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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말하고 싶었던 바로 그 말, <좋아해>

너에게 말하고 싶었던 바로 그 말, “좋아해”.

요즘같이 사랑의 감정이나 고백이 넘쳐나는 시대에 “좋아해”라는 한마디는 발화되는 순간 쉽게 휘발되는 말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누군가에게는 가장 하기 힘든 한마디일 것이다. <좋아해>는 그 말을 하는 데 17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남녀 이야기이다. 영화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7살의 유와 요스케가 나누는 소소한 일상과 미묘한 감정의 떨림을 담은 앞부분과 34살의 유와 요스케의 재회와 고백을 보여주는 뒷부분 사이에 가로놓인 17년은 영화에 담겨져 있지 않다. 두 사람은 서로가 기억하고 있는 열일곱살 상대방의 모습을 하나씩 호출하면서 17년이라는 세월의 강을 훌쩍 넘는다. 말이 많지 않은 영화답게 지나온 세월에 대한 구구한 설명은 생략한다.

17살의 유(미야자키 아오이)와 요스케(에이타)가 나누는 감정의 교류는 말보다는 그들의 몸짓과 표정, 흘러가는 구름과 하늘을 담은 화면 등에 표현되어 있기에 줄거리로 요약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영화가 시작되고 유가 강둑에 앉아 있는 요스케를 발견한 다음 이어지는 장면은 풀숲에서 나비가 살짝 날아오르는 모습이다. 하늘을 보여주는 숏도 많은데, 심리적 상황에 따라 하늘에는 맑은 구름이 떠 있기도 하고 어두운 먹구름이 끼어 있기도 하다. 유는 수업시간에 같은 반 요스케의 얼굴을 몰래 공책에 그렸다 지우거나, 강둑에서 기타를 치는 그의 모습을 저만치 떨어져 앉아 지켜본다. 그러다 둘은 한마디씩 말을 주고받게 되고 친구가 된다. 유의 내레이션을 통해 설명되는 요스케는, 야구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기타를 치기 시작한 아이다. 요스케는 그 뒤부터 앞으로는 음악으로 먹고살아야겠다고 결심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강둑에 나와서 매일 같은 소절의 기타 연주를 할 뿐이다. 결국 그 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요스케는 유와 헤어진다. 유에게는 6개월 전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언니가 있는데, 유와 요스케는 종종 언니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요스케의 음악에 흥미를 보이는 언니를 위해 유는 요스케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그러나 약속장소로 가던 언니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그 일로 둘은 멀어지게 된다. 언니의 병실에 다녀오면서 둘이 나눈 마지막 대화는 “스스로를 비난하지 말라”는 요스케의 당부와 “곡을 마저 써서 언젠가 완성된 걸 들려달라”는 유의 부탁이다.

거기까지가 17살 유와 요스케였고, 34살이 된 요스케(니시지마 히데토시)의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는 시간을 건너뛴다. 현재 음반회사 영업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요스케는 “음악이라는 넓은 판 위의 한구석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요스케는 아마추어 기타 연주자 오디션장에서 유(나가사쿠 히로미)와 아주 우연히 재회한다. 17년이 흐르는 동안, 요스케는 더이상 기타를 치지 않게 되었고 유는 새롭게 기타를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위스키를 마시면서 옛 기억을 하나씩 불러낸다. 요스케는 강둑에서 비를 피해 함께 뛰었던 걸 기억해내고, 유는 한밤중에 자판기에서 도색잡지를 사던 요스케를 목격했던 사실을 들려준다. 그렇게 세월의 간극을 메워가던 중 언니에 대한 기억에 이르자 둘은 더이상 폭을 좁히지 못한다. 결국, 유의 연락처를 받지 못하고 헤어진 요스케는 다시 도망치지 않기 위해 유의 소재를 찾아낸다. 17년 전 강둑에서, 유의 갑작스러운 키스를 받고 아무 말도 못하고 도망쳤던 순간을 요스케는 후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불의의 사고는 두번 일어난다. 한번은 유의 언니에게 찾아오고, 두 번째는 요스케에게 닥친다. 첫 번째 사고는 이별을 불러왔지만, 두 번째 것은 미뤄왔던 고백을 마침내 터뜨리게 한다.

<좋아해>는 지난 7월에 열렸던 일본인디필름페스티벌 개막작이고, 2005년 뉴몬트리올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주연을 맡은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미야자키 아오이는 현재 일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배우들이다. 니시지마는 <돌스>(2002), <메종 드 히미코>(2005) 등에 출연했고, 4살부터 아역배우 생활을 시작한 미야자키는 <유레카>(2001), <나나>(2005)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역을 맡았다. 미야자키는 <좋아해>를 찍을 당시 실제로 17살이었는데, 감독은 그녀가 미래를 모르는 17살 소녀 역에 충실할 수 있도록 영화의 뒷부분 스토리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시카와 히로시 감독은 90년대에 CF감독으로 명성을 얻은 뒤, 2002년 <도쿄 소라>라는 도시 여성들을 다룬 영화로 데뷔했다. <좋아해>는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각본, 촬영, 편집, 공동제작까지 맡은 명실상부한 아시카와 감독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CF감독 출신답게 세련된 이미지 구사력이 돋보이지만 현란한 이미지 나열로 뒤범벅된 화면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지극히 조용하고 절제되어 있다. 대사를 자제할 뿐 아니라 음향, 음악도 매우 절제해 사용하고 있고,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숏의 전환도 아끼고 아낀다. 그래서 영화는 느리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는데 “좋아해”라는 말 한마디 하는 데 17년이 걸리는 이야기와 이런 호흡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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