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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경의선>

영화제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발견의 순간에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수백편의 영화가 선보이는 곳에선 더욱 그렇다. 특별한 기대를 품지 않고 봤는데 가슴 떨리는 감흥을 주는 작품이라면 여행길의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진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본 영화 가운데는 <경의선>이 그런 영화였다. 이윤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손님>, 김동현 감독의 <상어>, 김태식 감독의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신동일 감독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 등 널리 호평받은 한국영화들이 많아 영화제 관계자들이 특정한 영화 한편에 집중하는 일은 드물었던 영화제였지만 개인적으로 <경의선>은 아주 특별한 감흥을 줬다.

<경의선>

<경의선>을 만든 박흥식 감독은 평론가와 관객으로부터 외면당한 <역전의 명수>로 데뷔했다(<인어공주>의 박흥식 감독과 다른 동명이인). 찬반양론이 갈리는 영화였다면 덜했을 텐데 <역전의 명수>에 대한 대체적인 반응은 한마디로 주목할 필요가 없는 영화라는 것이었다. 첫 영화의 실패는 그에게 큰 상처를 줬던 것 같다. 그가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 인사한 적 있기 때문이겠지만 <역전의 명수> 개봉 당시 박흥식 감독으로부터 메일 한통을 받았다. 자신의 영화를 무시하는 언론에 대해 울분을 참기 힘들다는 솔직한 심정이 구구절절 묻어나는 글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한번 봐달라고 호소했고 영화제 때문에 지방에 있던 나는 서울에 올라가면 그러겠노라 답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늦었지만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는 게 도리일 것이다.

<경의선>은 눈 내리는 겨울밤 경의선 종착역인 임진강역에서 만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막차에서 잠이 든 그들은 역무원도, 택시도 없는 막다른 곳에 내려 함께 걷게 된다. 서로를 경계하다 의심을 풀고 속내를 털어놓게 되는 남녀. 너무 낭만적이거나 영화적인 설정이지만 <경의선>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는 로맨스영화가 아니다. 이곳에 이른 남자와 여자의 사연을 하나씩 들춰내면서 영화는 세상의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마음에 한발씩 다가선다. <경의선>은 좌절과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잠시 서로의 어깨에 기대는 눈부신 한순간에 바쳐진 영화다. 아름다운 화면과 효과적인 음악이 돋보이는 이 영화에서 특히 마음을 사로잡는 대목은 지하철 기관사인 남자주인공의 모습이다. 영화는 자주 기관사의 시점에서 지하의 풍경을 바라보며 주인공의 내면에 다가선다. 취객들이 어디서 뛰어들지 모르는 승강장과 궤도밖에 볼 수 없는 지하 터널은 다른 설명을 더하지 않고도 주인공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전한다. <경의선>은 그 모습을 건조하게 묘사하며 조용한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상처를 감싸는 위로는 그렇게 천천히 마음에 스며든다.

영화를 보고 나서 박흥식 감독이 예전에 보낸 메일을 떠올렸다. <경의선>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처럼 그때 그는 많이 낙심하고 있었지만 이번 영화를 보고 나니 그가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스스로 알아낸 것 같다. 박흥식 감독의 두 번째 영화가 그런 의미에서도 무척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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