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비평
[비평] 죄의식 대신 물질의 흐름에 집중한 시청각적 환상곡, '당나귀 EO'
김신 2023-10-18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놀라운 걸작 <당나귀 EO>를 말하기에 앞서, 이 작품이 두번의 오마주를 거친 결과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당나귀 EO>가 각색한 <당나귀 발타자르>는 로베르 브레송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각색했다고 밝힌 영화다. 브레송은 <백치>의 주인공 미쉬킨이 당나귀에 관해 말한 짧은 대목을 읽고, 아예 미쉬킨을 당나귀로 치환한 새로운 서사를 착상했다. 하지만 <당나귀 발타자르>는 <백치>와 무연하다고 봐도 무방한 독자적 작품이다. 갑작스레 상속된 유산, 공원의 벤치 장면 등 원작을 연상하는 요소가 엿보이지만 그 정도 유사성은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장기인 시끌벅적한 난장판과 과장된 만화적 유머 감각 대신 평론가 폴린 케일을 질색하게 했던 지독한 엄숙주의가 있다. 우리는 <백치>를 각색했다는 브레송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서로 다른 시기와 장소에 공개된 두 작품의 차이를 숙고하도록 요하는 비평적 진술로 이해해야 할지 모른다.

<백치>는 그리스도를 모티프로 빚어진 미쉬킨의 선한 성정에 매혹된 주변 인물의 구원을 제재로 삼는 작품이다. 인물들이 성자와 대면하며 구원을 갈망하거나, 혹은 그 구원의 손길에 방어적으로 응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도마조히즘적 히스테리는 시공간을 조립하는 핵심적 논리로 작동하며 서사에 종교적 신성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하던 20세기 중후반의 프랑스를 살던 브레송은 속죄와 구원이 한층 요원해진 세태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자본주의는 “죄를 씻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지우는 제의의 첫 케이스”(발터 베냐민)라 했던가. 농장을 현대적으로 개량하는 문제와 같은 한층 비인간적 사건을 다루는 <당나귀 발타자르>는 종종 산업화된 세계의 금속적 물질성을 드러냈으며, 이는 <백치>의 멜로드라마적 서정이 소진된 세계의 단면을 예시하는 듯했다. 비련의 여인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부재한 현대에서, 오직 노동하는 당나귀만이 타락한 군상을 향해 무력한 응시를 던질 뿐이다.

그런 <당나귀 발타자르>를 각색한 게 <당나귀 EO>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 또한 원작의 명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독자적 지평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원작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며 각색의 적절성을 가늠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다. <당나귀 EO>는 브레송처럼 금욕적 형식을 세공하는 데 무관심하므로 작품이 통상적인 영화의 문법을 얼마나 이탈했는지를 그 자체로 성취의 척도로 삼는 것은 무의미하다. 동물의 시점을 다루는 작품에 빈번한 도덕적 뉘앙스 또한 주안점이 아니므로, 영화가 자본주의에 얼마나 비판적인가 역시 평가 규준으로는 불충분하다. 여기서는 짧게나마 <당나귀 EO>가 원작과 지니는 차별성을 논하고자 한다.

