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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먼 옛날 조선에서. <형사 Duelist>는 여느 나그네의 요설처럼 막을 올린다. 아니, 영화의 프롤로그는 정말로 인간인지 귀신인지 모를 여인네에게 유혹당하는 나그네의 요설이다. 극과 상관없는 프롤로그가 갑자기 중단되면, 장터에서 잠복근무 중인 좌포청의 안 포교(안성기)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우 형사처럼 걸걸한 남순(하지원)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화폐위조범들의 출처를 알아내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병조판서(송영창)와 그의 하수인인 슬픈눈(강동원)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남순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슬픈눈과 사랑에 빠지면서 임무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상하게도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야기는 사라져간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6년 만에 돌아온 이명세는 더이상 서사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서사의 공백을 대신하는 것은 활동사진의 쾌락이다. 고속촬영과 저속촬영, 프리즈 프레임(정지화면), 색감과 명암의 급격하고 다양한 변화를
서사를 대신하는 활동사진의 쾌락, <형사 Du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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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아내와 남편은 불륜을 저질렀다.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낯선 고장 삼척으로 달려와 혼수상태인 아내와 남편을 볼 때까지도. 아마 그들은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낯선 곳에서, 절대로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자기를 속인 배우자를 간호하면서, 그들의 변명조차 듣지 못하면서, 홀로 견뎌야 하는 것이다.
인수와 서영은, 일상에서 만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가장 혹독한 고통의 순간에 만난다.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니’라는 인수의 말처럼, 그들은 최악의 상황에 몰려 있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었다면, 또 달랐을 것이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또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먼길을 찾아온 후배에게, 취한 인수는 그냥 가라고 말해야만 한다.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상
결코 외면할 수는 없는 이탈과 내쳐짐의 정서,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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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낯선 사람과의 질펀한 섹스다. 두 번째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친 섹스다. 접촉의 종류는 다르지만 오르가슴의 종류는 마찬가지라고 전제된다. 두 가지 사이에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잠깐, 또 하나의 전제를 빼먹었다. 판단의 주체는 남성이며 여성은 객체다. 두명의 여자는 각각의 섹스를 대표하며 각각의 섹스에 빠져 있다. 삼각관계의 중심은 늘 남자 한명이다. 감독·각본의 홀리오 메뎀은 이 상태에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는 상식적인 혹은 교과서적인 결론을 갖고 있다. 교과서로 장편영화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주체인 남성에게 혼돈을 일으킨다. 첫 번째 종류의 섹스가 남긴 흔적을 기억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내 생애 최고의 섹스’였던 추억이 물리적 잉여가 돼 나타나자 남자는 혼비백산한다. 끝내 어디론가 도망쳐버린다. 깊은 사랑의 섹스에 빠져 있던 여자는 영문도 모른 채 후폭풍을 맞는다. 여자는 상처를 씻고자 먼 여행길에 나선다.
소설가 로렌조(트리스탄 우
신비롭고 관능적인 모험, <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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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으로 충격을 주었던 조지 A. 로메로는 그 삼부작 이후 20년 동안 좀비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그사이 영화 속의 좀비들은 빠르고 영리하고 코믹한 존재로 진화했고, 더이상 자신의 조상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랜드 오브 데드>는 노인네의 허무한 발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느릿느릿 걷는 게 전부인 저능아 좀비. 로메로는 신기하게도 자신이 오래전 “인간이 가진 능력의 5%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던 클래식한 좀비들을 거느리고, ‘좀비 삼부작’의 리메이크가 아닌, 지금 이순간의 영화를 만들었다.
