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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들 사이에 시화전이라는 게 유행한 때가 있었다. 직접 그린 수채화에 자작시를 적어넣은 시화 작품들을 전시하면, 친구들이 작품 옆에 꽃을 붙여 축하해주던 그때 그 시절이다. 이 책은 시화(詩畵)를 모은 건 아니지만, 헤르만 헤세가 그린 수채화 44점과 산문 및 시를 담고 있다. 화가로서의 헤세는 진작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불혹의 나이부터 세상을 떠난 85살 때까지 3천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헤세는 셰델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림 그리기는 놀라운 일입니다. 일찍이 아는 내게 눈이 있으며 나 자신이 이 지상에서 주의 깊은 산책자들 중 하나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변화가 나를 이 덧없는 의지의 세계에서 해방시켜줍니다.”
세부 묘사에 충실한 자연주의 경향, 색채에 집중하고 요약과 추상을 통해 자의식을 강하게 표현하는 표현주의 경향, 다분히 입체파적인 실험적 수채화에 이르기까지
수채화로 전하는 대문호의 꿈, <화가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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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만 832쪽, 해설을 포함하면 847쪽이 되는 엄청난 두께의 만화가 찾아왔다. 백화사전쯤 되는 위용을 자랑하니, 책꽂이의 한 자락을 차지해도 폼이 난다. 오랜 시간 작업해온 오세영의 단편이 한몫에 묶인 것이다. 예전에 출간된 책이 3권 분량이었으니, 그만큼이 오롯이 묶였다. 우선 한권에 여러 이야기를 한꺼번에 보는 마음은 흐뭇하다.
이번에 묶인 단편은 거의 해방 전후 소설가들(북한 작가 림종상의 <쇠찌르레기>만 1990년 작품이다)의 단편을 만화로 옮긴 것이어서, 전근대와 근대가 만나는 미묘한 풍광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일면이 흥미롭다. 보통 원작을 만화로 옮길 때, 이야기의 주요 맥락만 따라가고 세세한 묘사는 생략하게 마련이다. 특히 어른을 위한 책이 어린이 책으로 번안될 경우 때에 따라 개작에 가까운 변화가 있기도 한다. 이럴 경우 원작에서 느끼는 품격 대신 줄거리만 남고, 만화는 시각적 이미지로 앙상해진 줄거리를 보충한다.
그러나 오세영의
소설에 숨을 불어넣는 만화, 오세영의 <한국단편소설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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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세계영화사>에 뒤이어 국내에 소개되는 <세계영화연구>는 아직 책을 펼쳐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도 하다. 따라서, 우선은 이것이 이른바 ‘월드 시네마’를 다루기는 하지만 그것의 현황과 역사에 대한 것만은 아님을 밝혀야 할 것 같다. 그보다는, 원제가 <옥스퍼드 영화연구 입문>인 <세계영화연구>는 영화연구에로 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통로들과 시각들을 제공해주는 책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영화 텍스트 분석, 영화이론, 할리우드영화, 영화사 등의 다양한 영역들에 걸친 80여개의 항목들이 리처드 다이어, 더들리 앤드루, 톰 거닝 같은 권위있는 필진들의 관여에 힘입어 체계를 갖춘 모양새로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부피가 두텁더라도 그렇게 많은 내용들을 한권에 몰아넣은 책이 논제에 대해 상당한 깊이까지 다다르기가 어렵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당연히 <세계영화연구>는 본격적인 이론
영화 연구를 위한 충실한 가이드, <세계영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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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번호는 모르겠고, 만파(卍巴)시 불가사의 마을 아시아라이 저택. 만약 당신이 우체부라면 이 주소가 당신의 구역이 아니기를 함께 기도하자. 일단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어 출입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자칫 저택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동에 휘말렸다가는 ‘단순 사망’이 아니라 9999년 동안 개구리 지옥에서 양서류들의 피부 관리를 하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판타지 장르에 대해 조금 안다 싶으면, 이 만화에 함부로 손대지 말기를 바란다. 이상야릇한 사건과 연이은 개그에 휘말려 만사를 젖혀두고 몇번씩 작품을 탐독할지 모른다. 만약 당신이 판타지에 대해 전혀 모른다면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강력한 봉인의 힘으로 단 한장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세계는 수수께끼의 ‘대소환’ 이후 마법계와 인간계가 마구 뒤섞여버린 상황. 이른바 ‘중앙’이라는 곳의 강력한 통치가 행해지고 있지만, 길거리에서는 인간의 도덕률로는 장악되지 않는 이 세계 존재들의 살인과 폭력 등 과격한 행동들이 일
판타지 결계 안의 뒤죽박죽 일상, <아시아라이 저택의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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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은 1903년 일본 유학을 떠나는 중국 청년이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왜 일본이 불로장생의 영약이 있는 신산(神山)이었을까? 1895년 청일전쟁 패전으로 중국인들이 받은 충격은 쓰나미의 충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본을 배워 일본을 이기고 말리라!’ 이런 그들의 각오와 청나라를 회유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맞아떨어져 19세기 말부터 일본을 찾는 중국인 유학생들이 봇물을 이루었다.
