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한 킬러 지미 튤립(브루스 윌리스)은 치과의사 오즈(매튜 페리)와 함께 갱단보스 야니 고골락을 살해하고 조직의 돈을 훔쳐 달아났다. 4년 뒤, 야니의 아버지 라즐로(케빈 폴락)가 복수를 다짐하면서 감옥에서 나온다. 라즐로는 지미를 찾아내기 위해 지미의 전처이자 오즈의 아내인 신시아를 유괴하고, 지미에게 도움을 청하러 떠난 오즈의 뒤를 쫓아간다. 지미는 그 사이 킬러 지망생인 아내 질에게 잔소리나 퍼붓고 가사에만 몰두하는 별볼일 없는 남자가 되어 있다. “너 살자고 나 죽을 수 없다”면서 매몰차게 외면하는 지미. 그는 은신처를 습격해온 라즐로 일당을 피해 하는 수 없이 질과 오즈와 달아나지만, 뭔가 생각해둔 계획이 있는 듯하다.
<나인 야드2>는 4년 만에 제작된 <나인 야드>의 속편이다. 그사이 아기자기한 굴곡과 반전을 잊었다고 해도 음각과 양각처럼 서로를 채워주던 두명의 남자는 잊지 못했을 것이다. 지미와 오즈 혹은 브루스 윌리스와 매튜 페리. 스포츠
2억 8천만 불을 둘러싼 유쾌한 대박 전쟁, <나인 야드 2>
-
초점 잃은 눈동자, 새파랗게 질린 얼굴, 그리고 죽음처럼 고요한 표정. 영화 전체의 공기가 안개처럼 탁하고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건 모두 이 어린 딸, 다코타 패닝의 연기 덕분이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서늘함을 뿜어내는 이 어린 소녀의 연기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소름끼친다. 그러나 소녀의 표정에서 슬픈 두려움을 끌어내기에 영화가 내세우는 공포의 미학은 다소 낡고 전형적이다. 갑작스런 엄마의 자살로 실의에 빠진 딸을 위해 데이비드(로버트 드 니로)는 도시 외곽으로 이사를 한다. 새로운 공간에 점차 적응해가던 딸 에밀리(다코타 패닝)는 어느 날부터인가 상상 속의 친구 찰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에밀리가 찰리의 존재에 확신을 가질수록 집안 곳곳에는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데이비드 역시 찰리가 단순한 허구의 인물이 아닐 수도 있음에 의심을 품고 그로부터 어린 딸을 구해내기 위해 비밀을 밝혀나간다.
영화가 노리는 지점은 나이트 샤말란의 등장 이후 모든 공포영화의 강박
보이지 않는 존재와 벌이는 죽음의 게임, <숨바꼭질>
-
한 남자가 있었다. 1923년 오사카로 건너가는 배에 몸을 실은 앳된 청년 김준평. 풍요와 희망의 새 세상을 꿈꾸는 해맑은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나면, 십수년 뒤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광포해진 그(기타노 다케시)가 ‘집으로’ 귀환하던 그 밤으로 이어진다. 강간으로 아내 삼은 여인(스즈키 교카)을 저버리고, 친지의 피와 땀을 쥐어짜 돈을 모으고, 가족과 이웃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굴복시킨 사람. <피와 뼈>는 “아버지는 내 인생을 가로막는 장벽이었다”고 단언하는 아들 마사오(아라이 히로후미)의 시선으로, 어디에서도 본 적 없지만,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 남자가 사는 법’을 소개한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개달리다>에서 재일한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냈던 최양일 감독이 6년을 투자해 양석일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피와 뼈>는 재일동포 1세대의 파란만장한 일본 정착에 관한 이야기지만
처절하고 잔혹한 괴물의 초상, <피와 뼈>
-
엘비스가 ‘백인의 육체’ 컨트리에 ‘흑인의 영혼’ R&B를 불어넣는 순간 록은 탄생한다. 레이 찰스가 신을 향해 부르던 가스펠에 첫사랑 델라(케리 워싱턴)를 향한 열정으로 써내려간 <I’ve got a woman>이 발표되면서 솔은 대중음악이라는 넓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레이>는 레이의 생애를 순회공연처럼 떠도는 로드무비다. 영화가 시작되면 흙먼지가 날리는 고향의 정류장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오르는 그의 발걸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컨트리, 가스펠, 솔, 재즈, 리듬&블루스를 자유자재로 가로지르고 탐험하는 레이 찰스의 음악적 여정도 그러하다. 레이는 언제나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난다. 그의 몸도 마음도 길 위를 거닌다.
