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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과정에 있던 선배에게 불행이 닥쳤다. 갑자기 지도 교수가 일년 반의 시간을 쏟은 논문(과 더불어 선배가 그 논문에서 도맡았던 온갖 허드렛일)을 버리고 나서 세상이 억울해진 나머지 책장을 덮고는 날마다 신경질로 소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예민 교수는 원래 신경질 대마왕이잖아.” “그게 오십배쯤 늘었다고 생각해봐.” 그렇다면… 애도를. 설마 못 먹을 걸 먹는다거나 맞고 산다거나 허공으로 사라진 연구비 벌어오라며 파견 노동 나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선배의 교수가 논문 발표를 포기한 건 쓰다 보니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경제에 밝은 (다시 말해 돈이 많은) 부친의 강요로 선택한 학부 전공 경제학이 싫어서 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자네 같은 인재를 기다렸네! 우리가 경제사 연구자가 없어, 허허허”라며 기뻐하는 교수들 덕분에 도로 경제사를 전공한, 시작부터 억울했던 교수는 식민지 시대 조선 경제에 일제가 미친 영향을 연구하다가 의도치 않게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친일’이라는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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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는 월터 살레스 감독이 지구 반대편 동료 시네아스트를 취재한 다큐멘터리다. 극장에서 못 튼다는 사실만 빼면 오늘날에는 디지털 촬영 복제 기술로 누구나 영화를 만들고 볼 수 있으니 정부의 상영 금지도 무의미하다고 인터뷰하던 지아장커는, 문득 다른 기억에 사로잡혔다. “어느 카페에서 개봉하지 못한 <플랫폼>을 틀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막상 가보니 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통유리창이라 영화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랴부랴 검은 천을 구해 가리고 나니 비가 새기 시작했어요. 정상적 영사로, 진짜 의자에 앉아, 불 꺼진 방에서 볼 수 없는 내 영화가 슬펐습니다. 극장에서 틀 수 없는 내 영화가 정말 슬펐습니다.”
08/27
저녁 7시 명동. <침묵의 시선>을 알리기 위해 서울을 찾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을 만났다. 그의 첫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을 보고 다들 놀랐던 점은 대량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잘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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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전자음악 그룹 탠저린 드림을 이끌고 있던 에드거 프로스는 1973년 영국의 버진 레코드로부터 계약을 맺자는 전화를 받는다. 보통 크라우트 록(Kraut Rock)이라고 불리는, 독일 전자음악에 심취된 소수 팬들을 겨냥해서 음악을 만들던 프로스의 입장에서는 당시 신생 레이블로 성공을 거둬 영국과 미국에 배급망을 갖추기 시작한 버진 레코드의 제안에 아마도 무척 고무되었을 것이다.
버진 레코드는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음반 제작사가 아니라 런던 노팅힐 게이트에 위치한 작은 레코드 가게였다. 이 가게의 문을 연 리처드 브랜슨과 닉 파월은 유럽 대륙의 프로그레시브 록과 전자음악 음반들을 직접 수입해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 사업은 소수지만 광적인 런던 컬트팬들로 인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브랜슨과 파월은 음반 가게에 머물지 않고 음반 제작에 직접 뛰어들기로 결심했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이 제작한 첫 번째 음반은 당시 열아홉살의 마이크 올드필드가 여러 악기를 연주하고 이
[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음악은 악몽 혹은 일장춘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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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하와 얼굴들의 <우리 지금 만나>가 깔린다. 나영석 PD가 탑승한 콤비버스에 차례로 올라타는 사람들은 그의 옛 동료들, <해피투게더-1박2일>의 전 멤버들이다. 이승기, 강호동, 은지원, 그리고 도박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키고 자숙 중이던 이수근. 이들이 함께할 프로젝트는 중국 고전 <서유기>를 패러디한 웹 예능물 <신서유기>다.
