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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토크] “거의 실존주의적인 첩보영화라니까요”

스포일러 있음

김혜리 “<본 얼티메이텀>은 육체성과 정신성을 함께 가진 비범한 액션영화예요.” 이동진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오락적으로 탁월한데다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중영화죠.”

아니라니까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줄거온 인생님(이동진 lifeisntcool@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아니라니까님의 말(이하 아니): 길었던 여름이 드디어 가네요.

줄거온 인생님의 말(이하 인생): 올해는 정말 여름과 겨울이 24시간 사이로 갈렸다니까요. +_+

아니: 에어컨 끄자 보일러 트는 식으로 계절이 오가네요. 이래서야 비닐하우스의 채소가 된 기분이에요. ^^ 영화도 마찬가지네요. 마지막 여름영화 <본 얼티메이텀>이 개봉하는 이번주에 추석 한국영화를 대거 소개하게 되네요. <권순분여사 납치사건> <즐거운 인생> <두 얼굴의 여친> 그리고 <마이파더>까지요.

인생: 미국 여름영화의 마지막 대작은 한국에선 흔히 추석에 개봉되곤 했습죠.

아니: 하긴 미국의 노동절이 이른 추석과 멀지 않으니까요.

인생: <본 얼티메이텀>은 예측한 대로 대단히 재미있더군요. ^0^ <본 슈프리머시>의 완성도가 있고 감독이 같으니 그 재미가 어디 가겠습니까.

아니: 이 시리즈 전체의 재미를 예찬하는 건 오늘처럼 다룰 영화가 많은 날은 참아야 할 것 같아요.

인생: 007 시리즈의 해독제 정도로 정리해두죠, 뭐. 전 이 영화가 007의 보완재가 아니라 대체재라고 생각해요.

아니: 제임스 본드 같은 스파이가 턱시도 입고 주변의 시선을 홀리고 있으면 그 뒤쪽에서 본 같은 패션과 무관한 첩보원이 진짜 일을 처리할 것 같죠? ^.~

인생: 뭐, 어디나 일하는 사람과 폼 잡는 사람은 다 그런 식이라는. -.-

아니: <본 얼티메이텀>의 도입부는 마치 2편의 결말부를 만들 때 이미 찍어놓았던 게 아닌가 싶더군요. ^^ 모스크바에 본을 내버려두고 떠났던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요.

인생: 내용적으로 2편의 상황과 느슨하게 겹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죠. 2편의 마지막 장면이 3편의 후반부 진입 시점에서 리플레이되잖아요.

아니: 사실 본(맷 데이먼)의 과거를 캐는 줄거리에서는 실질적으로 2편보다 더 알게 되는 내용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인생: 저는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려면 1편 <본 아이덴티티>와 2편 <본 슈프리머시>를, 특히 2편을 미리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극중 제이슨 본과 CIA 간부 파멜라 혹은 동료 니키와의 관계가 잘 이해되지 않을 거고 그러면 가뜩이나 복잡하고 정신없는 영화를 분위기 파악하느라 한동안 흘려보낼 수 있잖아요.

아니: 전 <본 얼티메이텀>을 보는 도중에 1, 2, 3편을 한자리에서 연달아 스크린으로 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솟더군요. *.* 엄청난 향연이겠죠?

인생: 그런 기획행사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3편까지 다 보고나니 1편과 2, 3편의 연출력은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그 라이먼과 폴 그린그래스의 차이죠. 감동적인 부분은 2편이 최고고, 3편은 기술적 측면과 구조적 측면이 뛰어나요. 오락성은 3편이 한수 위인 듯.

아니: 폴 그린그래스의 2, 3편은 아울러 액션을 특별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린그래스식 액션의 특징은 과정을 중시한다는 점이죠. 공짜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보통 생략하는 컷들을 집어넣어서 액션의 논리를 보여주죠.

인생: 한방에 터뜨리기보다는 조금씩 쌓아가는 액션이죠.

