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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바깥의 배심원 쟁탈전, <런어웨이>

법정 바깥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배심원 쟁탈전

O. J. 심슨 사건이 종결된 뒤 미국 내에서는 사법제도에 대한 비판이 극심했다. 개인의 범죄를 인종차별로 부각시켜 무죄를 끌어낸 심슨 사건은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비난과 함께 배심원 제도에 대한 논란도 가져왔다. 능숙한 변호사들의 ‘연기’에, 배심원들이 쉽게 속아넘어간다는 것이다. 한때 변호사 생활을 했던 존 그리샴은 미국 사법제도의 허점과 모순을 파고든 <타임 투 킬> <의뢰인> <야망의 함정> <레인메이커> 등의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다. <런어웨이>에서는 미국 사법제도의 핵심인 배심원 제도의 문제점을 다룬다. 미국의 배심원 제도는 민주주의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선거인 명부에 등록한 시민은 배심원 명부에 오르고, 시민의 의무인 배심원에 선정되면 타당한 이유없이 거부할 수 없다. 권리와 의무, 모든 것을 지킬 때 진정한 시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재판관의 판단과 결정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판단에 의거하여 무죄와 유죄를 가른다. 재판관은 검사와 변호사가 공정하게 사건을 다루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시민에게 모든 권한이 있고 그들의 상식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배심원은 대단히 민주적인 제도로 보인다. 하지만 어디에나 양면은 있는 법이다.

한 증권회사에 해고자가 난입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한다. 희생자의 미망인이 총기를 불법적으로 유통시킨 책임을 물어 무기회사를 고소한다. 과거에도 비슷한 소송이 있었지만, 원고가 승리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만약 한건이라도 원고가 승소한다면 미국 전역의 총기희생자들이 소송을 제기할 것이기 때문에, 무기회사로서는 절대 질 수 없는 재판이었다. 무기회사는 재판에서 이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단지 증거 조작이라든가 증인들의 매수와 협박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라도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런어웨이>의 원제는 ‘Runaway Jury’(사라진 배심원)이다. 싸움의 승패는 결국 무죄와 유죄를 판가름하는 배심원에서 결정되고, 배심원을 장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무기회사는 배심원 컨설턴트 랜킨 피츠(진 해크먼)를 고용한다. 랜킨 피츠가 하는 일은, 배심원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배심원 명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조사하여 배심원 선정의 기준으로 쓴다. 동정심이 많은지, 총기에 우호적인지 등등을 조사하고 분석하여, 거부하거나 동의한다. 일단 12명의 배심원이 결정되면 이미 매수한 사람을 배심장으로 앉히고, 그가 분위기를 주도하게 한다. 반대 주장을 펴는 배심원에게는 개인 비리나 약점을 잡아 협박을 하거나 탈락시킨다. 이런 과정을 빠르게 전개하는 <런어웨이>의 스릴은 법정이 아니라, 주로 법정 바깥에서 일어난다.

<런어웨이>의 구도는 묘하다. 통상의 법정극이라면, 대립구도는 거사와 변호사 혹은 변호사간의 싸움이다. 자료를 조사하고, 증인을 설득하여 법정에 세우고, 결국은 ‘말’로 승부를 낸다. 그런데 랜킨 피츠는 변호사가 아니고, 법정에 서지도 않는다. 그는 법정 바깥에서 모든 것을 지휘한다. 게다가 그의 적은 변호사가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배심원들을 매수하여 판결을 조작하려는 인물이다. 니콜라스 이스터(존 쿠색)는 배심원으로 선정된 뒤, 연인인 말리(레이첼 와이즈)를 통하여 랜킨에게 연락을 한다. 재판에서 이기고 싶다면 1천만달러를 달라고.