tvN과 네이버가 합작해 네이버 TV캐스트에서 볼 수 있는 <신서유기>는 글을 쓰는 시점에 이미 조회수 1500만회를 바라보는 대성공을 이루어냈다. 나 PD 특유의 여행, 미션, 그리고 벌칙으로 이어지는 진행 코드는 여전하다. 손오공을 이수근으로 정하고, 머리에 금고아를 씌운 후 저주파 치료기를 부착해 작동 권한을 삼장법사에게 준다는, 코믹하지만 의미심장한 설정에 이어지는 첫 미션은, 손오공의 고향인 서안에서 바로 그 삼장법사를 정하는 것이다. 웹 콘텐츠라는 태생과 목적에 맞게 모든 에피소드의 상영
[김호상의 TVIEW] 면죄부 논란에 대처하는 영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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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에서 우연히 케이크숍의 주방보조 겸 견습생 기범(유아인)을 맞닥뜨린 복싱 선수(조희봉)는 순간 얼어버린다. 과거 최연소 동양웰터급 챔피언이기도 했던 기범을 링 위에서 만난 적 있는 그의 회고에 따르면, 기범은 수많은 여성 팬을 몰고 다니던 ‘링의 아이돌’이면서도 상대 선수에게는 더없이 가혹했던 ‘냉혈 꽃사슴’이었다. 당시 영화에서 유아인을 묘사했던 냉혈 꽃사슴이라는 별명다운 느낌을, 세월이 흐르고 흘러 <베테랑>에 와서야 확인한 것 같다. 그런데 <사도>에서는 또 다른 얼굴이다.
그처럼 요즘 유아인이라는 배우를 다시 보고 있다. <씨네21>과의 인터뷰(지난 1021호 <사도> 커버스토리)에서도 그 스스로 얘기하듯 ‘소년성’이라는 특질을 온전히 간직한 채로 여러 캐릭터들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디카프리오’라는 표현도 어색하지 않은 것 같고, 개인적으로는 유약하고
[에디토리얼] 유아인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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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서 에드거 앨런 포의 이미지를 검색해보면 예상한 대로 검은 고양이, 갈가마귀 혹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포의 사진이 나온다. 그리고 구글에서 다시 러브크래프트의 이미지를 검새해보면 역시 예상한 대로 러브크래프트의 사진과 함께 그가 창조한 무시무시한 괴물들의 이미지가 나온다. 물론 그가 창조한 악마의 서적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도 함께다. 자, 그럼 이번엔 “포&러브크래프트”로 검색해보자. 예상한 대로 둘을 함께 그린 일러스트레이션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데, 둘을 동업자/형제/라이벌 등으로 묘사한 그림들이다(한번 찾아보라. 졸귀).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오른쪽 그림이다. 포는 갈가마귀를 머리에 얹고 있고, 러브크래프트는 어항에 그의 피조물- 크툴루- 을 담아서 가지고 있는데, 러브크래프트가 말을 걸고 있다. “포씨, 머리 위에 갈가마귀가 앉아 있는 거 아세요?” 포가 대답하길, “네, 알아요”. 그러자 러브크래프트의 반응은… “
[곡사의 아수라장] 어느 지옥행 열차에 타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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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들은 음악을 다시 들으면 좋아했던 곡들 중 어렴풋한 기억을 동반할 때가 있다. 특별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어도, 냄새나 감각의 한 종류 같은 무엇이 그 안에 있다.
요즘 음악은 예전보다 훨씬 쉽고 다양하게 들을 수 있다. 깊은 조예가 없어도 취향과 기분에 맞춰 알아서 모르는 곡들을 알려준다. 음반은 죽어간다지만, 음악과 음원이 여전한 시대에 역설적으로 내게 특별한 노래는 어쩐지 적어진다. 음악이 어떠한 상황의 중심이 아니라 극 전반에 깔리는 배경처럼 되어서일까. 어느 ‘문화’들의 변천을 생각할 때, 주어나 주체만 다르지 엇비슷하게 엇비슷한 방향으로 ‘대세’가 되어 흐르는 걸 함께 떠올리면 얘기의 주어를 패션이나 옷으로 바꿔도 별반 지장은 없을 것이다.