아니: 마이클 베이 영화와 대조적으로, 이 경우는 빠른 편집이 관객을 현혹시키는 게 아니라 인식에 도움을 줍니다. 베이의 액션이 판타지를 부른다면 그린그래스의 그것은 판타지 안에 정직함을 불러들여요. 물론 여기엔 맷 데이먼의 사실적 연기가 큰 역할을 합니다.

인생: 두 사람의 영화는 모두 편집이 엄청나게 빠르지만 액션 전달력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죠.

아니: <본 얼티메이텀>의 액션은 마치 현란하게 공간을 부순 다음 다시 주워담아서 관객이 전체를 이해하고 나서야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듯해요.

인생: 특히 탕헤르 시퀀스는 아찔할 정도의 액션-서스펜스 명장면이더라고요.

하니: 전 군중 속에서 제이슨이 움직이면서 <가디언> 기자에게 인간 내비게이션 노릇을 하는 워털루역 시퀀스가 최고로 좋았습니다! 군중이 포함된 장면을 잘 다루는 것은 그린그래스의 특기인 모양입니다. 보행자를 갖고 자동차 추격전 효과를 내더군요. 마치 눈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어요. *.*

인생: 워털루역 장면도 아주 좋았어요. 그런데 그와 조금 비슷한 장면을 <본 슈프리머시>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선보인 바 있으니까요. 탕헤르 시퀀스는 리듬과 동선 처리가 탁월한데다가, 그 시퀀스의 마지막인 좁은 실내공간에서의 격투장면이 정말 대단한 긴박감을 줬어요. 촬영, 편집이야 원래 예술이었지만 그 시퀀스의 음악과 사운드 에디팅도 진짜 훌륭했습니다.

아니: 하드커버 책 모서리를 사용한 공격이 대단했죠? 이런 대목에서 비범한 점은 상대를 살해하는 격렬한 순간에도 주인공 본의 회의와 당하는 상대의 고통을 관객이 느끼도록 한다는 점이에요.

인생:2편에선 말아쥔 잡지를 썼죠. ^^ 제이슨 본의 액션은 최소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대단한 사실감이 있어요. 동작이 크고 화려한 공격 대신에 짧고 확실한 가격을 하니까요.

아니: 그림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폴 그린그래스의 영화를 보며 입체파 회화를 떠올릴 거예요. 잘게 쪼갠 편집으로 사물을 여러 앵글에서 거의 동시에 보여주는데 전체성을 잃지 않으니까요. 데이비드 호크니의 연속촬영사진 콜라주도 생각날 거고요. ^^

인생: 사실 많은 사람들이 폴 그린그래스 영화에서 촬영의 뛰어남을 이야기하지만, 저는 촬영보다 편집이 더 뛰어난 영화들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왕가위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선택의 영화’를 만든다고 할까.

아니: <본 얼티메이텀>도 꽤나 돌아다니죠. 토리노, 탕헤르, 마드리드 등등. 마일리지 꽤나 쌓였겠습니다.

인생: 그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위장해서 다녔을 테니, 제이슨 본은 마일리지가 그렇게 많지 않을 듯. -_-

아니: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항공사로선 다행이죠. 제이슨 본은 기차니 페리호니 대중교통을 자주 쓰고 걷기도 많이 걸어서 더욱 “쉬게 해주고 싶다”는 연민이 치미는 것 같아요.

인생: 거의 실존주의적인 첩보영화라니까요,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그렇고.

아니: 본 시리즈는 육체성과 함께 정신성을 가진 액션영화로 기억하게 될 것 같아요.

인생: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오락적으로 탁월한데다가 정치적으로 올바르기까지 한 보기 드문 대중영화입니다.

아니: 제이슨 본의 여정이 갖는 특징은 그가 누구인지 발견하고 속죄한다고 해도 돌이킬 수 있거나 삶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이고 그 사실을 본도 알고 있다는 점이죠. 3편에 들어서는 <엑스맨>의 울버린과 너무 비슷한 과거가 아닌가 싶었습니다만..

인생: 적은 나를 아는데, 나는 적도 나 자신도 모른다는 모티브가 대단히 흥미롭죠.

