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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기자의 '브로커' 반대론
송경원 2022-06-29

의미를 향한 강박과 선의의 함정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담보하진 않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브로커>는 좋은 의미와 시선을 지닌 영화지만 설득의 태도와 과정에 동의하긴 어려웠다. 좋은 장면, 좋은 연출, 좋은 연기가 있지만 그 총합이 반드시 좋은 영화이리란 법은 없다.

송강호의 캐스팅은 실패다. 잔인하지만 그게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상현은, 정확히 송강호의 상현은 <브로커>의 세계 안에 좀처럼 섞이지 않는다. 그는 차라리 송강호 월드에 속해 있다. 송강호가 그간 축적해온 세계는 언뜻 평범하고 소시민적이라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금세 낯설고 서늘한 순간을 들이미는 캐릭터들의 역사다. 송강호는 일상의 표정, 인간적인 감정을 순식간에 좁히고 들어와 장르의 얼굴로 바꾸어놓고 보는 이를 무장해제시킨다. 나는 아직 <기생충>에서 케첩 묻은 휴지를 손에 쥐고 인상을 찌푸리던 기택(송강호)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 익살맞은 표정은 기택 가족이 저지르고 있는 소소한 악행마저 밉지 않게 만든다. 반대로 비현실적인 순간에 송강호의 몸짓이 섞이는 순간 우리 옆자리의 상황처럼 동조되는 일도 흔하다. <기생충>의 후반부, 물에 잠긴 반지하 집을 빠져나올 때 방 안을 스윽 한번 둘러보는 기택의 표정과 몸짓 역시 아직 잊지 못한다. 어떤 설명보다 함축적이고 정확한,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송강호의 몸짓은 영화적인(다큐멘터리와는 다른) 순간과 깊이를 창조해낸다. 놀라운 건 그 전환과 압축이 실로 부지불식간에 이뤄지는지라 예측을 벗어난 리듬 앞에서 묘한 감흥에 휩싸이고 만다는 것이다.

상현이 내내 겉도는(혹은 돋보이는) 이유

<브로커>의 상현은 마지막 거래를 앞둔 밤 모두 함께 있는 자리에서 혼자 스테이크를 먹는다. 이 이상한 장면은 다름 아닌 송강호이기 때문에 납득되는 측면이 있다. 상현이 내내 입에 올리는 ‘선의’도 같은 맥락이다. 아마도 그 선의를 믿게 되는 근거는 상현과 동수가 아닌 송강호와 강동원의 것이다. 한 프레임에 있지만 상현은 혼자 다른 공기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브로커> 속 상현이라기보다는 송강호 월드가 구축해온 캐릭터의 그림자에 가깝다.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송강호의 연기가 실패라는 게 아니다. 약간의 너스레를 더하자면 지나치게 연기를 잘해서, 달리 표현하면 홀로 다른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물론 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스타일과 연결지을 수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정해진 콘티를 재현하는 대신 인물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를 만들어내길 기다리는 쪽이다. 그런 연출자에게 송강호는 건드리고 싶지 않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브로커>에서 유독 인상 깊은 얼룩처럼 각인된 장면 중 하나는 상현과 딸이 만나는 에피소드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상현의 상황을 대략 알 수 있다. 전처는 재혼하여 아이를 가졌고 딸은 아빠가 못내 안타까우면서도 점점 서먹해진다. 딸을 더이상 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 딸에 대한 미안함, 상황의 답답함이 범벅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딸은 슬며시 자신은 아빠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말을 건넨다. 그때 상현이 “진짜?”라고 되묻는 한마디에 ‘송강호스러움’이 묻어 있다. 다급한데 조심스러워서 나오는 타이밍을 접지른 것 같은 박자의 대답은 어쩌면 <브로커> 전체에서 가장 살아 있는 장면이다. 문득 이 장면과 <어느 가족> 속 노부요 시바타(안도 사쿠라)의 면회 장면이 겹쳐 보인다. “키웠다고 다 엄마냐”고 되묻는 안도 사쿠라의 표정에는 형용할 수 없지만 확신할 수 있는 감정이 묻어 있다. 100분이 넘는 영화에 대한 화답을 그 한순간의 얼굴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영화다. 딸과 만난 상현의 얼굴에도 같은 맥락의 정서가 어려 있다. 훌륭하다. 문제는 그것이 <브로커>의 이야기에 필연적인 장면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다. 그 장면은 송강호에게 헌사되고 송강호가 장악한 또 한편의 단편영화나 다름없다. 그 장면의 밀도가 <브로커> 전체의 감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상현은 홀로 먹는 어울리지 않는 스테이크처럼 <브로커>의 세계에서 겉돈다. 가족이 되지 못하는 상현의 선택은 끝내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가 모든 것을 설명해야 마땅한 건 아니지만 상현의 끔찍한 행동에 대한 최소한의 얼룩조차 제시되지 않는다는 건 의아하다. 이전까지 <브로커>는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너무 많은 대사들을 쏟아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상현은 왜 살인을 저질러야 했나. 어쩌면 상현이 대안가족, 공동체에서 탈락되어야 하기 때문에 탈락시킨 걸까. <브로커>에는 납득되지 않는 정황들이 꽤 있다. 윤씨 부부는 왜 하필 브로커를 통해 아기를 얻으려 한 걸까. 형사들은 왜 그렇게 현행범 체포에 혈안이 될까. 왜 우성 친부의 아내가 아기를 데려가 학대할 것이라고 믿는가. 몇몇 설정들은 스테레오타입과 고정관념에 기대고 어떤 장면들은 정황을 끼워 맞추려 세팅된 흔적들이 보인다. 살아 있는 인물들의 선택과 판단이 연결되어 이야기가 된 것이라기보다는 이야기의 의지에 따라 인물들이 다다를 장소가 정해져 있는 느낌. 요컨대 행복을 향한 이들의 여정은 대체로 작위적이다. 배우 송강호는 이 딱딱하고 교조적인 이야기의 그물에 포획되기에는 너무 살아 있다. 그것이 송강호의 상현이 영화 내내 겉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그렇게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

