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했고, 내전을 통해 평등을 구축한 미국. 20세기는 결국 미국의 전쟁광 기질이 만개한 시기다. 어쩔 수 없이 끼어든 1차 대전 이후. 군수산업을 통해 짭짤한 이들을 챙기는 한편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까지 확실히 확보한 2차 대전에 이르러, 미국은 급기야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이어졌던 베트남전은 미국이 패배한 최초의 전쟁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그러나 군수산업이 핵심산업으로 자리잡은 미국, 냉전시대가 끝난 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미국의, 전쟁을 향한 구애는 식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와 중동, 유럽 등 전세계 크고 작은 분쟁에서 큰형님 노릇을 도맡느라 여념이 없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20세기에 일어난 전쟁들만 꿰어도 미국 현대사, 절반은 아는 셈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정당한 전쟁_ 2차대전
<진주만> Good Job: 미국이냐, 일본이냐. 어쨌든 기분 나쁜 특수상황이지만, 정신없이 이어지는 편집과 엄청난 물량공세로 금세 잊을 수 있다. Bad Job: 도쿄 공격을 지시하는 루즈벨트의 일장연설. 재수없다기보다는 일단 좀 어이없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Good Job: 실전을 방불케하는 노르망디 상륙장면. 이후에 뭔 일이 일어나도 믿을 수밖에 없다. Bad Job: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품에 막내아들을 돌려보낼 것. 아무리 많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전쟁터에서 종종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미국식 휴머니즘은 이때도 기승이었다.
<멤피스 벨> Good Job: 전쟁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이들 역시, 여리디 여린 소년이었다. Bad Job: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 바퀴를 내리고야 하는 마지막 착륙장면과 <어메이징 스토리>의 한 에피소드는 아직도 헷갈린다.
점점 회의하게 되는 전쟁_ 베트남전
<플래툰> <7월4일생> <하늘과 땅> Good Job: 올리버 스톤의 베트남전 3부작. 전쟁 중인 현역 군인, 퇴역 군인, 베트남 여자 등 주인공을 바꿔가며 한 우물을 판, 지극한 정성. Bad Job: 그래도 굳이 잘 모르는 베트남인의 생각까지 다룰 것 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지옥의 묵시록> Good Job: 문명에 숨겨진 인간의 악마성을 그린 소설을 베트남전으로 옮겨왔다. 전쟁에 대한, 전무후무한 철학적 성찰. Bad Job: 굳이 배경이 베트남전이어야 할 까닭을 찾자면, 정글에서 일어난 전쟁이라는 점 정도가 아닐까. 전쟁을 방불케 했다는 실제 영화 촬영 과정이 전설로 남아 있다.
<풀 메탈 자켓> Good Job: 군인은 어떻게 전쟁병기로 태어나는지에 관한 소름 끼치는 보고서. 베트남 소녀저격수와 관련한 시퀀스는 절대 놓치지 말 것. Bad Job: 소문난 완벽주의자 큐브릭님의 영화. 흠 잡을 곳, 눈 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
따져볼수록 알쏭달쏭 전쟁들_ 나머지 크고 작은 전쟁들
소말리아 분쟁/ <블랙 호크 다운> Good Job: 미국이 벌이는 현대전의 리얼한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자막이 압권이다. “이 사태에서, 1천명의 소말리아인이 죽었고, 19명의 미군 병사가 사망했다.” Bad Job: 제아무리 리들리 스코트라도 제작자인 브룩하이머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테지. 숭고한 미군식 전우애와 애국주의를 강조한 것은 명백한 사족.
걸프전/ <쓰리 킹즈> Good Job: 후세인이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나선 네 미군의 모험활극. 전쟁의 아이러니를 비롯해서 최초의 미디어전으로 기록된 걸프전의 특징까지, 정치적으로 흠 잡을 구석 없는 걸프전 이야기. Bad Job: 이쪽 편도 저쪽 편도 화끈히 들어줄 수 없는 다소 허탈한 결말. 하지만 그 어려움은 충분히 이해한다.
보스니아 내전/ <에너미 라인스> Good Job: 함부로 영화의 소재로 건드릴 수 없는 보스니아 내전. 정치적 견해를 밝히지 않고, 이 복잡한 전쟁을 최대한 영화적으로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Bad Job: 미 전투기가 정찰비행 중 세르비아 민병대에 피격됐던 실화를 각색했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빈약한 이야기.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했다는 지점은 그냥 잊어주는 게 좋겠다.
미국 현대사, 중요한 건 여기 다 있다_ <포레스트 검프>
이미 열거한 영화만도 차고 넘친다. 어차피 유쾌하지도 않은 남의 나라 역사, 굳이 영화까지 찾아가며 공부하기 귀찮으신 분들을 위한 특별 다이제스트판이 마련되어 있다. 실제 뉴스 화면과 영화 속 주인공 톰 행크스의 감쪽같은 합성 등 눈에 띄지 않는 각종 CG기법으로도 화제를 모았던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아무리 하찮게 여겨지는 삶을 사는 개인이라도 역사 속에 영향을 주고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잊어선 안 된다고 역설한다.
아이큐 75의 저능아 포레스트는 일찌기 자신의 집에 하숙생이었던 무명의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영감을 주었고, 자신의 유일한 장기인 빨리 오래 달리기 덕분에 미식축구왕이 되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다. 역시 빨리 오래 달린 끝에 베트남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어린 시절 단짝 친구였던 제니를 만나기 위해 반전시위에까지 참가한다. 우연히 워터게이트 호텔의 맞은편 호텔에 묵는 바람에 민주당 사무실에 침입한 조직원을 신고하고, 반복학습에 강한 기질 덕에 오랜 냉전을 종식하는 핑퐁외교의 첨병이 되어 중국까지 원정경기를 다녀오기도 한다. 일일이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찬 포레스트의 행적은 결국, 5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친 미국의 굵직한 사회, 문화사를 나열한 것이 된다. 자신이 속한 세상과 자신의 처지를 고민할 줄 모르는 순수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시종일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일관한다. 모든 다이제스트가 그러하듯, 역시나 감상의 앞뒤로 성실한 예습, 복습이 수반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