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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메가박스일본영화제 [2]
정재혁 2006-11-15

고독과 판타지의 기묘한 변주

1회 일본영화제 개막작, 히로키 류이치 감독이 연출한 <바이브레이터>의 정서가 마음에 들었던 관객이라면 귀가 솔깃할 작품들. <매목> <부드러운 생활> <얼굴> <리얼리즘 여관> 등의 작품들은 고독, 방황, 자아, 삶 등의 주제를 단조롭지만 깊은 울림으로 전한다. 일상 속의 결핍과 상처를 바라보고 조용히 응시하며, 노래하고 치유할 줄 아는 영화들.

매목 埋もれ木 오구리 고헤이 | 히다리 도키, 아사노 다다노부, 오쿠보 다카, 카렌 | 2005년 | 93분

이야기의 우연과 묘한 조화. 재일동포 2세인 오구리 고헤이 감독이 1996년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 <잠자는 남자> 이후 연출한 9년 만의 신작. 여고생 3명은 릴레이 형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놀이를 하고 있다. 한 소녀의 이야기가 잠시 걸음을 멈춘 사이, 화면은 흑백으로 전환되고 한 마을의 ‘다른 이야기’가 얹혀진다. 이야기 안에서 연결된 마을, 그 안에서 진행되는 새로운 이야기. 영화는 마을이 간직한 과거의 이야기를 펼쳐내며 영화를 현재와 미래, 과거와 환상의 사이로 밀고 나간다. 매목은 땅속에 묻혀 수천년을 지낸 화석화된 나무를 말하는데, 이는 영화에서 일종의 기점으로 작용한다. 소녀들의 이야기가 어느 순간 화석화된 공간에 도착해 이야기의 묘한 조우를 만들어내는 것. 오구리 고헤이 감독은 마을에 나타난 낙타, 톰파문자, 브라질 설화 등을 통해 시간으로 연결된 인간의 삶에 마법을 건다. 2005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상영작.

얼굴 顔 사카모토 준지 | 후지야마 나오미, 도요카와 에쓰시, 구니무라 하야토 | 2000년 | 115분

<팔꿈치로 치기> <의리없는 전쟁> 등 주로 선이 굵은 남성영화를 만들어온 사카모토 준지 감독이 처음으로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만든 작품. 하루 종일 세탁소에 틀어박혀 재봉일만 하는 마사코에겐 얼굴부터 성격, 생활방식과 직업까지 너무 다른 여동생이 하나 있다. 도쿄에서 술집에 다니는 그녀는 세탁물이 쌓일 때만 집을 찾아온다. 마사코는 하나부터 열까지 그런 동생이 못마땅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엄마가 죽고 자매의 갈등은 폭발한다. 승강이 끝에 마사코는 여동생을 죽이고 집을 나간다. 영화는 이후 마사코의 도망길을 따라간다. 그녀의 인생은 갈수록 우여곡절이지만, 세탁소를 벗어난 얼굴엔 미소가 비친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마사코의 인생을 통해 인간의 삶은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얼굴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임과 동시에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마사코가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새로운 모험에 도전할 때, 그녀의 얼굴은 ‘다시 태어난다’. 2000년 일본의 영화전문지 <키네마준보>가 선정한 올해의 영화.

리얼리즘 여관 リアリズムの宿 야마시타 노부히로 | 나가쓰카 게이지, 야마모토 히로시, 오노 마치코 | 2003년 |83분

<린다 린다 린다>를 연출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2003년 작품.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상영된 바 있다.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 <리얼리즘 여관>과 <아이즈의 낚시숙소>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후나기를 기다리는 두 남자의 여행을 따라간다. 초짜 영화감독 기노시타와 각본을 쓰는 츠보이는 후나기와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한다. 하지만 늦잠을 잔 후나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행은 아무런 목적없이 이어지고, 여행 중 발생한 에피소드들이 이들의 여행을 움직인다. 극적인 사건없이 진행되는 영화는 원경과 롱테이크로 일상의 소소함을 전한다. 야마시타 감독은 적절한 유머와 대사의 리듬으로 영화를 단조롭지만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간다. 영화, 연애와 섹스, 청춘에 대한 엉터리 같아 보이지만 진지한 대화는 두 남자의 발길을 무의미하지 않은 무엇으로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전화상으로만 등장하는 후나기는 보일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이들의 종착점. 돗토리 지방의 풍경을 타고 흐르는 구루리의 영화음악이 귀에 남는다.

부드러운 생활 やわらかい生活 히로키 류이치 | 데라지마 시노부, 도요카와 에쓰시, 쓰마부키 사토시 | 2006년 | 126분

<바이브레이터>의 히로키 류이치 감독이 이토야마 아키코의 소설 <잇츠 온리 토크>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 <바이브레이터>의 레이, 데라지마 시노부가 다시 여주인공으로 출연한다. 가마타에서 혼자 살고 있는 35살 여성 다치바나 유코는 부모와 친한 친구의 죽음 이후, 조울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직업이 없는 그녀에게 유일한 일과는 네명의 남자와 관계를 유지하는 일. 대학 동창이자 도의회 의원에 입후보한 발기부전의 혼마, 우울증에 시달리는 야쿠자, 인터넷으로 만난 자칭 변태, 마흔살에 집을 나온 사촌 요이치가 그들이다. 유코는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네 가지의 다른 자신을 갖고 살아가는데, 이는 역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유코의 생활이 형성되는 방식으로 재현된다. 히로키 감독은 한 여성의 결코 부드럽지 않은 관계를 통해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축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다. 무엇보다 데라지마 시노부의 섬세하면서 강렬한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 야쿠자로 변신한 쓰마부키 사토시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꿈과 사랑의 루트값

<워터보이즈> <스윙걸즈> 등 유독 청춘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이 제작되는 일본에서 청춘은 꿈과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스포츠를 통해 꿈을 이루거나, 친구와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은 조금은 진부하지만, 그 순간의 쾌감만큼은 거부하기 힘들다. <터치> <루트 225> <로보콘> <오프 밸런스> 등 아프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열정과 모험의 순간들.