중화사상에 젖어 있는 엘리트 청년들이 유학 생활에 연착륙했을 리 없다. 중국인을 업신여기는 태도에 분개해 자살한 유학생이 있는가 하면, 1903년 오사카 박람회에서 주최쪽이 인도, 중국, 조선, 자바, 오키나와, 아이누인의 풍속을 전시하려는 것을 알고 항의하여 계획을 철회시킨 유학생들도 있었다. 수치심, 자존심, 사명감, 애국심, 일본에 대한 경계심, 이런 것들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이었다.
문화적 차이는 또 어떤가? 침대없는 다다미방, 국 한 그릇, 밥 한 공기에 채소 반찬만 나오
중국인 일본유학 1세대의 ‘청춘 군상’, <신산을 찾아 동쪽으로 향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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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 시나리오 작가가 적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정도의 일이다. 1980년대 만화방 만화에 대량 생산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작화와 스토리의 분업이 시도됐고, 유명한 만화방 히트작에는 이름 모를 시나리오 작가가 숨어 있었다. 그들은 90년대가 되어 김세영, 야설록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표기하기 시작했고, 야설록처럼 시나리오 작가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역전된 상황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시나리오는 만화에 있어 부가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하면,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만화의 완성도에 있어 시나리오가 차지하는 부분은 30% 정도라고 보면 된다(어느 유명 작가의 인터뷰에서 본 내용이다). 그렇게 시나리오는 만화의 한 부분으로만 조립되어 있었다. 궁극적으로 이야기 만화에서 독자들에게 공명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등장인물의 감정을 감염시키는 것이, 한회 한회 독자를 붙들어놓아야 하는 서스펜스를 구조화하는 것이 ‘시나리오의 힘’이라는 사실은 무
시나리오의 힘, 윤인완의 프로젝트 단편집 <데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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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모든 나라에는 저마다의 ‘청춘 상경기’가 있나보다. 한국에서는 순진무구한 갑순이가 첫사랑 갑돌이를 찾아 서울역에 내리면, 아저씨 을이 보따리를 훔쳐가고 이어 아저씨 병이 나타나 성매매 업종에 취업시켜버린다. 일본에서는 꿈 많은 소년 이치로가 도쿄 우에노 역에 내리면 되바라진 소녀 마루꼬가 가방을 훔쳐가고, 이치로는 자동차 정비소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폭주족의 바이크에 매달린 마루꼬를 발견한 뒤 그 역시 모터바이크의 매력에 빠져버린다. <CB感. Reborn>(학산문화사 펴냄)은 바로 이 일본판 청춘 상경기를 미래로 옮겨간 작품이다.
