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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이 나는 도시들이 있다. 보고 있는 대상들이 지나치게 아름다워 왠지 믿기지 않고, 신비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파올로 소렌티노의 <그레이트 뷰티>(2013)에서 동양인 남자가 로마의 아름다움에 반해 사진을 찍다, 기절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나에겐 그런 현기증을 안긴 도시가 셋 있다. 로마, 파리, 그리고 베네치아다. 세 도시 모두 어리둥절한 채, 하루 종일 멍하니 바라보며 걷기만 했다. 지도도 잠시 잊고, 그냥 목적 없이, 건물과 건물 사이, 광장과 광장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하루 종일 얼마나 걸었던지 저녁에 탈진이 됐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도시에 혼 들려 있었음을 알게 된다. 괴테도 <이탈리아 기행>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저녁이 되니까 피곤하고 기진맥진해진다”고 고백할 정도니, 경험이 낮은 나로서는 당연한 흥분이었다. 베네치아에는 기차로 도착했는데, 중앙역인 산타 루치아역에 내리자마자 펼쳐지는 운하의 장관에 잠시 넋을 잃고 말았
[한창호의 트립 투 이탈리아] 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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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김도훈 편집장과 대학 시절 같은 영화동아리였다. ‘영화탄생 100주년’이라는 표현이 뭔가 거대한 역사의 중심에 선 것처럼 울컥하게 만들었던 90년대. 마음이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팠던 때였다. 그렇게 한손에는 시티폰, 허리에는 삐삐 차고, 옆구리에는 굳이 <키노>와 <씨네21>을 쌍으로 끼고 다니면서 디아스포라와 시뮬라크르에 밑줄 좍.
당시 ‘구본승 머리’를 고수했던, 하지만 구등신도 팔등신도 아니기에 어림잡아 육본승이라 불렸던 동아리의 브레인 김도훈은 강의시간이 빌 때면 종종 비디오를 빌려와 작은 감상회를 열었다. 하지만 동아리방 벽에 <레옹>과 <라이온 킹>, 그리고 <시계태엽 오렌지> 포스터 등을 붙였다는 이유로 일부 열혈 선배들로부터 ‘미제의 앞잡이’ 취급을 받던 그였기에 그 선정작들 또
[에디토리얼] 웨스 크레이븐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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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아주 재밌는 페스티벌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테크노 뮤지션 바가지 바이펙스써틴이 기획한 ‘열받아서내가만든페스티벌2015’다(이하 내만페). 지난 8월22일 이태원 클럽 놈코에서 열렸으며 클럽 신이 들썩거릴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물론 수만명이 몰렸기 때문에 대성황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날 놈코에 들렀던 사람들의 만족도와 클럽 신에 일었던 화제의 정도를 생각하면 커다란 파장이었다. 이태원에서 소규모로 열린 이 축제가 이만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축제 포스터와 함께 게시된 바가지 바이펙스써틴의 기획의 변 때문이었다. 바가지 바이펙스써틴은 이 페스티벌을 기획한 이유가 “너무 화가 나서”라면서, EDM 열풍에 편승해 우후죽순 생겨나는 수준 낮은 페스티벌이 너무 많아졌다고 비판했다. 또한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된 EDM 디제잉을 넘어 일렉트로닉 댄스의 다양한 장르를 소개하는 “안티 커머셜 체제”를 구축하겠다고 공언했다. 내만페에는 무려 40명의 디제이가 참가했고 3
[마감인간의 music] 메시지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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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오피스> 귀신 나오는 회사
[정훈이 만화] <오피스> 귀신 나오는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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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다. 한 사회가 짊어지고 있는 갈등의 양상은 다양하다. 그것은 단순한 의견 충돌일 수도 있고 위계에 의한 소통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이해관계에 따른 분쟁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혹은 역사적 상흔을 두고 남겨진 자들 사이에 처리해야 할 사과와 용서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갈등이 없는 사회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중요한 건 어떠한 문제해결과정을 거쳐 이러한 갈등을 ‘다루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더불어 그런 문제해결과정이 사회 전반에 어떠한 학습치를 남기느냐가 중대하다. 거기서 한 사회의 수준과 격, 그리고 지속 가능성이 결정된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거기 갈등이 있는데 갈등이 없다고 치부되어버리는 사회에서 발생한다. 이런 경우는 일반적으로 과거의 가해자가 지금도 여전히 힘 있는 가해자로 군림하고 있으며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침묵으로 지워내야 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지금 우리가 들여다볼 나라가 바로 그런 나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병든 자들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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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4>와 <오피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침묵의 시선>에서, 50년 전 인도네시아 민간인 학살로 형을 잃은 아디는 가해자와 방조자들을 방문해 왜 그랬는지 묻는다. 누구 하나 책임을 인정하거나 사죄하지 않는 가운데 유일하게 사과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잔혹 행위가 금시초문인 여인이다. 아버지를 평생 존경해온 효녀의 얼굴은 대화가 진행될수록 굳어가고, 아디가 피살자 유족임을 밝히는 순간 쩍 하고 금이 간다. 아버지의 체면을 지키려는 안간힘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충격과 연민을 감추지 못한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이제부터 우리 가족처럼 지내요.” 둘은 포옹하지만 떠나는 아디는 씁쓸해 보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부피의 고통에 대해 사과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인은 아디가 좀더 머물길 바라지만 차마 붙들지 못한다.