되살아난 시체들이 사람을 습격하기 시작하고 몇년이 지난 언젠가. 라일리(사이먼 베이커)는 좀비들이 점령한 마을에서 식량과 물품을 가져오는 보급부대의 군인이다. 그는 좀비들에게 이성과 의사소통 능력이 생기는 모습을 목격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인간의 흔적이 없는 북쪽지역으로 떠나려는 라일리. 그러나
가볍고 통쾌한 오락영화, <랜드 오브 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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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주관객층으로 잡고 어린이를 다룬, 어른이 만든 ‘어린이’영화에서 소박한 현실성을 찾으려는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마치 아이스크림 가게에 구비된 색색의 아이스크림처럼, 한편의 ‘어린이’영화 속에는 가족간의 사랑, 우정, 꿈, 희망, 모험이 갖가지 빛을 발하며 어린이들의 구미를 당기기 마련이다. 여기에 정의로운 아이들과 타락한 어른의 대립구도를 통해 아이들의 주눅 든 감수성에 일시적 충만감을 준다면, 현실을 완벽히 차단하는,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어린이영화가 된다.
<에밀과 탐정들>은 전세계적으로 번역되어 수많은 어린이 독자를 확보한 에리히 케스트너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심부름을 하려다 도둑한테 돈을 빼앗긴 소년이 친구들과 힘을 합쳐 도둑을 잡는다는 원작의 이야기는 엉성하고 단순해졌지만 한층 화려해진 스케일의 영화가 되어 부활한다. 갑부의 아들부터 가난한 집시까지 다양한 계층의 어린이들로 구성된 에밀의 친구들. 아이들은 그 극명한 생활수준의 차이에
정의로운 아이들 vs 타락한 어른, <에밀과 탐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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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한 수도원, 벽에 그리스도상을 못질해 걸자 피가 흘러나오는 기이한 사건이 벌어진다. 니먼 형사(장 르노)는 벽에 묻힌 사체를 발견한다. 레다 형사(브누아 마지멜)는 예수 같은 복장을 하고 피흘리며 이상한 말을 하는 남자를 병원으로 데려갔다가 검은 옷을 입은 수도승의 공격을 받는다. 니먼과 레다는 기이한 사건들간의 유사성을 포착하고, 함께 수사에 나선다. 계속 사체를 발견한 두 사람은 예수를 닮은 한 남자와 그를 따르는 12명의 사람들이 일정한 규칙과 암호에 따라 살해당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서 기호학을 연구한 메리(카미유 나타)의 도움으로 비밀은 점차 베일을 벗고, 괴력의 수도승들의 위협 속에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7개 봉인의 미스터리를 풀어간다.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은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를 휩쓴 <다빈치 코드>의 모태가 되었고, 또한 <크림슨 리버2: 요한계시록의 천사들>의 태동을 도왔다. <크림슨 리버2…>는 영화판 <
봉인의 미스터리, <크림슨 리버2: 요한계시록의 천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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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8년 전, 스펜서 트레이시와 캐서린 헵번 부부의 저녁 식탁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애지중지 기른 외동딸이 결혼할 남자라며 데려온 이는 전도유망한 흑인 청년 시드니 포이티어. 진보적이라고 자부하던 그들에게도 극복하지 못하는 편견이란 것이 있어서, 피부색이 다른 예비 사위와의 대면은 불편하기만 하다. 인종문제가 첨예하던 1960년대에 등장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당시 영화계 안팎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다른 인종과의 결합이 생경하지 않은 지금, 이 작품을 리메이크한다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옳을까. <게스 후?>의 제작진은 기발하다면 기발한 ‘트위스트’를 시도했는데, 흑인 가정에 백인 사위가 들어오는 설정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또 주제의 무게를 덜어낸 자리에 코믹한 에피소드를 빼곡히 채워넣었다.
<Guess Who Comes to Dinner>라는 원작영화의 제목을 싹둑 잘라낸 가벼
주제의 무게를 덜어낸 코믹한 에피소드, <게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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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모코가 그리 불량한 학생은 아니다. 술과 담배를 하는 것도, 거리에서 원조교제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로코코 시대의 복장에 푹 빠져 있을 뿐이다. 하늘하늘한 드레스만을 입는 모모코는, 자신이 18세기 프랑스의 공주 혹은 귀족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언제나 드레스를 입고, 로로코 시대의 귀족들처럼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한다. 나만 즐거우면 됐지, 가 모모코의 주장이다. 그래서 모모코는 친구가 없다.
