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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에 대한 수동적인 판타지, <크래쉬>
김현정 2006-04-04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작가 폴 해기스는 무장한 두 청년에게 자동차를 뺏긴 적이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두려움을 털지 못했던 그는 자물쇠를 모두 바꾸었고, 강도들에 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왔을까, 그들은 재미로 자동차를 털었던 걸까 아니면 스스로 범죄자라고 생각했을까.” 폴 해기스는 그 경험에 25년 동안 LA에서 보고 겪었던 일들을 보태어 현실에 기반한 <크래쉬>의 시나리오를 썼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편집상을 수상한 <크래쉬>는 그가 연출한 첫 번째 장편영화가 되었다.

<크래쉬>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LA에서 서른여섯 시간 동안 벌어지는 사건들을 담고 있다. 흑인 형사 그레이엄(돈 치들)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한밤의 LA 도로변에서 총에 맞아 죽은 청년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리고 영화는 서른여섯 시간 전으로 돌아가 청년이 살해당하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준다. 지방검사 릭(브렌단 프레이저)과 그의 아내 진(샌드라 불럭)은 권총을 가진 흑인 청년 두명에게 자동차를 빼앗긴다. 집에 돌아온 진은 신경질적으로 행동하며 자물쇠를 바꾸러온 열쇠공까지 의심한다. 멕시칸 열쇠공인 대니얼은 페르시아계 이민자 파니드의 가게 자물쇠를 수리하다가 문을 고쳐야만 한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파니드는 그의 충고를 무시하고, 가게에 도둑이 들자 대니얼을 원망한다.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는 경찰 라이언(맷 딜런)은 TV 프로듀서 카메론(테렌스 하워드)과 크리스틴(탠디 뉴튼) 부부가 타고 가던 자동차를 검문하면서 사회보장국의 흑인 직원에게 수모를 당했던 화풀이를 한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후배 경찰 핸슨(라이언 필립)은 상사에게 파트너를 바꾸어달라고 요구하지만, 자신도 흑인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LA는 면적이 1200㎢에 달하는 거대한 도시다. 땅은 넓지만 대중교통이 충분하지 않은 LA 사람들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타인에게 말을 걸지 않으며, 그레이엄의 대사처럼 “언제나 금속과 유리 뒤에 숨어 있다”. 폴 해기스는 이처럼 고립된 섬들이 모인 군도와 같은 도시 LA에서도,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서로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자신이 던진 반작용의 파장 안에 놓이곤 한다고 믿는다. 야심에 불타는 검사 릭과 그에게 이용당하는 그레이엄은 자동차 강도사건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세개의 꼭짓점에 놓인 인물 중에서 누구도 그 사슬을 눈치채지 못한다. 라이언과 크리스틴은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재회하고, 핸슨은 엉뚱한 장소에서 분노를 터뜨린 카메론의 목숨을 구하고, 파니드의 딸은 가출한 동생의 시신을 확인하러 병원에 온 그레이엄을 맞는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과 만남에는 인종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겹겹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커다란 폐곡선을 완성하는 <크래쉬>는 그 곡선 안에 놓인 사람들의 행동에서 인종에 기반한 편견을 찾아낸다. 선의나 악의가 아닌 그저 편견을. 젊고 때묻지 않은 경찰 핸슨은 부당하게 검문을 받은 카메론을 동정하여 그를 도우려 애쓰고, 인적없는 도로에서 흑인 청년을 자동차에 태워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청년이 강도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 핸슨의 선의는 두 젊은이 모두에게 재앙이 되고 만다. 트레일러 주택에 사는 라이언은 고급 자동차를 모는 흑인 부부에게 부당한 폭력을 가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교통사고를 당한 흑인 여인을 구하는 헌신적인 경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크래쉬>는 LA에 만연한 인종차별을 공격하는 적극적인 영화라기보다 일종의 운명론에 수긍하는 소극적인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얽혀 있고, 그 그물망 안에서 작은 몸짓 하나가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그리하여 몇푼 아끼려다가 전 재산을 잃은 파니드는 그에게 충고를 해주었던 열쇠공 대니얼을 원망하여 총을 겨누지만, 발사된 총알은 뜻밖에도 구원의 기회가 되고 만다. 이처럼 수동적인 판타지에 기대고 있는 <크래쉬>는 오히려 그 때문에 LA를 벗어난 지역에서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영화가 됐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프로듀서 마크 R. 해리스는 “모든 사람과 문화는 고유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이든 유대인이든 혹은 스웨덴이나 독일의 백인이든, <크래쉬>와 같은 대사를 말하고 긴장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크래쉬>는 LA라는 도시 자체를 캐릭터로 만들기도 했다. 수집에 기초하여 <크래쉬>의 시나리오를 창작한 폴 해기스는 제작기간 35일과 제작비 650만달러라는 열악한 조건에도 LA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에피소드들을 채집하듯 사실적으로 찍었다. 이 영화는 LA 한낮의 햇살과 도로를 메운 한밤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을 조명 삼아 LA 부촌과 빈민가를 두루 헤집는다.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LA는 천사들의 도시라기보다 높은 파티션으로 구획을 나눈 삭막한 사무실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크래쉬>는 언덕을 경계로 하여 흑인과 백인 거주지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 도시의 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기교를 구사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에 잇대어놓고,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인연을 맺어주고, 여러 개의 사건을 실뭉치처럼 뭉쳐두었다가 다음 순간 풀어헤치기도 한다. <크래쉬>가 아카데미 편집상을 수상한 건 많은 이들이 예상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논란을 부를지 모르는 영화에 낮은 개런티로 출연한 배우들의 재능과 용기가 없었다면 <크래쉬>는 무척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출연을 결정한 돈 치들과 어떤 역이든 상관없이 출연하겠다고 선언한 샌드라 불럭, 분노에 찬 하층계급 백인을 연기한 맷 딜런, 끊임없이 세상을 의심하는 자동차 강도 역의 래퍼 루다크리스 등이 이 복잡한 이야기를 하나로 아우르는 현실적인 톤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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