대공황 시대 미국 남부 올바니에서 태어난 레이 찰스 로빈슨(제이미 폭스)은 동생 조지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으로 7살에 시력을 잃는다. 소작농이던 어머니 아레사(샤론 워런)는 충격적인 사고와 겹치는 불운에도
어느 에고이스트의 치열한 예술가적 자화상, <레이>
-
-
피터 팬은 해마다 웬디를 찾아오겠다던 약속을 잊었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푸우를 잊었다. 메리 포핀스가 돌보던 뱅크스가의 아기들은 동물과 대화하는 법을 잊었다. 동화들은 그런 식으로 넌지시 우리에게 경고했다. 너희는 중요한 것을 기어코 잃어버릴 거라고, 위안이 있다면 잃어버렸다는 사실마저 깡그리 망각한다는 점뿐이라고, 어른의 쓸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모든 순정한 아름다움에는 ‘흑막’이 있음을 짐작하게 된 것은. 판타지는 언제나 어둡고 두려운 무엇인가의 대극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타는 목마름이 길어올린 샘물이고, 갈 데까지 간 불면이 붙든 최면술이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피터 팬>(1904년 초연)의 사연을 캔다. 영원한 유년을 구가하는 판타지가 작가 제임스 매튜 배리(1860∼1937)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2년의 시간을 추적하고 상상한다. 따라서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J. M. 배리의 전기영화라기
세상 모든 동화들의 아름다운 시작, <네버랜드를 찾아서>
-
어머니(=독일)는 생기 잃은 창백한 얼굴이 됐지만 그 얼굴의 절반마저 마비돼버렸다. 이러지 말라며 욕실 문을 두드리는 어린 딸을 두고 가스를 들이켜며 자살을 기도할 만큼 생의 의지를 잃었다. 어머니(=독일)를 이렇게 만든 건 나치(=전쟁)이며 남편(=남자, 아버지)이다. 이처럼 <독일, 창백한 어머니>가 나치와 남자를 고발하는 방식은 파스빈더의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을 닮았으며, 어머니 곁에 있는 아이가 그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하며 창백해지는 모습은 폴커 슐뢴도르프의 <양철북>을 연상시킨다. 영화사적으로 정리하자면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전후 독일사회의 정체성을 회의적으로 짚었던 뉴저먼시네마의 맥락 위에 서 있는 셈이다.
비슷한 테마이지만 연출 기법은 앞선 두 작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브레히트적이다. 메시지는 훨씬 단단하고 선언적이며 이를 전달하는 스크린은 마치 연극무대를 고스란히 옮겨온 듯 소격효과를 노린다. 그게 너무 지
세상의 모든 슬픔을 끌어안은 어머니, <독일, 창백한 어머니>
-
남자들 머릿속엔 퇴행적 욕구가 잠복해 있다. 머리가 굵어지면 그 퇴행욕구를 세련되게 위장하고 퇴행을 미화한다. 술을 마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릴 적 구강기에 대한 강한 아쉬움 때문이다.
술병 주둥이는 어른 남자에게는 엄마의 젖꼭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같은 술이라도 와인은 다른 대접을 받는다. 와인엔 그런 퇴행 욕구를 덮을 만한 두터운 문화적 휘장이 있다. 오랜 역사, 다양한 품종은 섬세한 취향을 요구하고 이 취향은 어른스러운 것으로 인정된다. 물론 이 취향을 위해선 많은 돈이 든다.
결혼을 앞둔 일주일 동안 와이너리(포도주를 만드는 농가)를 돌아다니며 마지막 자유를 누려보겠다는 잭(토머스 헤이든 처치)과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러 나선 마일즈(폴 지아매티)의 여행 이야기는 사실 귀가 솔깃해질 내용은 아니다.
“우리 나이에 돈, 능력 없으면 도축장 끌려가는 소”라고 느끼는 중년 남자 둘이 길을 떠난다는 내용만 들으면 벌써 이런 감탄사가 절로 떠오른다. 꽤나 지루하
가볍고 상쾌, 살짝 여운까지 있는 와인 같은 영화, <사이드웨이>
-
“Q-U-A-R-A-N-T-I-N-E.”
