 요약이다. 재즈 트롬본 주자 쇼자부로는 상하이에서 춤의 스텝을 밟듯 청춘을 보낸다. 포로수용소에서조차 사형을 면하고 귀국한 그는 전쟁이 그를 고아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결혼한다. 그러나 허약한 여인은 아들을 낳고 사흘 뒤 숨진다. 정교한 모래성
편재하며 영속하는 외로움의 연대기, <토니 타키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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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영화를 재미있게 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원전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 그러나 무슨 영화가 패러디될지는 전혀 모르고 볼 것. 고로, <무서운 영화> 제3탄을 기다려온 이들에게 이하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바란다.
비오는 밤, 가슴 큰 두 금발 미녀(그중 하나는 파멜라 앤더슨이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TV를 보고 있다. “TV는 질색이야. 머리 아프거든.” “전자파 때문에 그래. 뇌세포가 죽는다고.” 구시렁거리던 두 사람, 갑자기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댄다. 이유인즉 전자파가 실리콘을 축소시킨다는 것. 한바탕 난리를 떨고 가까스로 TV를 끈 그녀들. 자못 심각해져, 보고나면 전화가 온다는 이상한 비디오테이프에 대해 얘기한다. 그때 갑작스레 울리는 전화벨 소리. 패러디영화의 아성, <무서운 영화>의 세 번째 문이 열린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와 <스크림> <엑소시스트
패러디영화의 아성, 그 세번째 문, <무서운 영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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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 종려나무는 기다림의 상징이었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환영하던 군중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 종려나무 가지라고 했다. 폭풍우로 배가 표류하게 되자 며칠을 머무르면서 봉애(조은숙)와 정순(김유미) 모녀의 도움을 받았던 최 선장(이경영)이 하룻밤을 보낸 정순에게 꼭 돌아오마며 두손에 쥐어준 것도 작은 종려나무 한 그루다. 종려나무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수난의 시작을 알리는 고통의 나무이기도 했다. 정순이 받아든 종려나무 한 그루가 숲을 이룰 때까지, 끝내 돌아오지 않았던 최 선장은 정순에게 고통이고 괴로움이다.
그 하룻밤으로 태어난 딸 화연(김유미)은 언젠가는 종려나무 숲을 없애버리겠다며, 한마디 약속에 평생을 기다림으로 보낸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젊고 유능한 변호사로 거제도 조선소에 오게 된 인서(김민종)가 자신에게 사랑을 느끼고 결혼을 약속할 때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종려나무숲에 얽힌 봉애와 정순의 사연을 고스란히 껴
옛이야기가 지닌 담백함의 미덕, <종려나무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