터치 タッチ 이누도 잇신 | 나가사와 마사미, 사이토 쇼타, 사이토 게이타 | 2005년 | 116분

아다치 미쓰루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쌍둥이 형제 타츠야, 카즈야와 이웃집 소녀 미나미는 어릴 적부터 친남매처럼 지내온 사이다. 만능 스포츠맨 동생 카즈야는 야구선수. 자신이 다니는 메이세이학교가 야구 고시엔(전국대회)에 진출하기를 바라는 미나미는 카즈야가 그 꿈을 이뤄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카즈야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형 타츠야가 꿈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공부도, 운동도 동생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타츠야는 자신의 꿈과 동생에 대한 죄책감 앞에서 방황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메종 드 히미코> 등으로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이누도 잇신 감독은 세 고교생의 우정과 꿈의 이야기를 안정적인 드라마로 풀어간다. 하지만 전작들과는 조금 다른 질감의 이야기가 이누도 감독 특유의 색채를 담아내진 못한다. 미나미를 향한 두 형제의 감정싸움은 다소 밋밋하게 진행되고, 조제나 히미코에게서 볼 수 있었던 섬세한 캐릭터 묘사도 <터치>에선 찾아볼 수 없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작품. 실제로 쌍둥이인 쇼타와 게이타가 우에스키 형제를 연기했다.

로보콘 ロボコン 후루야마 도모유키 | 나가사와 마사미, 오구리 &#49804;, 쓰카모토 다카시 | 2003년 | 118분

한국의 실업계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등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보충수업을 받기 싫은 사토미는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로봇부에 가입하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러면 보충수업을 면제해주겠다는 것. 로봇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토미는 어쩔 수 없이 클럽에 가입하고, 우연한 기회에 대회까지 나가게 된다. 이후 영화는 이들이 우승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차분히 보여준다. 보잘것없었던 로봇부가 대회에서 우승을 하기까지, 멤버간의 갈등과 화해, 진로에 대한 고민이 예상대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는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로봇게임대회다. 후루야마 감독은 컷을 나누지 않고, 대회를 TV로 생중계하듯 보여준다. 다양한 모양의 로봇이 등장하고, 박스를 누가 더 높이, 많이 쌓느냐를 겨루는 시합이 이어진다. 이야기는 다소 허술하고, 장면은 진부하지만 경기 순간만은 스릴있고, 생동감있다.

루트 225 ル-ト 225 나카무라 요시히로 | 다베 미카코, 이와타 지카라, 이시다 에리 | 2006년 | 101분

수학기호 루트에서 시작된 성장영화. 14살 소녀 에리코는 동생 다이고를 마중하러 놀이터에 간다.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고 있는 다이고는 셔츠 등에 ‘다이옥싱 8배’라는 글자를 남긴 채 돌아오고, 에리코는 동생과 함께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왠지 돌아오는 길이 예전과 같지 않다. 갑자기 바다가 나타나고, 몇년 전에 죽었던 다이고의 동창생이 보인다. 다행히 집에는 돌아왔지만, 이번엔 집에 있어야 할 엄마가 없다. 어느 순간 집으로 향하는 루트가 예전과 달라진 것. 예전의 마을이 A라고 한다면, 지금의 두 남매가 도착한 마을은 A’. 이들은 A로 돌아가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영화의 제목에도 있는 숫자 225는 15의 제곱수다. 즉 이를 루트 안에 넣으면 15가 된다. 얼핏 아리송해 보이지만 이 숫자는 곧 15살이 되는 에리코의 나이이기도 하다. 영화는 14살에서 15살이 되는 에리코의 마음을 엇갈린 마을의 거리(루트)로 치환하여 보여준다. 즉 14의 제곱수 196에서 15의 제곱수 225에 이르는 길이 A’에서 A에 이르는 길이며, 루트로 떨어지지 않는 200, 210 등의 숫자들은 혼란스러운 에리코의 사춘기에 다름 아니다. 후지노 지야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오프 밸런스 非 バランス 도가시 신 | 하타치야 메구미, 고히나타 후미요, 하타노 유우 | 2001년 | 95분

초등학교 시절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지메 당한 경험이 있는 치아키는 중학교 입학 뒤, ‘친구 사기지 말고’, ‘쿨하게 살자’고 결심한다. 더이상 마음에 상처를 받고 싶지는 않다는 것. 하지만 그녀가 이 생활에 100%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니다. 치아키는 소원을 말하면 들어준다는 ‘녹색아줌마’와의 만남을 꿈꾸고, 자신을 배신했던 초등학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끊는다. 속에 감춘 마음을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즐거운 일 따윈 없는’ 일상. 그러던 어느 날 치아키에게 녹색 반지를 낀 중년의 게이 키쿠가 나타난다. 두번의 우연을 통해 이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치아키는 세상에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녀와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게이의 우정을 그린 이 영화는 10대 소녀들의 고민과 방황에서 시작한다.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수업시간의 교실에선 갑작스레 한 학생이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어제까진 친한 친구였던 소녀가 한순간에 이지메를 당한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꿈도 예쁘지만 삭막한 여고생의 일상에선 자리를 잡기가 힘들다. 숨막히고 절박한 학창 시절의 풍경을 경쾌한 리듬으로 탈주해버리는 결말이 인상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