<당나귀 EO>가 <백치>와 <당나귀 발타자르>와 지니는 가장 큰 차이는 서사를 관류하는 버거운 죄의식이 희석됐다는 점이다. 브레송처럼 시청각적 쾌락을 질식시키지 않은 스콜리모프스키는 평론가 매니 파버가 브레송의 인장으로 파악했던 정제된 회화적 구성 대신 드론 촬영과 실험적 그래픽을 유려하게 끌어들이며 비인간의 경험을 구조화한다. 또한 EO는 발타자르와 달리 인간 중심적 서사에 배치된 감정이입의 대상물이 아니라 독자적인 감각의 주체다. 시점숏과 광각렌즈는 종종 인간적 이해관계와 무관한 EO의 동물적 충동을 생동하게 포착한다. 이 때문에 EO가 모피 공장의 노동자를 발로 차는 행동 또한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단죄라기보다 그냥 충동적 몸짓으로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영화 속 인간들을 정당하게 비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 한 마을에서 펼쳐지는 선형적 플롯 안에서 인간에게 도덕적 시선을 던질 자리를 배정받은 발타자르와 달리, EO는 국경을 초월하는 여러 장소를 임의적이고 단속적으로 유람하므로, 관객은 여러 군상에 관해 정보 값이 제한된 표면적 인상만 얻어갈 따름이다(이자벨 위페르가 출현하는 시퀀스가 온전히 해석되지 않는 모호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에게 규범적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동물행동학자 같은 시선으로 인간 또한 대상화하면서 가치 판단의 여지가 상대화된 야생적 경관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당나귀 EO>는 브레송보다는 차라리 이마무라 쇼헤이의 자연주의적 묘사에 근접한다. 야밤의 숲에서 늑대의 울음소리와 레이저 서커스가 시청각적 환상곡을 빚는 장면의 최면적 감흥은 도덕의 영역에서 설명될 수 있는 차원의 감각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당나귀 EO>는 물질을 초월하는 상위의 도덕적 심급을 발라낸 뒤, 세계에 배치된 존재들의 수평적 상호작용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영화다. 브레송이 고삐에 매인 발타자르의 수동성에 비극적 정조를 부여했던 것과 달리, 스콜리모프스키는 종종 무리해서라도 EO의 동선을 확장하며 동시대 산업 환경의 제반 요소에 대한 감각을 개방한다. 그리고 <당나귀 발타자르>의 60년대 이후 한층 복잡해진 현대의 환경을 조감한다는 전략적 측면에서, 이 각색은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세계는 개인의 책임으로 해결하기에는 지나치게 간접화하고 복잡해졌다. 살인, 강간처럼 인격적 책임의 소지가 명확한 사건을 다뤘던 도스토옙스키와 브레송과 달리, 스콜리모프스키는 물류와 플랫폼에 의한 간접적 매개가 심화된 세계 안에서 개인의 죄의식을 심문하는 것이 불충분하다는점을 안다. 2년 전, KBS 다큐멘터리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에서 본 한 몽타주를 기억한다. 제작진은 서울 소재 사립대에 재학 중인 대학생에게 평소의 의류 구매 습관을 질문한다. 인터뷰이인 학생이 평소에 애플을 둘러보며 그냥 무의식적으로 여러 옷을 구매한다고 말하며 무구한 웃음을 터뜨리자, 화면은 전환돼 스리랑카 해안에 몰려온 선진국의 의류 쓰레기 수십 미터가 쌓인 언덕 위에서 소 한 마리가 섬유 조각을 씹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어지러운 몽타주는 오늘날 우리가 세계를 공간적인 총체로 파악하지 못하며, 그렇기에 세계의 문제가 개별적 죄과로 환원될 수도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중요한 것은 전혜원 기자의 말처럼 세계를 “선악이 대결하는 무대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행위자들이 합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면서 벌이는 일련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마지막 질문 하나. 그럼 영화는 그 상호작용을 파헤치기 위한 매개체로 왜 인간이 아닌 비인간을 선택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상술했듯 인간적 관념이 상대화된 영화적 감각을 조성하기 위함일 테다. 두 번째 이유는, 아마 오늘날 인간이라는 동물이 처한 특수한 수동성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디지털 기기를 통해 1인칭적 몰입의 경험을 심화한 미디어 환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개인화된 공간에 건축적으로 고립시키며 세계를 3인칭적으로 경험할 역량을 거세했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보는 온갖 가상 이미지의 외설성은 진부해하지만 막상 현실 공간에서는 동물원에서 탈출한 얼룩말 한 마리만 출현해도 호들갑을 떠는 괴상한 동물이다. 이 수동성을 타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물질적 시공간에 대한 육체적 감각을 조직한다는 20세기 영화사적 유산의 정당한 상속자가 인간이 아니라 한 당나귀로 보인다는 기묘한 진실을 부인하기 힘들 것 같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