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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미트 페어런츠
김혜리 2016-08-03

<미드나잇 스페셜>

극장 개봉 기회를 얻지 못한 제프 니콜스 감독의 <미드나잇 스페셜>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간신히 조우했다. 전작 <샷건 스토리> <테이크 쉘터> <머드>에 이어 이 SF 판타지에서도 니콜스는 여전히 가족을 통해 말한다.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여덟살 소년과, 정부와 종교단체를 피해 아들과 탈주하는 아빠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아빠, 무서워?” “그래. 무섭구나.” “아빠,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난 너를 걱정하는 일을 좋아해.” “이제부턴 안 그래도 돼.” “난 널 영원히 걱정한다.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거야.”(That’s the deal.) 마리아와 요셉이 그들의 맏아들로 인해 품은 감정이 저렇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영화를 보던 나는 영화가 중반을 넘었을 때 퍼뜩 깨달았다. <미드나잇 스페셜>은, 특별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아이를 세상에 데려오고 다시 떠나보내야 하는 모든 부모에 대한 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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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는 장편을 개봉할 때마다 자사의 새 단편을 본편 앞에 상영한다. 여태 나는 이 짧은 작품들을 그저 기꺼운 덤으로 즐겨왔다. 그런데 <도리를 찾아서>를 보러 간 극장에서 처음으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10분가량의 상업 광고와 캠페인의 홍수에 노출되는 시간을 포함한다. 고대해서 표를 구매한 영화를, 맑은 머리와 가라앉은 호흡으로 감상하고 싶은 관객에게는 꽤나 성가신 노이즈가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코언 형제는 <시리어스 맨>의 도입부에 들어 있는 (뜬금없는) 시대극 프롤로그에 대해, 본편을 감상하기에 적절한 컨디션으로 관객을 준비시키는 일종의 팔레트 클렌저(palette cleanser)이기도 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고보니 픽사의 단편에도 비슷한 효용이 있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끼얹어진 광고의 이미지와 사운드를 씻어내고, 지금부터 입장할 픽사 세계에 주파수를 맞추는 감각의 스트레칭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픽사의 단편이 독자적 작품이 아니란 의미는 물론 아니다).

<도리를 찾아서>는 픽사 필모그래피를 줄 세우면 중간쯤에 자리잡을 영화다. <토이 스토리4>가 어떤 모양새로 나올지 현재로선 알 수 없으나, 속편은 웬만해선 만들지 않는다는 픽사의 전통을 깨고 제작된 <카2> <몬스터 대학교>는 오리지널 스토리를 완결하는 데에 필연적 속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명된 바 있다. <도리를 찾아서> 역시 이 심급을 통과하지는 못한다. 결정적 이유는 <도리를 찾아서>가 들려주는 주요 화두가 전편인 <니모를 찾아서>(2003)가 이미 다루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첫째 <도리를 찾아서>는 기억상실증으로 잃은 혈육을 찾아나선 도리의 모험이다. 한데 돌이켜보면, 평생 바다를 떠돌며 혼자 살아온 도리는 <니모를 찾아서>의 말미에 말린과 니모에게 말했다. “너희를 보면 집에 온 것 같아.”(When I look at you, I’m home.) 말하자면 혈연과 무관한 대안가족을 구성해놓고, 속편에서 구태여 생물학적 부모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가 된 셈이다. <도리를 찾아서>에서 더욱 중요한 테마는, 장애라고 통칭되는 남다른 속성을 가진 사회구성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나머지 다수는 어떤 태도로 그들과 공존할 것인가의 질문이다. 이 주제 역시 니모의 약한 지느러미와 도리의 단기기억상실증을 통해 <니모를 찾아서>에서 간결하게 언급됐다. <니모를 찾아서>의 도리는 자신의 핸디캡을 안고 고유한 생존 메커니즘을 만들어낸 성년 캐릭터였다. 그런데 <도리를 찾아서>는 이야기의 필요에 의해 도리를 다시 아이의 자리에 데려다놓고 “남과 다르다면 남과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 방법이 같을 필요는 없다”는 교훈을 재확인하도록 만든다. 그러다보니 불가피하게 제자리걸음이 발생한다. <니모를 찾아서>에서 약점 있는 자식을 과보호하는 것이 최선이 아님을, 장애란 남다른 장점의 다른 이름임을 힘들여 발견했던 말린도 <도리를 찾아서>가 시작되면 전편의 성장을 깡그리 말소하고 원점으로 돌아가 있다. 말린은 도리를 좋아하면서도 그녀의 능력은 반신반의해 한쪽으로 플랜B를 궁리한다. 해양 생물 연구소와 아쿠아리움을 맴도는 <도리를 찾아서>의 내러티브 궤적도, 이따금 장편 길이를 채우기 위해 선로를 추가한 롤러코스터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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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를 찾아서>의 작가/감독으로서 <도리를 찾아서>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앤드루 스탠턴 감독은, 이야기의 동력을 얼마간 포기하고 각론에 집중한다. <니모를 찾아서>에서 유머와 페이소스를 발생시키는 장치로 쓰였던 단기기억상실증은 <도리를 찾아서>에서는 탐구해야 할 지속적인 컨디션이 된다. 우리는 도리의 모토인 “계속 헤엄쳐”(Just keep swimming.)를 포함해, 그녀가 지닌 습관과 성격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내용상 프리퀄’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속편을 통해 발견한다. 도리의 부모는 특별한 아이를 양육하는 보호자로서 거의 완벽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은 건망증 때문에 속거나 위험에 빠지기 쉬운 도리에게 기본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원점인 집으로 돌아오는 법을 힘주어 학습시킨다. 배우는 속도가 더뎌도 서두르지 않는 한편, 과보호하려는 충동을 억누르고 물러서 있을 때를 안다. 무엇보다 평범한 아이들보다 악의 앞에 취약한 자식인데도 불구하고 타인과 사회를 신뢰하도록 가르친다는 점이 대단히 놀랍다. 도리의 부모는 아마 그저 살아남기를 넘어 도리가 세상은 좋은 곳이고 친구들로 가득 차 있다고 믿으며 삶을 누리기를 바란 게 아닐까? <니모를 찾아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실례합니다. 절 좀 도와주실래요?”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민폐가 될까 움츠러드는 대신 밝은 말투로 끊임없이 도움을 청하는 도리는 이 교육의 결과인 셈이다. 바다를 떠돌다 새로운 물고기를 만나면 (악용당할지도 모르는) 본인의 약점부터 먼저 소개하고, 기억이 깜박할 때 그새 실수한 건 없나 사과부터 하고 보는 습관도 마찬가지다.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서로를 사회적으로 보호하는 안정된 관계 속에 머물기 어려운 도리는 대신, 낯선 이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친화력과 (무의식적인 보완 기제로 발달한) 다국어 능력으로 나름의 서바이벌 메커니즘을 완성한다. 반면 이처럼 천하에 낙천적인 도리가, 남다른 자신을 돌보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경제적, 심리적 부담을 짊어진 부모에 대해 특수 아동들이 본능적으로 품는 미안함과 죄책감의 한 자락을 불쑥 드러내는 대목은, 마음을 찌르고 지나간다.