아니: 저는 2편이 3편보다 좀더 마음에 듭니다. 악당의 전형성- 결정적일 때 말 많은 것 포함해서- 결말의 “CIA는 바른길로 가고 있습니다”식의 뉘앙스가 재미없었어요.

인생: 악당은 2편에서 가장 멋지게 죽죠. 죄책감 따윈 없다고 선언하고 자살을 하니까요. 보는 이의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들은 확실히 2편이 더 훌륭하죠! 하지만 2편은 좀 과잉이다 싶은 부분도 있었는데, 이번엔 현란하면서도 과잉의 혐의가 없더라고요. 저는 3편이 더 좋습니다.

아니: 보통 프랜차이즈가 3편쯤 되면 “고마 해라”는 평이 나오잖아요? 기껏해야 “좋은 마침표다” 정도인데 이번에는 다들 4편 나와도 불만없다가 대세더군요.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린그래스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거지만…. 그리고 저는 본의 말투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한마디도 안 하는 캐릭터가 있을까요.

인생: 워낙 과묵해주시는 분이니깐두루.

아니: “이러저러해서 직접 죽이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내 책임도 있는 셈이에요” 할 걸 그냥 “죽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죠. *.*

인생: ^^ 김훈씨의 소설 같은 문장으로 말하죠.

이동진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은>은 중반까지의 코미디는 꽤 재밌었어요. 하지만 권 여사 외의 다른 캐릭터들이 너무 볼품없이 평면적이죠.” 김혜리 “권 여사의 권력은 모든 인물을 ‘자식’처럼 대한다는 데에서 나와요. 모성이란 카드를 내미니 다른 캐릭터와 힘 균형에서 상대가 안 되죠.

아니: 기대대로 올 여름 최고작이었습니다. 다음은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으로 갈까요?

인생: 김상진 감독은 명절에 딱 맞는 컨셉의 코미디영화를 만드는 것 같아요. <주유소 습격사건>도 그렇고 이 영화도 그렇고, ‘사건’이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죠. 기본적으로 해프닝 코미디를 만드시니까요. <광복절특사> 역시 <광복절 특사 사건>이라고 제목을 붙여도 되는 내용이잖아요? 기본 착상에서 영화적 재미의 절반 정도를 끌어내는 영화들이죠.

아니: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이나 <베이비 데이 아웃> 같은 납치영화가 많이 취한 힘의 역전 상황인데,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의 다른 점은 권 여사(나문희)와 유괴범의 주종관계가 납치가 일어나자마자 정립된다는 점이죠. 여사의 자식들이 괘씸한 행태로 어머니의 마음을 긁기 전부터요.

인생: 워낙 인물들 사이의 내공의 차이가 크니까요. ^^

아니: 권 여사의 권력은, 그녀가 돈 많고 지혜롭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모든 인물을 ‘자식’처럼 대한다는 데에서 나오는 거 같아요. 모성이라는 카드를 내미니까 다른 캐릭터와 힘 균형에서 상대가 안 되죠.

인생: 아닌 게 아니라 인질범들과 권순분 여사 사이의 관계도 흡사 어머니와 아들들 같죠. 김상진 감독이 주연을 맡아달라고 할 때, 나문희 선생님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했다는데, 영화를 보니 진짜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니들이 신화맹키로 여섯명이믄 괜찮을틴디, 서태지와 아이들맹키로 서이(셋) 아이가”라고 할 때 진짜 웃기시더라고요. ^^

아니: 재미난 한줄 유머가 많은 영화죠. 다만 훌륭한 중견 연기자들이 그 자신이 최대장점이 되는 영화를 하는 건 안타까운 일인 거 같아요. 영화에 주기만 할 게 아니라 영화로부터 뭔가 얻는, 영화가 그 배우의 숨은 저력과 매력을 끌어내는 경우도 많았으면 좋겠어요.