08/17
<판타스틱4>에 대한 혹평은 일약 에스컬레이터를 올라탄 느낌이다. <뉴욕타임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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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가장 인상 깊은 영화 관객과의 대화(GV) 질문 중 하나. 지난해 학교폭력을 다룬 내 영화 <야간비행>을 베를린에서 상영할 때였다. 20대로 보이는 한국인 관객이 손을 들고 이런 질문을 했다.
“한국의 내부 문제를 이렇게 외국인들에게 보여주면 한국에 대한 인상이 나빠질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순간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갔지만, 입천장에 맴도는 문장은 이랬다. ‘맙소사, 국뽕이다.’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영화도 아니지만,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입시지옥과 학교폭력을 외면한 채 내세우는 국가 이미지란 대체 얼마나 위선적인가. 저 위선의 애국심을 다른 나라에 와서 20대 젊은 청년의 입을 통해 대면해야 하나 싶어, GV가 끝나고도 한참을 심란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반가량이 지난 오늘밤, 기이하게도 ‘헬조선’이라는 유행어와 마주앉아 있다. 1년 반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어느 순간 헬조선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SNS에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2030세대의 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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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지출하고 받는 영수증을 모아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는 영수증 일기는 개인 블로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어제 받은 영수증만으로 자신을 패턴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난 1년간 혹은 2년간 받은 영수증을 모으고 체계적으로 분석한다면 그 종이 더미 속에서 미처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쇄쇼핑가족>. JTBC에서 토요일 밤 11시에 방송되는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이다. 그날그날 주제가 주어진다. 박명수, 이영자, 써니, 박지윤, 박원으로 이루어진 5명의 MC는 우리 사회 소비의 중심에 서 있는 2040세대로 특징지어 선별된 듯 보인다.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의견교환이 이어지기 전에 MC들이 그주에 소비한 영수증을 제출하고 서로 분석한다. 주제가 자리를 잡으면 섭외된 전문가 한 사람이 알짜지식을 풀어놓는다. 중간중간 동명의 타이틀을 가진 <연쇄쇼핑가족>이라는 시트콤을 배치해 시청자의 감정이입과 프로그램의 진행을 돕는다
[김호상의 TVIEW] 쇼핑으로 보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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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다시 보는 영화가 있다. 피서용 납량영화는 아니다. 늦여름 바람 불고 벼락 치고 비 쏟아지는 밤에 혼자 보는 영화다. 영화사에 남는 위대한 걸작은커녕 IMDb 평점 6점도 못 넘었지만 나의 오독과 편애와 어떤 슬픔으로 다시 찾게 되는 영화. 심지어 결말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눙쳐버린 영화. 분명한 실패작.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 관객이 코웃음을 쳤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네이크 아이즈>(1998)다.
허리케인 제제벨이 불어닥친 애틀랜틱시티. 호텔 카지노 겸 실내 경기장에서 복싱 헤비급 타이틀전이 열리고 미 국방부 장관도 보러온다. 꽃무늬 셔츠에 가죽 재킷을 입고 자기 구역을 쏘다니는 릭(니콜라스 케이지)은 잔뜩 신이 나 있다. 니콜라스 케이지 특유의 흥분한 액팅으로 보여지는 릭은 아내와 정부를 동시에 통화 대기시키며 승패 도박에 베팅하느라 바쁜 부패 형사다. 이 썩은 도시의 자칭 왕인 그는 나중에 시장으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폭풍과 안개의 존재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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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암살>은 1200만 관객을 돌파할 기세이고 <베테랑>은 대망의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다. 불과 2주차의 시간을 두고 개봉한 두 한국영화가 나란히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것이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범죄의 재구성>(2004)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라는 데뷔작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는, 장르적 취향과 비전이 뚜렷한 두 감독의 영화라는 점에서 기분 좋은 일이다. 더구나 여러 인터뷰를 통해 거론된 것처럼, 시대적 배경을 달리하면서도 결국 ‘정의란 무엇인가’ 질문하는 영화들이라는 점에서 현재 천만 관객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게 된다. 무엇이 대중으로 하여금 뒤늦게 정의를 갈구하게 만들었을까.
<암살>과 <베테랑>의 흥행을 축하하며 이번 1020호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다른 여러 기사들도 꼼꼼한 일독을 부탁드린다. 먼저 위의 두 영화를 포함해, 공교롭게도 올해 한국영화에
[에디토리얼] 유족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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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미국, 일본, 중국, 북한, 러시아가 익숙한 우리로서는 너무나 생경한 나라다. 도대체 어디 붙어 있는가? 심지어 철자도 생소하다. C-Z-E-C-H. 중국 요리, 태국 요리, 프랑스 요리는 들어봤어도 체코 요리는 못 들어봤다. 폼 잡으려고 카프카 소설을 읽어봤고, 빨갱이 코스프레를 하려고 카렐 코시크(<구체성의 변증법>)를 읽어봤을 뿐이다. 체코영화는 어릴 때 예고편으로만 본 <프라하의 봄>이 전부다. 영화보다는 오히려 체코 데스메탈(멜랑콜리 페시미즘)과 개막장 고어 그라인드 밴드들(지그-아이, 스패즘)을 더 많이 알고 있으니 말 다했다. 그러나 체코는 의외로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지닌 나라다. 서유럽과 동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시달리기만 했던 것도 비슷하고,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나치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것도 비슷하다.
체코 인형극은 바로 그 식민지배 시절의 문화적 자구책이었다고 한다. 식민통치가 시작되고 독일어 사용이 강요되자
[곡사의 아수라장] 괴뢰는 스스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