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목길에서 널 기다리네, 아무도 없는 쓸쓸한 골목길’,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각각 이재민과 김현식의 노래에 나오는 골목길이다. 하지만 그런 골목길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파트 단지 한 모퉁이나 빌딩 사이라면 몰라도. 지난 30여년 동안 서울의 골목 풍경을 담아온 김기찬의 사진과 시인 황인숙의 글을 실은 이 책은 그래서 오늘날 일상의 풍경이라기보다는 먼 과거 기억 속 장면으로 다가온다.
‘처마는 실생활에서 지붕의 가장 낭만적인 부위다. 우리는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한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때, 처마 끝에서 굵어진 빗방울들이 주룩주룩 치는 수렴(垂廉) 너머의 세상은 가볍게, 깨끗이 부서지고 맺히며 아롱거리는 커다란 빗방울 같다. 안과 밖의 경계에서, 안이기도 하고 밖이기도 한 처마 밑에서.’
‘축대 계단 담장 벽의 공통점은 쌓아올린다는 것이다. 그 행위에는 사람을 숙연하
그때 그 골목에서는 무슨일이,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
-
밍고의 물음은 짧고 분명하다. “헤어진 남자친구 제리와 ‘그냥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눈썹 짙고 팔다리 짧은 3등신의 주인공으로 연애만화를 그린다는 것부터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만, 그 하나의 멜로디 라인을 변주하면서 독자들을 질리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반복되는 멜로디의 조금씩 틀어지는 부분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그 사소함이 작으면 작을수록 더욱 감격하게 된다.
<남자친9>는 토마의 첫 만화책이지만, 그녀는 이미 <선생님과 나> <크래커> 등의 인터넷 만화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다. 그녀가 보여주는 낙서처럼 가볍지만 정갈한 선, 원색에서 한톤 다운된 부드러운 컬러, 신경쓰지 않은 듯 잘 배치된 패션 소품들과 같은 여러 요소들은 최근의 일러스트레이션 경향과 통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캐릭터들의 친근하고 예쁜 이미지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공감이 소소한 생활의 묘사로부터 우러나오고, 그로 인해 우
그냥 친구와 남자친구 사이, 토마의 <남자친9>
-
파울로 코엘료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브라질에서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에 정신병원을 들락거렸으며 히피문화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후 <연금술사>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11분> 등의 소설을 썼고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 그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오 자히르>는 다른 코엘료의 근작처럼, 영적 체험과 사랑을 찾아 먼길을 떠나는 인물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런데 분량이 조금 만만치 않다. 400페이지를 넘는 분량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코엘료가 제안하는 신비로운 여행을 접한다.
<오 자히르>는 보르헤스의 단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 한다. 책의 서두에서 포부르 생 페르가 인용하는 보르헤스의 정의에 따르면 ‘자히르’는 “이슬람 전통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눈에 보이며 실제로 존재하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일단 그것과 접하면 우리의 사고를 점령해나가 다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사물 혹은 사람”을 일컫는다고 한다. 신성
지금까지의 너이기를 그만두고, 너 자신이 돼라, <오 자히르>
-
국내에 영화 열기가 한껏 뜨거웠던 1990년대 중반에 영화를 공부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질 들뢰즈의 <시네마>는 아스라한 동경의 대상 같은 것이었다. 당시 여기저기서 간간이 소개되던 그것은 막막한 영화이론의 돌파구를 열어줄 매혹적인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그것 자체에 제대로 다가갈 길은 별로 없었으니 한국에서 그 난해하고 복잡한 저작은 대체로 전모를 드러내지 않은 막연한 오해의 대상이요 신비로운 미지의 대상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시네마>로 본격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마련된 때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얼마 전에 <시네마2>가 마침내 번역·출간되었는가 하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네마>에 대한 꼼꼼하고 체계적인 해설서인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가 출판되었으니 이제 <시네마>의 실체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이다.