인생: 100% 동의합니다. 전 영화의 중반까지 코미디 부분은 꽤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후반에 접어들면서 기차로 몸값을 전하는 장면에서 흥미가 사그라들더라고요.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에서도 기차로 몸값을 전달하는 시퀀스가 있는데 그런 멋진 장면을 떠올리면 정말 많이 늘어지고 별다른 재미도 없더라고요.

아니: 저는 <라이터를 켜라>가 중간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_-# 농담이고요. 물량에 값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하긴 어려운 시퀀스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느낀 스트레스는 시끄러움이었어요. 시사회 당시 믹싱문제도 있는 것 같았지만 출연자 모두가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목청을 높이고 왁자해야 그 신이 재미있게 전달된다고 믿는 것 같았어요.

인생: 코미디라는 것을 감안해도, 권순분 여사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이 너무 볼품없이 평면적이라는 점도 아쉬웠죠.

아니: 권 여사 자식들의 캐릭터도, 영화가 표명한 대로 관객이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보기엔 극단적이었죠.

인생: 나중에 권 여사 국밥집이 잘 안 되는 이유도 납득하기 힘들고 바로 앞에 인질범들의 국밥집이 문을 연 것도 납득하기 힘들죠.

아니: 또 날카로운 지적!

인생: 적당히 훈훈하고 적당히 유머러스한 후주를 넣는 게 이런 코미디영화의 공식처럼 되어 있는데, 이 영화는 매우 어정쩡하고 관성적인 모습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이제 <즐거운 인생>으로 넘어갈까요? 이 영화는 음악영화로서 신나는 순간을 잘 포착했다는 느낌이에요. 밴드를 결성하고 나서 연습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흥분이라든지, <터질 거야>를 처음엔 엉망으로 연주하다가 나중엔 꽤 훌륭한 곡으로 만들어내는 데서의 쾌감이 그렇죠. 그때마다 그 노래가 다른 편곡으로 삽입되는데 처음엔 엉성하던 연주가 현준(장근석)이 가세하고 오디션을 할 때는 제법 근사해지죠.

아니: 음악을 테마로 한 영화치고는 레퍼토리가 좀 적은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인생: 모든 곡을 직접 배우들이 배워서 연주한다는 원칙이 있었기에 조금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을 거예요.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다른 점이죠.

아니: 음악에 관한 배우들의 노력은 찬탄할 만했고 그만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인생: 스스로 해냈다, 는 뿌듯함이 있으실 듯. 실제 화면에서 그런 뿌듯함이 보이기도 하고요.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공연하는 것을 봤는데 뭐, 제가 다 흐뭇하더만요. 근데, 어찌나 쑥스러워들 하시는지. ^^

아니: 그런데 주제곡인 <즐거운 인생>은 <라디오 스타>의 <넌 내게 반했어>와 코드나 느낌이 상당히 비슷하게 들려서 좀 아쉬웠어요.

인생: 클라이맥스에서 나오는 곡이니만큼 딱 한번 나오고,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멤버들이 한 소절씩 돌려 부르는 식으로 나오는데 제대로 맛을 살려내지 못한 느낌이 있더라고요. 음악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곡으로는 아쉬움이 많은 노래와 편곡이었어요.

아니: 샐러리맨으로서 퇴출당하거나 오직 돈벌이를 위한 일에 시달렸던 남자들이 중고차 창고를 개조해서 좋아하는 취미와 생업의 공간으로 변신시키는 설정은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아저씨 밴드 ‘활화산’이 홍대 앞 클럽에 진출해서 일거리를 얻는 대목도 허황되지 않았고요.

인생: 영화 후반부에 뚝방 같은 곳에서 네 남자주인공이 추레한 모습으로 앉아 객쩍은 한담을 나누는 장면의 분위기도 좋았어요. “너 빨리 결혼해라. 그래야 이혼할 수 있으니까”, 뭐 이런 대사가 나오는데, 정말 대책없는 사람들이군 싶으면서도 그 철없음이 무척 사랑스럽더라고요. 그런데 그 장면엔 고생하는 아내에 대해 “로커의 아내는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음에 걸리는 대사도 있습죠. -.-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종종 그렇듯 <즐거운 인생>에도 남성들에 대한 애정은 넘치는데 주변 여성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빡빡하고 시각이 왜곡돼 있다는 느낌이 짙었어요.

