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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지도를 펼쳐라, 영화 바다로 빠져라!
2002-11-14

부산영화제를 백배 즐기고 싶은 당신을 위한 씨네의 제안

이제 당신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무턱대고 현장판매 대열에 몸을 끼워넣고 아무 티켓이나 받아든 뒤, 상영관 안에선 눈을 감은 채 피곤한 육신을 쉬게 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에 걸맞는 올바른 선택을 해 젖과 꿀이 흐르는 영화제 여행을 경험할 것인가.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맞아, <씨네21> 데일리는 한 가지 제안을 하려 한다. ‘취향대로 입맛대로 골라보는 영화제’가 바로 그것이다. 부디 이 ‘취향과 입맛의 지도’가 부산의 방랑자들에게 자그마한 이정표 노릇을 할 수 있기를.

부산영화제를 묘사할 때 ‘영화의 바다’라는 다소 상투적인 비유를 쓰는 것은 단지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올해만 해도 227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이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제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향해 올곧은 걸음을 내딛는 일은 어렵기 그지없다. 워낙 다종다양한 영화가 한꺼번에 상영되는 통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길을 잃고 이 영화의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십상이다. 게다가 한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영화 편수도 너무 제한적이다. 영화제 기간이 모두 10일이라고 하지만 1편씩만 상영하는 개막일과 폐막일을 빼면 8일이 남는다. 밥도 거르고 숨도 몰아쉬는 초인적 능력을 발휘한다면 하루 4번의 상영을 모두 관람할 수 있지만, 그래 봐야 32편에 불과하다. (만약 당신이 영화 편수에 집착하는 쪽이라면 ‘동시상영’ 작품이 상영되는 와이드앵글 부문을 권한다) 결국 나의 분열된 자아들을 남포동 거리와 해운대 일대로 풀어놓지 않는 한, 34편(와이드앵글 작품을 합하면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일 당신이 신문의 정치면과 국제면을 보며 혀를 끌끌 차며 걱정을 쏟는 이라면, 올해 부산영화제의 가장 큰 경향인 정치, 역사 소재의 영화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의 9.11 사태를 기점으로 급변하고 있는 세계의 질서 속에서 영화라는 예술 또한 적극적인 개입 지점을 모색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뜨거운 이슈를 가장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는 영화는 전세계 11명의 감독이 바라보는 9·11 테러를 11편의 단편영화로 담은 이다. <아모레스 페로스>를 만든 멕시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나리투 감독의 사실적인 다큐멘터리 풍 영상부터 현상범 오사마 빈 라덴을 쫓는 아프리카 소년들의 황당무계한 모험담을 그린 부르키나 파소 이드리사 우데르고 감독의 에피소드까지 ‘그라운드 제로’의 다양한 ‘진실들’을 보여준다.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터키에 배척받으면서 오랫동안 삶을 영위해온 쿠르드 족의 운명을 애절하게 그리는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고향의 노래>,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재조명하는 <신의 간섭>, 갖은 문제로 시달리고 있는 남미 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이름은 볼리바>,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피의 악순환이 어디로부터 비롯됐는지를 거론하는 <블러디 선데이>, 80여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 지금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지 보여주는 <아라라트> 등은 끊임없는 충돌과 반목으로 가득한 현실이야말로 시대적 소명을 가진 예술가가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세계임을 설파한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세상을 맨눈으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의 힘에 관심을 기울여온 분들이라면 와이드앵글 섹션의 한국, 아시아, 월드 다큐를 권한다. 문화혁명이라는 유래없이 거친 격랑을 거친 인간들의 모습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연안에서 온 딸>은 또 하나의 추천작이다. 정치와 역사라는 ‘거대담론’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된 딸과 아버지의 비애어린 재회는 비단 옛날 중국에서 일어난 특별한 이야기로만 다가오진 않을 것이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가 출범해도 여전히 친북인사로 낙인찍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송두율 교수의 삶을 다룬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나 눈부신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을 마약중독자로 내모는 ‘자본주의 중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또한 지금 여기에 과연 이성과 문명이 존재하는지 묻는 작품들. 거대한 쓰레기 산이 무너져 1천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필리핀의 파타야스 지방의 생생한 삶을 담은 <신의 아이들>도 외면할 수 없다.