이제 <질 들뢰즈의…>로 들어가보면,
들뢰즈의 영화철학에 들어가는 길,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
-
-
섹스라는 책제목과 사용설명서라는 시리즈 제목을 연결시켜 ‘실전 테크닉 안내서’로 추정하기 쉽지만(물론 독자가 사용하기 나름), ‘성적인 행동에 관한 사실과 일화, 과거와 현재로 이루어진 거대하나 희뿌연 연못에 살짝 한번 몸 담그는 유쾌한 지적 경험’이라는 저자의 말이 이 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전해준다.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밑줄 그으며 읽을 필요도 없으며 심각하게 읽을 필요는 더더욱 없다. 어떤 내용이기에?
러시아 신비주의자 라스푸틴은 이것의 길이가 31cm였고, 영화배우 에럴 플린은 파티장에서 이것으로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작가 헤밍웨이는 이것이 새끼손가락만 했고, 헤밍웨이 못지않게 이것이 작았던 작가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와 함께 이것의 크기를 재본 적도 있으며,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는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이것이 아무리 길다한들 무슨 소용이랴’라고 말했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건 아닌데, 예컨대 흰긴수염고래의 이것은 3m에 달한다. ‘이것’이 뭔지는 굳이….
섹스에 관한 잡다하고 세세한 백과사전, <섹스: 사용설명서>
-
도심 한복판에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걸어간다. 단순한 비대남으로 보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온몸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있는 남자는 계속해서 식은땀을 흘리며 기침을 해댄다. 감기라도 걸린 걸까? 그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고, 주변에는 그와 함께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돌연 남자는 두눈, 두 콧구멍, 입… 신체의 모든 구멍으로 피를 스프링클러처럼 뿌려대며 쓰러진다. 주변 사람들도 비명을 지르며 피범벅이 된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지금껏 인류에게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바이러스가 화려한 길거리 홍보 행사를 벌이고 있다.
10년 혹은 20년 전만 해도 만화와 영화는 현실의 대재앙을 충분히 앞서갔다. 사람들은 ‘정말로 미래에는 이런 일도 벌어질지 몰라’ 하며 오싹한 불안감을 야릇한 안도감으로 누르며 책장을 덮고 극장을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9·11 테러와 쓰나미와 같은 대재앙이 위성TV와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시대. 게다가 그 파괴의 범위와 사망자 수도 픽
사스의 악몽을 기억한다면, 호카조노 마사야의 <이머징>
-
나르시시스트 소년과 마조히스트 소녀의 기이한 애정행각을 그린 <M과 N의 초상>은 다치바나 히구치의 엽기 순정의 세계에 속한 걸작이었다. 코피를 흘리면서도 황홀경에 젖어 “때려줘, 더 때려줘!”라며 애원하는 여학생과 자신의 모습을 거울이나 유리창을 통해 한순간이라도 봐버리면 갑자기 주변이 샤방샤방 빛의 제국으로 변하며 쓰러지는 미소년의 어처구니없는 로맨스를 보고 있자면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퍼니퍼니 학원 앨리스>의 시작은 그보다 가볍고 경쾌하다. 아이들은 이제 막 취학연령을 넘겨 학교생활을 시작했고, 어리며, 주인공 미캉은 ‘정상’이며 착한 마음씨의 소녀다. 단짝 호타루를 따라 특수학교 앨리스 학원에 입학한 미캉은 그 학교가 요구하는 것이 ‘앨리스’라고 부르는 기이한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치바나 히구치의 가느다란 펜터치로 그려진 각기 특이한 앨리스를 가진 아이들 사이에서 미캉은 자신이 ‘무효화 앨리스’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른 이들의
이상한 학원의 앨리스, 다치바나 히구치의 <퍼니퍼니 학원 앨리스>
-
1995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번역서가 나왔지만 절판됐다가 10년 만에 다시 선보였다. 우리 도서 시장의 일본 소설 붐을 출판사쪽이 감안했기 때문일까? 여하튼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찾기 위해 헌책방을 뒤졌다고 하니, 재출간이 반갑다. 제목만 보면 일본 야구 해설서 같지만 야구가 사라진 미래 세계에 살고 있는 야구광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물음표를 넣은 까닭은 이 작품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줄거리랄 것도 별로 없고 서로 관련없어 보이는 단편들이 죽 이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놓고 포스트모던 어쩌고저쩌고 한다지만, 그런 얘기는 평론가들에게 맡기고 일단 한번 읽어보시라!