전직 야쿠자인 아버지가 팔다 남은 짝퉁 베르사체를, 인터넷으로 팔아치우려는 모모코. 그걸 사겠다고 찾아온 이치코는, 시커먼 화장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은 여고생 폭주족이다. 너무 착하고 마음이 약해서 늘 왕따였던 이치코는, 우연히 만난 폭주족 리더 아키미에게 반해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언제나 얼굴을 찡그리며 껌을 씹고, 목소리를 깔면서 침을 찍찍 뱉는다. 말대꾸를 하거나, 짜증이 나면 바로 박치기를 한다. 그런데 왜 이치코는 모모코의 친구가 되는 것일까?
<불량
공주와 폭주족이 한패가 되다, <불량공주 모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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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에서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첫 번째 대상은 푸른 벽에 붙어 있다가 재빨리 기어올라가는 한 마리 도마뱀이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어딘가에 홀로 뚝 떨어진 듯해 보이는 그것은 아무래도 주인공 겐지(아사노 다다노부)가 읽던 그림책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온 녀석인 것만 같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자신이 자기 종 가운데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존재임을 알게 되었더라는 바로 그 도마뱀. 슬슬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워지고 심지어는 자신을 괴롭히던 녀석들마저 곁에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품게 되는 세계의 그 단독자는 결국에 이런 결론에 이른다. “같이 이야기할 상대가 없는 삶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원제가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인 <라스트 라이프…>는 그처럼 깜깜한 우주 속을 유영하는 듯 마지막 삶을 살아가는 도마뱀들의 모습이 현재 우리의 모습과 겹쳐진다고 이야기하며 그 ‘도마뱀’들의 초상을 그리는 영화다.
방콕에서
고독한 영혼들의 러브 스토리,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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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 1966!” 2002 월드컵 한국팀의 이탈리아전 당시 붉은 악마들이 연출했던 카드섹션 응원은 알다시피 1966년 제8회 월드컵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1 대 0으로 이겼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그 승리는 단지 ‘한민족의 쾌거’만이 아니었던 게 확실하다. 그로부터 36년 뒤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천리마 축구단>은 그 확실한 증거다. 어렸을 적부터 약소국인 북한이 어떻게 이탈리아를 이겼는지 궁금했다는 대니얼 고든 감독은 이 축구사의 신화와 그 뒤편에 자리한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붙잡아낸다.
<천리마 축구단>은 단순하지만은 않은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가 우선 조명하는 것은 이탈리아전에서 환상적인 결승골을 날렸던 박두익을 비롯해 당시 북한 최고의 스트라이커 박승진, 골키퍼 리창명 등의 현재 모습과 그들의 추억담이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 어떻게 훈련을 진행했으며, 월드컵에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 등 그들의 이야기는 당시 북한팀에서 촬영했던 진귀한 기록
1966년 축구사의 신화와 그 뒤편에 자리한 이야기, <천리마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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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좋아 낙원이지, 늘 태양이 가득한 푸른 하늘과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는 은퇴한 보석도둑 맥스(피어스 브로스넌)에게 감옥과 같다. 맥스와 롤라(셀마 헤이엑)는 ‘내 인생의 한탕’에 성공한 뒤 은퇴했다. FBI 요원인 스탠(우디 해럴슨)을 보기 좋게 엿먹이며 아기 주먹만한 다이아몬드를 훔친 두 사람은 캐리비언해로 은퇴해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다. 롤라는 취미활동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보려고 애쓰지만, 맥스는 얼마 안 가 무료함을 느끼고 뜨내기 여행객의 지갑을 슬쩍 하는 것으로 심심풀이를 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스탠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캐리비언에 정박할 크루즈에 맥스와 롤라가 두 개를 훔쳤던 나폴레옹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다이아몬드가 전시된다면서, 스탠은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겠다며 노골적으로 두 사람을 감시한다.
어쩌면 ‘낙원판 <오션스 일레븐>’이나 ‘낭만적인 <이탈리안 잡>’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실력이 뛰어나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최고의 보석절도 커플의 최후의 한탕, <애프터 썬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