더 포스탈 서비스(The Postal Service)는 2001년 미국 시애틀에서 결성한 인디 록 밴드다. 총 7장의 싱글을 발매했지만, 정규 음반은 2003년 《Give Up》 딱 한장만 냈다.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마감인간의 music] 10년 전 그 멜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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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아메리칸 울트라> 깨어난 액션 세포의 정체
[정훈이 만화] <아메리칸 울트라> 깨어난 액션 세포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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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맨>과 <아메리칸 울트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예술을 가르치는 일은 애초에 가능한가? 좋은 예술 교육이란 무엇인가? 바스티엥 비베스의 만화 <폴리나>에 등장하는 무용 교수 보진스키와 <미라클 벨리에>의 음악 교사 토마슨(엘릭 엘모스니노)이 힌트를 줬다. 위대한 스승에 관한 일반적 관념과 달리, 두 교사는 제자의 대리 부모 역을 자임하지 않는다. 학생이 말하기 전에 집안 사정을 묻는 법이 없고, 인생의 금과옥조가 될 대명제를 던져주지도 않는다. 대신 본인의 교실에 들어온 예술가 지망생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정확히 어떤 종류의 재능인지 파악해서 알려준다. 무엇보다 나쁜 습관이 어린 몸에 배지 않도록 경계한다. 세상은 네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고 따끔하게 환기시키는 이 선생님들은 동시에 자신의 콤플렉스를 학생에게 전가하지 않도록 유의한다.
08/20
에드거 라이트가 중도하차하고 페이튼 리드의 연출로 완성된 <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폴 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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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아빠 회사에서 발행하던 사보에 내가 쓴 일기가 실린 적이 있다. 그 페이지를 스크랩해둔 아빠 덕분에 얼마 전 추억의 책장을 넘기듯 그 스크랩북을 넘기는데 열살이던 내가 남긴 몇 구절이 뭐랄까, 짠한 뒷맛을 남겼다. “내일은 눈이 펑펑 안 왔으면 좋겠다. 내일은 얼음이 꽝꽝 안 얼었으면 좋겠다. 아빠가 자전거 타고 회사에 가다 미끄러질 수도 있으니까. 그럼 아빠가 엄마한테 월급봉투 못 갖다줄 거니까.” 때이른 조숙이 애어른을 만들었나, 돈이라는 것이 몸에서 땀을 내야 벌린다는 걸 꽤 일찌감치 알아버린 나는 그만큼 돈이 무섭다는 사실 또한 모르지 않아 대학에 들어가던 그해부터 닥치는 대로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댔다. 무엇보다 내겐 특별한 의미에서의 가욋돈이 필요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되도록 남이 쓴 글을 많이 읽어야 득이 됨이 당연한데, 책이란 것이 고전은 고사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신간 속에 섞여 나오니 서점 들락거리기가 내겐 방과 후 과외 수업이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우리 사과를 닦아 먹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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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약간 부끄럽지만, 치킨을 먹을 때의 개인적인 취향이 있다. 퍽퍽한 가슴살 부위를 치킨 무를 절여놓은 단촛물에 찍어먹는 것인데, 육질이 촉촉하고 연해져서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소금이나 소스를 찍어먹는 정도를 벗어나 샛길로 빠지는 기쁨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더 맛있게 먹으려 골몰하는 타인의 팁들이 궁상맞고 집요할수록 매료되는데, 김준현, 문세윤, 김민경, 유민상 네 코미디언의 ‘먹방’ 코미디TV <맛있는 녀석들>의 첫회를 보고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감자탕 볶음밥에 깍두기를 썰어넣고 한술 크게 뜬 문세윤이 숟가락의 밑면을 고기 찍어먹던 겨자간장이 담긴 종지에 스치듯 적시자, 김준현의 탄성이 터진다. 상대의 기술을 인정하는 눈빛으로 “대단한 친구”, “먹을 줄 아는 친구” 등의 찬사를 던지고, 서로 교감하는 것이다.
돈이나 시간처럼 한정된 비용의 실패 없는 선택을 장담하는 맛집 프로그램과 미식 블로그들에 시큰둥해지던 차에, 이들의 식도락은 맛을 증폭
[유선주의 TVIEW] 맛있는 케미스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