젊은 어머니는 발가벗은 아들의 몸을 씻어주며 ‘검역’이라는 단어의 철자를 소년의 뇌리에 한자한 자 박아 넣는다. ”기억하렴. 너는 결코 안전하지 않단다.” 격리와 단절의 뜻을 포함하는 이 단어는, 18살에 고아가 된 하워드 휴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엄청난 돈과 함께 유산으로 남겨져 평생을 따라다닌다.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끝없이 호출당하는 백만장자라면,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이 이미 오래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시민 케인>의 언론 재벌 찰스 포스터 케인이 중얼거리는 ‘로즈버드’가 잃어버린 순수의 암호였다면 <에비에이터>의 하워드 휴스가 되뇌는 ‘쿼런틴’은 깊게 할퀴는 저주다. 그것은 휴스를 어디에도 데려다주지 못한다. 밀폐된 방 안에 더러운 공중화장실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가둘 뿐이다. 실제로 하워드 휴스는 악명 높은 은둔생활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끝내 밀실로 돌아가 틀어박
거만한 고전기 할리우드의 심장 박동, <에비에이터>
-
자정에서 새벽까지, 서울에서 여수까지 달리는 무궁화호 열차에는 다양한 승객들이 탑승해 있다. 사실 이 열차는 사상자가 100여명에 달하는 초유의 열차 사고 이후 그중에서 건져낸 객차 몇량이 연결되어 있는 열차이며, 오늘은 바로 예의 사고로부터 정확하게 16년이 흐른 그날이기도 하다. 열차 판매원 미선(장신영)은 기차가 터널에서 한번 급정거를 한 뒤 운행을 재개하고 나서부터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조금 전과 같은 객실이지만, 미선의 눈에는 80년대 옷차림과 세로쓰기 신문, ‘1988년 7월16일’이라고 찍힌 날짜가 보이기 시작한다. 혹시, 과거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일까?
한정된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그 한정된 시공간을 무너뜨리는 다른 시공간의 혼재가 빚어내는 공포. <레드아이>가 내세우고 있는 다른 공포영화와의 차별지점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린다. 열차 판매원 미선이 열차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판매카트를 끌고 죽 일직선으로 걸어가야 할 때, 대체
시공간과 또 다른 시공간의 혼재가 빚어내는 공포, <레드아이>
-
모래바람이 시야를 가리는 사막 한복판. 두명의 저격수가 작전을 수행 중이다. 총구의 흔들림을 감추지 못하는 신출내기에 비해, “낮잠을 자는 듯” 평온하기만 한 명사수 토마스 베켓(톰 베린저)은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100만번 중 한번이나 가능할 법한 저격을 성공시킨다. 그러나 어쩐지 어설프게 여겨졌던 이 상황은 일종의 시뮬레이션 훈련이었고, 저 멀리 진행되던 인질극은 영사된 화면에 불과했다. 좀전까지의 긴박한 상황들이 되감기되는 스크린을 뒤로한 채, 걸프전 영웅 정도로 보이는 젊은 상사에게 말대꾸를 일삼는 베린저의 모습은 안쓰럽기만 하다. 비디오용으로 만들어진 <스나이퍼3>의 도입부는 그처럼 순식간에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고, 이 첫인상은 러닝타임 내내 크게 변하지 않는다.
국가안보위원회의 고위급 간부와도 맞먹을 연배의 베켓은 20년 전에 입었던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중풍초기단계를 겪고 있으며, 옛날 전쟁영화를 보면서 과거의 악몽을 되새기는 게 일상이
“늙은 거야? 아니면 마음이 변한 거야?”, <스나이퍼3>
-
영화는 화장실에 앉아 임신 테스트기를 들여다보는 제니의 얼굴로 시작된다. 테스트기의 빨간 두줄을 바라보는 제니의 표정으로 클로즈업. 그런데 이 소녀는 꽤 담담하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거나 걱정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이 없다. 15살 소녀의 이 의연한 표정이 바로 영화의 전체적 흐름 혹은 분위기를 전달해준다. <제니, 주노>는 연애, 임신, 출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절박한’ 이야기를 십대의 철없음으로 매우 유연하게 풀어가는 영화다. 그 험난한 주제는 잔혹하고 생생한 현실극보다는 어드벤처 판타지 모험극 속에서 ‘기특하고 올바른’ 두 청소년을 낳았다. 그러나 이 기특한 소녀와 소년은 왠지 진부하다. 어른을 흉내내는 이들은 흠잡을 데 없으나 앵무새 같다. 성인 세계의 클리셰를 완벽히 흡수하여, 심지어 거기에 책임감까지 더해 난관을 극복하는 뽀얀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어린 신부> 이후 쏟아지는 ‘무늬만’ 청소년물과 닮았다.
제니는 전교 5등 안에 드는 모
십대의 철없음으로 유연하게 풀어낸 절박한 이야기, <제니, 주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