<도리를 찾아서>는 핸디캡을 가진 바다 생물들의 오케스트라로서 가장 즐겁다. 도리를 비롯해 일곱 다리 문어 행크, 음파 감지력이 저하된 흰고래, 고도 근시 돌고래, 어눌한 물새 등은 팀을 이루고 창의력을 발휘해 문제를 풀어간다. 얼핏 모자라기 때문에 여럿이 힘을 합쳐 한 사람 몫을 해내는 것 같지만, 각 멤버의 합보다 결과물이 크다는 점이 포인트다.

여담. 뜻밖에도 <도리를 찾아서>에는 호러적인 요소가 꽤 있다. 하긴 이번이 예외는 아니다. 뜯어보면 픽사 영화에는 항상 기괴한 모멘트가 있다. 어린이의 비명을 에너지원으로 쓴다거나 쥐가 요리를 한다거나 하는 설정부터 무난하다고 말할 수 없다. <토이 스토리>에서 카우보이 인형 우디가 인간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장난감 학대범인 옆집 소년에게 말을 거는 순간은 모골이 송연하다. 만나지 말아야 할 것이 만날 때 발생하는 저항감이다. 비인간 주인공들이 그들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과 접촉할 때 픽사 영화는 종종 섬뜩해지는데 <도리를 찾아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이 관람객의 손이 괴수처럼 찍힌 ‘만져보기 수족관’ 신은 너무나 공포스럽게 연출된 나머지 보자마자 체험동물원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싶을 지경이다. 도리가 어린 시절 친구인 돌고래 데스티니를 재회하는 경위는 어떤가. 죽은 생선 틈에 섞여 데스티니의 먹이로 던져진 덕분이다. 다정한 친구처럼 보이는 다양한 어족들이, 실은 먹고 먹히는 관계라는 사실도 <도리를 찾아서>는 막판에 굳이 보여준다. 오, 물론 인간 관객으로서 <도리를 찾아서>에서 가장 무서운 광경은 문어가 트럭의 핸들과 기어를 잡는 순간이었지만.

<태풍이 지나가고>

좋 아 요

태풍

인생에도 날씨와 절기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는 글자 그대로 그렇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 사쿠라지마 화산이 있었다면 <태풍이 지나가고>에는 제23호 태풍이 있다. 많은 영화에서 태풍은, 인물들이 화합하도록 만드는 외부의 충격으로 기능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는 잔해를 청소하고 씻어내는 침례에 가깝다.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 리포트에 미처 다 싣지 못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답변을 옮기는 편이 최선일 듯하다. “주인공 료타(아베 히로시)는 끊임없이 바람을 맞으며 살아왔다. 그의 인생 자체가 여러 번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땅이라고 할 수도 있다. 태풍이 정화를 뜻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태풍은 이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을 씻어낸다. 그 결과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의 세상은 조금 달라 보이지 않나? 그것이 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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