야구를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900편의 야구 시 쓰기와 100편의 포르노 비디오 보기에 도전하고 있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있다. 야구에 관한 글만 모으는 노인은 카프카의 글이 야구에 관한 글이라고 간주하고, 카프카가 야구에 대단한 열정을 지닌 후보 포수 정도였으리라 추정
이게 소설이라고?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영감을 불러오는 건전지나 아이디어들을 보관해두는 냉장고가 있다면? 너무나 완벽해서 더이상 다른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글이 있다면 어떨까? 책과 문학에 관한 판타지 소설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서라면 책에 대해 당신이 꿈꾸는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
일흔일곱살의 오동통한 작가지망생 공룡 미텐메츠는 문학적 대부인 단첼로트가 유언으로 남긴 어느 원고를 읽게 된다. 단첼로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너무나 완벽에 가까워서 그 자신의 절필의 원인이 된 작품이다. 미텐메츠는 그 작품을 읽고 감명받아, 부흐하임으로 떠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작가를 찾아나선다. 공식적으로 등록된 고서점만 5천개가 넘는 부흐하임에서 미텐메츠는 책에 둘러싸인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먹물 포도주를 마실까 삼류소설 커피를 마실까 고민하다가 영감이라는 바닐라 밀크 커피를 선택해 마시고, 영감에는 시인의 유혹이라는 단 과자를 같이 먹으며 책을 읽는다. 어느 날 미텐메츠는 수수께끼의 원고를 들고 찾아간
책벌레가 되어라, 그 안에 꿈이 있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
-
노숙자가 맡긴 로또 복권으로 유혹에 빠진 목사, 식육용 인간을 사랑하게 된 젊은 도살꾼, 강의 시간에 자리를 비웠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린 강사…. 변기현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곤궁에 처해 있다. 만화의 배경은 다채롭지만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을 옥죄고, 단단한 데생의 사물들이 인물 주변을 압박하고, 꼼꼼한 컬러링은 화려하지만 무겁다. 광각을 즐겨 쓰는 주관적인 앵글이 이 모든 것을 화면 앞으로 끌어당기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무지막지한 압력을 만들어낸다.
변기현의 단편집 <로또 블루스>는 지난 몇년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온 한 젊은 작가의 궤적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신인급의 단편집이기 때문에 작품들 사이의 편차가 상당히 존재하고, 아주 설익은 단편도 없지 않다. 뫼비우스, 마쓰모토 다이요, 오오토모 가스히로 등 여러 스타일리스트들로부터의 영향이 작품들을 산개시키는 느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처럼 광범위한 모색의 기운이 <로또 블루스> <비 내리는
기묘한 아이러니가 가득찬 세상, 변기현의 <로또 블루스>
-
세계 각지에는 무수히 많은 민담들이 전해내려오지만,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민담은 신데렐라 유형의 이야기다. 유럽, 일본, 중국, 베트남, 인도, 중동, 이집트, 러시아 등 사실상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걸쳐 대략 1천편 정도의 이야기들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콩쥐팥쥐’도 이 유형에 속한다. 신데렐라 유형에 속하는 이야기의 공통점은 주인공은 고아이거나 의붓딸이며, 계모의 시기와 학대로 고통받다가 동물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해결하고, 아름다운 옷을 갖게 된 뒤 신발 한짝을 잃어버리지만 그것을 계기로 왕자와 혼인한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에는 꿈과 아름다움이 가득하지만 민담에는 폭력적 요소와 잔혹성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그림 형제의 신데렐라 이야기에서는 언니들이 유리구두에 억지로 발을 끼워맞추기 위해 스스로 발을 잘라내는가 하면, 신데렐라의 혼인식날 비둘기에 눈을 쪼여 장님이 된다. 베트남판 신데렐라 이야기에서는 주인공 할록이 언니를 죽여 젓
민담 속 성과 폭력은 어디로 간 걸까,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