아니: 결혼관계, 이성애적 관계에 대해 이준익 감독 영화가 적대적이라고까진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여성 인물이 남자들 사이의 유대, 우정, 애정에 비해 초라하거나 거추장스런 존재라는 점은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까지 일관됩니다.

인생: 이준익 감독은 확실히 남성들만의 공동체를 꿈꾸시는 것 같아요.

아니: <황산벌>의 계백 아내(김선아) 정도가 거의 유일하게 기억할 만한 여성 캐릭터인데, 이 캐릭터는 할 말을 제대로 하지만 달리 보면 상징적이게도 남편의 손에 죽었죠. -..-

인생: 이준익 감독 영화에서 남성 공동체에 대한 염원은 워낙 강렬한 것이어서 <즐거운 인생>에선 그 공동체의 일원인 한 친구가 죽으면 그 친구의 아들을 대신 끼워넣어서라도 그 공동체를 복원하려 하는 설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나죠. 그때 여성은 그 공동체를 이해 못하는 아내들이거나 장식품처럼 따라다니는 그루피들뿐이죠.

아니: 무엇보다 남자들이 느끼는 고통의 근원을, 남편보다 아이 교육과 돈에만 관심있는 아내들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물론 여성과 마찬가지로 남성도 그 성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불만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즐거운 인생> 속 여성의 모습은 비난하기 위해 설정된 것처럼 천편일률적이라는 거죠.

인생: 저는 이 영화에서 가장 거슬리는 캐릭터가 성욱의 아내와 세명의 젊은 그루피들이었어요. 성욱의 아내는 너무나 도식화된 캐릭터이고, 그루피들은 한국의 중년 남자들이 그저 머릿속에서 상상할 뿐인, 사실감없는 인물들이죠.

아니: <즐거운 인생>에서 남성들의 불행은 사실 복합적인 것인데 단지 남성과 여성의 문제처럼 비쳐요. 그나저나 김호정씨만큼 영화에 비슷한 이미지로 계속 캐스팅되는 배우가 있을까요? 더구나 그만큼 풍부한 잠재력을 가진 배우가. <플란다스의 개> <모두들 괜찮아요?>와 목소리만 나왔지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까지 무능한 남편에게 큰소리치는 생활력 강한 여자로 분했죠.

인생: <즐거운 인생>은 음악영화적인 활력이 있고 흥미로운 묘사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매우 현실적인 소재에서 출발했음에도 추상적이고 도식적인 결말로 끝맺어 아쉬운 면이 있었습니다.

김혜리 “<두 얼굴의 여친>은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적 업그레이드라고 생각해요. 코미디와 신파적 멜로가 좀더 잘 섞인 칵테일이랄까.” 이동진 “저는 이 영화의 퇴행적인 측면이 가장 걸렸어요. 콘돔을 껌처럼 씹는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아니: <두 얼굴의 여친>은, 보고나니 <세 얼굴의 여친>이 맞더군요.

인생: 사실상 정려원씨의 1인3역이죠. 제목이 <두 얼굴의 여친>인 이유는 그 셋 중 하니가 워낙 ‘안면몰수’하는 캐릭터라서 아닐까요? ^0^

아니: 헉, 또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세 번째 베이네요. 혀 짧은 소리를 내는 순진한 아니와 주량 및 주먹이 센 하니 그리고 본래 자아인 유리가 그 셋인데요. 정려원씨의 과거 캐릭터와 연결짓자면 아니는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복실이, 하니는 <안녕, 프란체스카>의 엘리자베스, 유리는 <내 이름은 김삼순>의 유희진에 가까워요. 일단 저는 <똑바로 살아라>의 정 간호사로 출연할 때부터 연기자로서 정려원씨의 잠재력이 크다고 생각했어요. 밝고 씩씩한 요즘 여성의 전형이고 패션 아이콘이기도 하지만 왠지 혼자 있는 시간에 잘 울 것 같은 얼굴이에요.