랜킨은 니콜라스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하여 온갖 음모와 폭력을 행사하고, 니콜라스는 치밀하게 배심원들을 장악해간다. 이 싸움이 <런어웨이>의 핵심이다. 인권 변호사인 웬델 로(더스틴 호프먼)는, 랜킨과 니콜라스의 치열한 싸움에서 약간 비껴나 있다. 인물간의 역관계는 카메라의 움직임에서도 잘 드러난다. 피고와 원고, 변호사가 일렬로 나란히 앉아 있는 법정 내의 치열한 다툼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레일을 깔고 카메라가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며 인물들을 잡아내는 방식이 법정극의 주된 연출방식이다. 하지만 <런어웨이>는 변호사보다 배심원석에 앉아 있는 니콜라스와 방청석에 앉아 있는 랜킨의 모습이 더욱 중요하다. 게리 플레더 감독은 포터블 카메라와 스테디 캠을 사용하여 좁은 실내를 자유롭게 움직이며 그들의 격렬한 머리싸움을 잡아낸다.

사건 담당 변호사인 웬델 로는 재판의 중심이 아니다. 재판은 오히려 재판장 밖에서 좌지우지된다. 랜킨 피츠는 배심원들을 매수하거나 협박한다. 배심원들을 설득하려는 또 다른 인물인 니콜라스는 이 과정에서 랜킨 피츠를 협박할 증거를 확보한다.

<덴버> <키스 더 걸> <돈 세이 워드> <임포스터>를 만들었던 게리 플레더 감독은, 스릴러영화를 많이 만들었던 전력을 발휘하여 <런어웨이>를 능숙하게 조율한다. 하지만 <런어웨이>는 무엇보다 존 그리샴의 영화다. 모든 아이디어는 존 그리샴의 원작에서 출발한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기본은 완성된다. 혹평을 받았던 <레인메이커>나 <챔버>에서도 그랬듯이. <런어웨이>에서 배심원들을 장악하기 위하여, 법정 바깥에서 벌어지는 음모는 관객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언제나 모범적이었던 존 그리샴의 전력답게, <런어웨이>는 해피엔딩과 정의의 실현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현실이 그렇게 희망적이지는 않지만, <런어웨이>를 보는 기분은 상쾌하다. 스릴도 충분하고, 뒤끝도 좋다. 그게 존 그리샴 소설, 영화의 맛이다.

:: 배우들

진 해크먼

존 쿠색

물들이거나 폭발시키거나

<런어웨이>의 핵심은 니콜라스 역의 존 쿠색과 랜킨 역의 진 해크먼이다. 애초에 니콜라스는 랜킨의 거부대상이었다. 그러나 비밀 카메라로 배심원 후보들의 동작을 세심하게 관찰하던 랜킨은 게임대회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배심원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니콜라스에게 속아넘어간다. 이후 두 사람의 머리 싸움은 <런어웨이>를 끌어가는 원동력이다. 배심원들을 장악해야 하는 니콜라스에게는 모든 것이 필요하다.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력, 감정적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친화력과 포용력, 그리고 전략적인 사고까지. 니콜라스가 배심원들을 끌어들이는 과정은, 존 쿠색의 탁월한 연기로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리프터스>에서 인간 말종의 연기를 보일 때부터, 존 쿠색의 연기는 설득력이 있었다. 카리스마로 주변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스며들 듯이 조금씩 모든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존 쿠색의 연기는 조금도 바래지 않았고, 여전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진 해크먼의 연기도 이 못지않다. 랜킨은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가 배심원들을 장악하는 것은, 일종의 게임이다.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임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랜킨은 모든 것을 즐긴다. 니콜라스의 도전까지도. 하지만 니콜라스가 자신보다 늘 한 걸음씩 앞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랜킨은 폭발한다. 그 폭발은, 진 해크먼의 전유물이다. <프렌치 커넥션> <컨버세이션> 등 진 해크먼의 대표작에서 늘 보았듯이. 방청석에 앉은 거대한 몸집만으로도 진 해크먼은 화면을 장악한다. 반면 작은 몸집의 더스틴 호프먼은 ‘나약한’, 그러나 결코 물러서지 않는 인권 변호사를 담담하게 연기한다. 체구나, 감정이나 워낙 강렬한 진 해크먼에게 우선 시선이 가지만, 더스틴 호프먼은 자신의 영역을 굳건하게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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