물론 올해 부산영화제엔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살며 사랑하고 증오함으로써 다시 하나 되는 인생의 달콤쌉싸롬한 진실을 일러주는 영화들에 마음이 기우는 관객이라면 멜로영화에 주목하길 바란다. 남성과 여성 또는 동성 간의 관계를 기묘한 방식으로 바라보기로 소문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는 다른 이유로 혼수상태에 빠진 여성들과 이들을 사랑하는 남자들을 통해 사랑이라는 관계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동물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기묘한 소재를 신비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곰의 키스>, ‘물의 여인’과 ‘불의 남자’의 사랑을 그린 <물의 여인>, 신파가 아닌 원숙한 표현의 경지를 보여주는 허안화 감독의 <남인사십> 등은 놓칠 수 없는 영화. 멜로영화로 출발하지만 멜로영화의 한계를 넘어서는 독특한 분위기의 한국영화 <질투는 나의 힘> 또한 부산의 관객만이 먼저 맛볼 수 있는 신선한 맛의 영화다.

영화제가 아니라면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영화철학자들의 신작은 언제나 부산영화제를 기다리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졸음과 격전을 펼칠지라도 상영관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의 성취감을 느끼는데 만족하는 분이라면 작가영화를 추천한다. 켄 로치의 10대별곡 <스위트 식스틴>, 이미지의 마술사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 포르투갈의 거장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불확실성의 원리>, 그루지아의 은둔자 오타르 요셀리아니의 <월요일 아침>, 기타노 다케시의 탐미적 영화 <돌스> 등은 이미 영화를 통해 자신만의 사유를 완전하게 펼칠 수 있는 시네아스트들의 작품들. 미래의 거장을 발견하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중국영화의 미래’ 지아장커 감독이 만든 탄광촌 아이들 이야기 <임소요>, 여성에 관한 또 다른 시선을 제공하는 클레어 드니의 <금요일 밤>, 실질 노동자들을 향해 연대의 손을 내뻗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 맨체스터 음악계를 생생하고 유쾌하게 묘사하는 마이클 윈터보텀의 <파티 피플> 등이,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길 것이다.

당신이 슈퍼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여성들의 삶, 고통, 희망, 연대에 감동을 느끼는 취향이라면, 여성영화에 집중하는 편이 좋겠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에 빛나는 <막달레나 자매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착취한 60년대 아일랜드의 한 수녀원을 그린다. 가톨릭 교회가 유린한 여성의 삶을 고발하는 이 영화는 직설적인 묘사로 충격을 불러모으는 작품이다. 이란의 여성 교도소를 배경으로 여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을 그리는 <여성 교도소>, 남자친구의 죽음 이후 새 삶을 꾸려나가는 한 여성을 그려 ‘올해 영국영화의 발견’이라는 평가를 받은 <모번 켈러의 여행>, 도발적인 문제제기로 악명(?)높은 프랑스 카트린 브레야 감독의 노골적인 섹스 이야기 <섹스는 코미디다> 역시 여성성, 또는 남성성에 관심있는 관객으로선 놓치기 아까운 영화들.

만약 당신이 상영관의 어둠 속에서 몸을 늘어뜨리는 게 견딜 수 없는 관객이라면, 대중성이 확실한 영화들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스계 미국인과 ‘그냥 미국인’의 결혼 소동을 그리는 <마이 빅 팻 그릭 웨딩>, 카트린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등 당대 최고의 프랑스 여배우가 쏟아져 나오는 , 김상진 감독의 신작 <광복절 특사> 등은 그동안 쌓인 영화제의 여독을 한번에 날려줄 작품들이다.

영화제에서 항상 벌어지는 티켓 전쟁, 입장 경쟁과 만성적인 피로에 찌들기 싫은 분이라면, 영화의 바다에서 영화는 싫고 바다만 좋으신 분들이라면 기꺼이 자신의 취향을 즐기는 편이 낫다. 남포동 건너 자갈치 시장에 싱싱한 곰장어를 구워먹으며 영화제 인파를 감상하거나 해운대 포장마차에서 삼삼오오 모여있는 영화인들과 소줏잔을 기울이는 것 또한 영화제의 매력 아니겠는가. 그럼 부디 모두모두 취향따라 즐감하시길!

문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