서기 2XX4년. 열다섯살의 소년 쥰은 지구에서 가장 먼 콜로니, 달리 말하면 우주 촌구석인 야마타이에서 대학 입시 학원을 다니기 위해 지구로 유학을 온다. 그가 찾아가는 곳은 형이 살고 있는 도쿄로, 고향에 비하면 엄청난 도회지이지만 지구에서는 집값 싼 변두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미 지구는 베이징을 중심으로 통일된 정치 체제로
미래의 지구, 일본판 청춘 상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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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피조물인 쥐와 만물의 영장인 인간, 두 생물의 아주 오래된 공존의 역사.’ 이 긴 부제목을 다시 부연하면 ‘뉴욕에서 인간과 시궁쥐가 벌인 갈등과 공생의 역사’가 된다. 저자는 야간투시경을 쓰고 맨해튼 뒷골목을 뒤지며 ‘라투스 노르베기쿠스’라는 학명을 지닌 시궁쥐를 관찰했다. 뉴욕 시궁쥐들은 꼬리까지 포함 50cm가 넘는 것도 있고 고양이까지 잡아먹는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온 국민이 쥐약 놓는 날까지 있었던 게 언제였더라? 쥐잡기 캠페인, 쥐잡기 포스터까지 등장했었다. 그러나 독약이나 덫 같은 퇴치법은 살아남은 쥐들의 생존 환경만 호전시켜 더욱 크고 강한 쥐를 득세시킨다. 쥐들의 생존 환경에 압박을 가하는 것, 그래서 먹을 게 없어진 쥐들이 서로 잡아먹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게 하는 게 지름길이다. 시궁쥐는 영국 이민자들과 함께 미국에 도착했고, 엄청난 번식력으로 곰쥐를 몰아낸 뒤 1926년쯤 북미 대륙을 장악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
쥐구멍에서 발견한 인간의 역사, <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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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월13일은 고종 황제의 허가를 받아 하와이의 농장으로 이민을 떠난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한 날이다. 어느새 100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많을 때는 연간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지금도 매년 5천명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데릭 커크 김은 8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1.5세대 청년. 그가 그린 만화는 그의 정체성답게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아시안 청년의 일상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표제작이자 가장 긴 장편인 <다르면서 같은>은 국내 만화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우디 앨런식 말장난 개그’다. 윌 아이스너가 자신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말풍선의 고리를 타고 화자를 넘나드는 연출은 흥미롭게 두 화자의 대화를 재현했다. 단순해 보이는 연출이지만, 만화에서 ‘말풍선’이라는 새로운 발명이 얼마나 상황과 이야기를 풍부하게 했는지를 금방 증명할 수 있는 사례들이다.
<다르면서 같은>(same difference)이라는 제목
두 아시안 청년의 성장과 변화, 데릭 커크 김 <다르면서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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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옷가지나 향기로운 요리에 홀릴 때처럼, 참을 수 없는 소유욕을 발동시키는 책들이 있다. 번역 소식이 들려온 지 약 4년 만에 한국어판이 출간된 <옥스포드 세계 영화사>도 그렇다. 영화 탄생 100주년에 즈음한 1996년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이 책은 방대하고 미덥다. 영화사에 대한 균형 있는- 논쟁을 거쳐 어느 정도 공인된- 지식과 신중한 견해들을 연대와 지역 순서로 정리한 서랍을 연상하면 비슷하다. “이 책만 독파하면 영화사는 완전 정복”이라는 무모한 야심으로 장만할 법한 책이지만, <옥스포드 세계 영화사>의 실제 쓰임새는 1만개에 달하는 필요한 항목을 그때그때 뒤적이는 참고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지식 검색용 사전식 구성 대신 ‘스토리텔링’을 고집한다. 영화사의 기술적 발명, 산업과 제도, 장르와 작가가 어떻게 등장하고 진화하고 때로 도태되었는지, 여러 장의 흐름을 연결해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80명의 필진
미학을 넘어 테크놀로지까지 영화사 총망라, <옥스포드 세계 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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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거대한 농담 같은 소설이다. 파렴치에 가까운 상상력을 가진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는 구두가게가 너무 많아 파산한 행성이 있고, 살아남은 몇몇 주민들은 다시는 신발을 신고 싶지 않아서 새가 되었다는 따위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이것을 SF라고 부를 수나 있는 걸까? 그러나 <은하수를…>은 이상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우주를 지배하는 존재와 빅뱅과 지구의 탄생이 술 한잔 안줏거리로 전락하는 쾌감. 그러니까 인간이란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그 사실이 서글프다기보다 재미있기만 하다.
아서 덴트는 지구가 초공간 우회로 건설 때문에 파괴되기 몇분 전 친구 포드 프리펙터와 함께 지나가던 우주선에 올라탄다. 포드는 <은하수를…>의 조사원이었지만, 우주선이 지나가지 않아, 산간벽지 지구에서 15년 동안 살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무렵 은하계 대통령 자포드 비블브락스는 그가 데려온 지구인 여자 트릴리언과 함께 최신
거대한 농담같은 SF,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