인생: 스타성이 풍부한 배우라고 느꼈습니다 .

아니: <두 얼굴의 여친>에 참여한 분들은 인터뷰에서 <엽기적인 그녀>와의 연관을 많이 부정하고 있지만 지하철에서의 만남, 구토 개그, 멀리서 상대를 소리쳐 부르는 ‘등대’ 장면까지 인용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대목들이 있죠.

인생: 기본적으로 하니의 성격과 남녀 주인공의 관계가 그렇죠.

아니: 그래도 저는 이 영화가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적 업그레이드라고 생각해요. 코미디와 신파적 멜로가 좀더 잘 섞인 칵테일이랄까. <엽기적인 그녀>에 비해 영화가 갑자기 뒤집어지는 위화감이 덜했습니다. 차라리 다중인격이라는 비일상적 설정이, 영화의 비현실적 스타일, 인물의 비현실적 성격과 톤이 맞았어요.

인생: 그래요? 저도 <엽기적인 그녀>를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는 편이긴 한데, 이 작품은 대중영화로 <엽기적인 그녀>에 비해서 재미가 많이 떨어진다고 봤어요. 무엇보다 캐릭터의 매력이 적고 에피소드들이 신선하지 않죠. 저는 <두 얼굴의 여친>의 경우 퇴행적인 측면이 가장 걸렸어요. 코미디에서 어느 정도의 퇴행성은 용인될 수 있고 또 필요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인데도 이 영화의 인물들이 보이는 퇴행성은 좀 심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콘돔을 껌처럼 씹는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아니: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를 의도한 것 같지는 않고 어른이 되게 해준 사랑 이야기를 의도한 거겠죠. ^.~

인생: 특히 세 남자 조연 캐릭터들은 정말 많이 거슬리더군요.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들은 학예회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니: <달콤, 살벌한 연인>을 볼 때도 느꼈지만 <두 얼굴의 여친>의 다중인격 장치는 여러 각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아니의 아기처럼 청순한 모습이나 하니의 판타지에 가까운 가학성. 이것이 여자들이 꿈꾸도록 허락된 두 가지 이미지가 아닌가 싶어요. 또 <달콤,살벌한 연인>의 연쇄살인극이나 <두 얼굴의 여친>의 다중인격은 보편적 연애 심리를 극단화한 비유가 아닐까요. 연애할 때는 상대방에게 내가 모르는 얼굴이 있다는 점이 무의식적인 불안이잖아요? 이 영화에서 구창(봉태규)은 유리에게서 아니를 없애는 다중인격 치료에 대해 펄쩍 뛰는데, 이건 내가 좋아하는 상대의 면모가 인격의 중심이 아니라면 어쩌나 하는 질문과 비슷해요. 요컨대 어떤 면에서 <엽기적인 그녀>와 <두 얼굴의 여친>은 남자의 판타지예요. 평범한 남자에게 이른바 ‘퀸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죠. 그런데 그녀에겐 알고보니 치명적 결함이 있어요. 그건 과거의 다른 잘난 남자가 남긴 상처고요. 우리의 평범남은 그 마법을 풀어줌으로써 공주님의 참사랑을 차지하게 되고 진짜 애인이 됩니다. ^^

인생: 퀸카가 내 여자일 리는 없다, 그러니 그 여자는 결함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 무의식이 투영된 셈이죠. ^^ 나도 그 여자를 내 여친으로 만들 자격이 있다는 자기 암시랄까. 자신이 킹카가 될 수 없으니, 상대가 퀸카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방법을 쓰는 거죠.

아니: 전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면서도, 요즘에는 영화가 TV드라마보다 리얼리티가 더 떨어지는구나 싶었어요. 만약 이런 인물 설정으로 드라마를 찍으면 비현실적이다 장난스럽다는 비판이 대뜸 대두되지 않을까요? 어느 틈엔가 영화와 TV의 환상성이 역전되어서 영화가 현실의 검열에서 더 동떨어져 있는 세계가 된 듯해요.