<브로커>는 선의를 향한 믿음으로 지은 성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고레에다의 세계에 행복에 대한 강박이 뿌리내리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브로커>가 <어느 가족>의 자장 안에 속해 있는 건 분명하다. 사실 그건 고레에다의 모든 영화에서 반복되는 경향이니 대안가족, 공동체, 아이 등 몇 가지 요소들이 동어반복된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 애초에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영화의 집대성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신의 영화 궤적을 하나 이탈하지 않고 절묘한 균형감각으로 꿰어낸 뒤 주제와 스타일을 효율적으로 압축해놓은 영화다. <어느 가족>이 고레에다의 총합으로서 정점을 한번 달성한 뒤 다시 가족이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무대만 바꾸어 반복하니 다소 다운그레이드되었다는 인상을 피하기 어렵지만 그건 그다지 문제될 게 없다. 때론 공간이 바뀌면 이야기의 색과 부피가 전혀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스타일의 반복이 아닌 메시지 전달 방식의 퇴행이다. <브로커>에서 고레에다는 확실히 한발 뒷걸음질쳤다. <어느 가족>이 익숙한 가운데 범상치 않은 예리함을 선보였던 건 하나의 정의를 따르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기 때문이다. 고레에다의 출발은 단순하다. 가족은 태어나는 건가 만들어지는 건가. 중요한 건 영화의 몫은 질문으로 균열을 벌리는 것까지이지 판단까지 내릴 필요는 없다는 거다. <어느 가족>은 억지로 가족이 되거나 영원히 가족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저 제도의 허점 바깥에서 이들이 겪어온 시간을 차곡차곡 기록할 따름이다. 생각해보면 고레에다의 태도는 늘 그랬다. <아무도 모른다>(2004)에서는 아이들의 잔혹한 현실을 아이들의 시점에서 따라갈 뿐 그들을 구태여 행복으로 이끌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에서도 아버지가 되어가는 시간을 가만히 따라갈 뿐이다.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가 아버지가 된 건 그저 결과일 뿐 애초에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브로커>에서 고레에다는 ‘그렇게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낸 시간이 쌓여 가족이 되는 거라면 카메라의 몫은 곁에서 그 시간을 가만히 기록하는 것으로 족하다. <브로커>에서 고레에다는 선의를 향한 믿음을 기반으로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 마음은 어여쁘지만 “우리가 브로커 같아”와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대사로 직접 듣는 순간 정답을 정해놓고 몰아붙이는 교조적인 태도로 다가와 마음이 차게 식는다.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말은 캐릭터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여정을 목격한 관객의 마음속에서 피어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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