인생: 로맨틱코미디에서 일정 정도의 ‘닭살’은 당연히 있어야겠지만, 이 영화의 ‘닭살’은 몰입을 방해할 정도였어요. 아니가 고개를 빠르고 귀엽게 끄덕이면서 “으으응” 할 때나, 구창이 클라이맥스에서 등대처럼 행동하는 대목은 정말 부담스럽더라고요.

아니: 그 부담을 존중합니다. ^^;

인생: 존중하되, 인정하지 않는다는? ^^

아니: 인정도 합니다.

인생: 인정하되 동의하지 않는다는? ^^

아니: -..- 혹시 대화명이 ‘줄거온 인생’이 아니라 ‘질긴 인생’ 아니에요? <마이파더>는 제가 시사회를 놓친 추석영화네요.

인생: <마이파더>는 시사회가 늦어 메신저토크에서 다룰 시기를 놓쳤는데 미덕이 꽤 많은 작품이라서 거론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입양아 애런 베이츠씨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인데, 친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주한미군이 된 주인공이 2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수가 된 아버지를 만난다는 내용이죠. 이 영화를 보시는 분들의 절반은 대니얼 헤니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 그분들 중 90%는 이 영화에서 그의 연기에 만족하실 것 같아요.

아니: ^0^

인생: 헉. 갑자기 확 빈정이 상한다는. -.- 대니얼 헤니가 연기까지 잘한다면, 그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유력한 증거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요? -.-

아니: 하지만 언어 장벽이 있잖아요. 저는 대니얼 헤니가 배우로서 가진 잠재력은 아름다운 외모보다 많이 사랑받고 자란 사람의 온전함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뛰어난 외모가 그걸 극대화해서 드러내긴 하지만요. 그런 자질은 어떻게든 관객을 감응하게 하죠.

인생: 저도 인터뷰를 하고 나니 그런 생각이 강해지더라고요. 흡사 영화에서의 상황과 아주 비슷한데, 극중 대니얼 헤니가 연기하는 제임스는 양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캐릭터거든요. 왜 제임스가 그토록 친부와의 관계에 맹목적이고도 헌신적으로 매달릴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가능한 해답 중 하나는, 제임스가 성장과정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성향 자체가 그렇다는 거죠. 대니얼 헤니는 이 영화에서 몇번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연기하는데 저는 그중 좌절해 유리창을 깨고 헌병에게 체포될 때의 연기가 가장 훌륭하다고 봤어요. 처음으로 대니얼 헤니가 스타가 아닌 온전한 배우로 보였으니까요.

아니: 그렇군요. 연출의 스타일도 궁금한데요.

인생: 성실하고 겸손한 연출입니다. 곁가지로 빠지지 않고 실화가 주는 감동 그 자체의 이야기적 속성에 주력했는데, 심지어 흔하디 흔한 남자주인공의 로맨스도 넣지 않았을 정도니까요. 탁월한 완성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중적으로 강력한 화법이 제대로 통해서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설복되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저는 ‘유전’의 모티브를 활용한 장면과 대사가 참 맘에 들더라고요. 양부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집안 내력인 심장병이 네겐 없을 테니 참 다행이야”란 말을 하죠. 맨 마지막엔 실제 모델 애런 베이츠의 다큐멘터리 장면들이 삽입되는데 애런이 친부에게 “아버지도 감기 걸리셨어요? 저도 걸렸는데. 부전자전이네요”라는 말도 해요. 그런 유전적 모티브들이 인물들의 감정을 세심하게 드러내면서 많은 울림을 주거든요.

아니: 시간나는 대로 이자벨 위페르 회고전과 함께 챙겨봐야겠습니다. 그 다음은 <본 얼티메이텀>을 다시 한번 봐야겠고요. ^^

인생: 달을 보고 무슨 소원을 비실 건가요?

아니: “달을 자주 올려다 볼 수 있게 해주세요”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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